시월의 마지막 날을 보낸다

by 남궁인숙

두 달 전 친구들과 여름 여행을 마치면서 가을 여행지는 어디가 좋을까 곰곰이 생각하다가 강원도를 여행지로 선택하고 날짜를 정하였다. 바로 내일이면 두 달 전 계획했던 여행을 떠나는 날이다.

배낭 속에 1박 2일의 짐을 챙기고 있자니 만난 지 37년 된 내 친구, 거의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는 친구, 그 집안의 대소사에서부터 이모, 고모, 삼촌, 사돈의 팔촌까지도 다 알고, 숟가락 젓가락 숫자까지도 알고 셀 수 있을 만큼 절친인 내 친구에게 문자가 들어온다.

아버지께서 위독하셔서 119를 타고 응급실을 벌써 네 번째 드나들고 있다면서 지금 병실에서 숨 고르는데 안간힘을 쓰고 계시지만 곧 돌아가실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친구 아버님은 20년 가까이 오랫동안 편찮으셨기에 온 가족들은 늘 노심초사하면서 아버지 병간호를 해 왔었다. 특히 함께 사시는 어머니는 얼마나 더 힘드셨을까? 어머니께서도 78세 노인이신데 아버지를 요양원으로 모시는 일을 극구 반대하셔서, 여태껏 출퇴근하는 요양사와 요양사가 없는 시간은 가족들이 번갈아 가면서 돌봐왔었다.

친구와의 문자를 끝내면서 내일 새벽에 여행 가는데 혹시 부고를 받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면서 오지 않는 잠을 청했다.



5시 기상!

용인에 사는 친구 집까지 6시 30분까지 도착해야 하는데 샤워하고, 머리 말리고 출발하면 조금 빠듯한 시간이다. 후다 닥닥 모터 달린 행동거지로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정리하고 집을 나서서 50분간 운전을 하여 용인 동백지구까지 정확히 6시 30분에 도착하였다. 함께 동행하는 또 다른 친구는 벌써 도착해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은행잎과 단풍잎이 수북하게 쌓여가는 동네를 지나려니 핼러윈 데이를 위한 핼러윈 인형들이 베란다와 현관 문고리 등에 매달려 있고, 가가호호 앞마당에는 핼러윈 호박램프까지 놓아두고 장난꾸러기 아이들을 기다리며 핼러윈 파티를 준비 중인 것을 보니 참 재미난 동네라는 생각이 든다. 타운하우스에 사는 사람들을 위한 관리사무소의 관심과 정성으로 시월의 마지막 날이라는 절기를 느끼게 하였다.

친구들과 하이파이브를 하고 여행지로 출발! '인생 뭐 있나? 즐겁게 놀고 행복하면 그만이지. 아웅다웅 살지 말고 먹고 싶은 것 찾아서 먹고, 가고 싶은 곳 다 가 보고, 눌고 싶을 때 놀고, 즐겁고 행복하게 살면 되는 거야.' 이런 마음으로 떠난 강원도 여행이다.

차 안에서 친구들은 길이 많이 막히니까 내일은 밤늦게 출발해서 오자고 한다. 나는 어젯밤 절친과 나눴던 내용을 이야기하면서 어쩌면 우리가 지금 여행 가는 도중에 부고를 받을 수도 있다는 얘기를 하고 양해를 구했다. 그 순간 절친 아버님께서 소천하셨다는 부고 메시지가 뜬다. 친구들은 그러면 내일은 점심 먹지 말고 12시 이전에 서울로 돌아가자고 한다.


어떠한 여행이든 여행을 떠난 다는 것은 '가득한 설렘'이다. 고무풍선처럼 한껏 부푼 마음으로 들떠서 한걸음에 달려 나간 자동차는 서너 번의 휴게소를 지나친 후 00 휴게소에 내려 생리적인 현상을 해결하고, 커피를 산다. 차가운 입김을 불며 적당한 온도의 커피를 마시면서 우리들의 여행은 더욱 즐거워진다.

드디어 강원도 동해의 어느 한적한 바닷가에 도착하여 거침없이 바닷가 모래사장에 발을 디디자 뽀드득뽀드득 소리를 내며 마른 모래소리가 들린다.

"아하!" 갑자기 운전대를 잡았던 친구가 자동차 트렁크에 재미있는 용품이 있다면서 맘 카페에서 산 간이 탁자와 접이식 간이 의자 세 개를 들고 나와 바닷가 모래사장에 펼쳐놓는다. 도깨비방망이처럼 순식간에 환상적인 제법 멋스러운 바닷가 카페가 뚝딱 만들어졌다.

바다를 향하는 맞은편 2층 건물, 넓은 창가를 차지하고 카페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며 담소를 나누던 관광객의 먼 시선에서 레이저가 나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부러운데 안 보련다'라는 눈치다.



오늘의 여행 가이드인 운전대 잡은 여인, 우리 중에서 가장 나이 어린 친구에게 언니들은 여행을 완벽하게 의존한다. "오늘 점심은 뭘 사 주실 건가요?"라고 물으니 가보면 안다고 한다. 미리 일정을 공유해 주지 않는 여행도 쫌 재미있다.

가정형 일식집 같은 분위기의 식당에 들어서니 덮밥 냄새가 식당을 가득 메우고 있다. 가격이 만만치 않은 성게알 듬뿍 올린 덮밥, 참치와 연어가 어우러진 덮밥, 회덮밥 등 다양한 메뉴를 골고루 시켜서 맛을 보고, 수제 맥주로 목을 축인다.

밥을 맛있게 먹고 인근의 카페에서 두 시간 동안 줄을 서서 흑임자 라테를 사서 마시는데 약이 오른다. 긴 줄을 그렇게 오랫동안 서게 했던 넓은 카페 안은 텅 텅 비어 있었다. 굳이 밖에 긴 줄을 세운 이유를 시냇가의 맑은 물 들여다보는 것 같다. 어쨌든 우리는 다시 평창으로 출발하였다.


삼양 농장에 도착하여 매표소에 가니 해가 지려면 2시간밖에 남지 않았다면서 서둘러서 둘러보려면 입장이 가능하다고 한다. 우리는 버스 타고 올라갔다가 내려올 때는 걸어서 내려오는 길을 택했다.

산 능선을 끝까지 버스를 타고 올라가 보니 해 질 무렵 시월의 멋진 가을날에 잘 익은 농장 풍경이 들어온다. 알프스 소녀 하이디가 뛰어놀았던 스위스의 어느 들판 같은 풍경이 눈앞에 펼쳐져있고, 가을볕에 숙성된 목초지를 마음껏 누비는 양 떼들도 즐거워 보인다. 사람들에게 두려움 없이 다가오는 걸 보니 관광객들에게 많이 익숙한가 보다. 늘 여행하면서 느끼는 감정이지만 '우리나라 참 좋은 나라야......'

두어 시간 농장투어로 가벼운 산책을 하고 나니 다시 위장의 시계는 음식을 채워야 하는 때임을 알려준다. 다이어트를 해야 한다고 전두엽에 아무리 암시를 줘도 배는 시도 때도 없이 고파진다. 대관령 감자 빵과 닭갈비로 저녁을 거하게 먹고 호텔로 향했다.



다음날 조식 후 체크아웃을 하고 청태산 휴양림으로 산책을 나섰다. 서울로 가는 발걸음으로 마음이 바빠지지만 휴양림의 공기를 가슴으로 들이마시며, 자연이 주는 한 편의 서사에 호흡이 편안해진다. 그러나 우리는 청태산 1코스도 못 올라가고 다시 내려왔다.


집에 도착하여 최대한 검은색 옷으로 갈아입고, 친구 아버지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위로의 말을 건넬 필요도 없이 눈빛만 봐도 알 수 있는 내 친구, 장녀 노릇 하느라 애썼던 그동안의 순간들이 한 편의 파노라마 영상처럼 스쳐 지나간다. 임종의 순간까지 아버지 침상을 지킨 내 친구의 작은 어깨가 오늘따라 더 왜소하게 느껴진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야 하는 마음은 언제나 무겁고 슬프다. 그 슬픔의 무게는 세월의 씻김을 얼마만큼 흘려보내야 한다는 것을 먼저 경험한 나는 잘 알고 있기에 위로랍시고 뭔가 한마디를 할 수 없었다.

모든 죽음은 슬프다. 부디 영면하시기를.......


시월의 마지막 날, 조문 중에 갑자기 천둥번개가 휘몰아치며 요란하게 장맛비처럼 비가 내린다. 마치 타악기의 장송곡을 연주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시월의 마지막 날에 떠나보내는 이들과 떠나는 이의 슬픔 가득 찬 연주곡이다.

시월의 마지막 날은 해마다 달력의 한자리를 차지하는데 우리는 늘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며 이 날을 기린다.

단풍이 짙어가는 가을날, 우리는 뜻 모를 이야기만 남긴 채 시월의 마지막 날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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