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교좌, 목회자 자리와 교회 권력을 둘러싼 되풀이된 갈등
탐욕이 소유를 향한 욕망이라면, 시기는 타인의 영광, 지위, 명성, 권력을 빼앗고 싶어 하는 욕망이다. 시기는 단순히 ‘부러움’ 정도의 감정이 아니라, 타인의 선(善) 자체를 괴로워하며 그것을 훼손하고자 하는 파괴적 충동이다. 이러한 충동은 결국 기독교 역사에서 반복되어 온 교권을 둘러싼 경쟁과 파벌의 투쟁, 곧 성직자의 권력투쟁이라는 고대부터 현대까지 이어지는 구조적 문제를 낳았다. 사실 기독교 교회는 세속 권력과 전혀 무관한 오로지 하늘의 영광을 준비하는 공동체로 출발했으나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된 이후 조직화와 제도화 과정을 거치며 오히려 세속 정치보다 더 세속적인 암투가 벌어지는 권력 투쟁의 장이 되어 버렸다. 중세 가톨릭 교회의 주교좌, 수도원장은 물론 교황 자리도 종교적 열정보다 영주의 지위, 세금, 봉토 확보를 위한 치열한 자리다툼이 벌어지는 것이 된 것이다.
종교개혁 이후 새로 등장한 개신교 목사와 교단 지도자들의 권력투쟁도 가톨릭 교회가 벌인 것에 못지않았다. 오히려 어느 모로는 권력에 대한 야망을 감추기 위해 교리적 정당성을 무기로 삼았다는 점에서 더 은밀하고 추악한 것이었다. 현대에 와서도 여전히 개신교 교회가 같은 교단 내부에서조차 성직자 청빙 문제, 교회 재정 통제권, 노회와 총회 의석수를 놓고 벌인 다툼은, 중세의 가톨릭 교회가 보여준 주교좌를 놓고 서로 치고받은 싸움과 구조적으로 동일했다.
중세 교회에서 주교좌는 단순한 종교적 직책이 아니었다. 주교는 사실상 하나의 영주였으며, 여러 성속을 오가면서 절대적인 권한을 갖고 있었다. 주교는 성직자를 임명할 권한이 있었다.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인사권은 충성파를 조직하는 데 가장 효율적인 무기가 되었다. 부패의 고리가 만들어지기 쉬운 구조였다. 더구나 성직자 임명을 신의 뜻에 따라 한다는 데 누가 반대를 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주교에서는 세속의 영주와 마찬가지로 토지와 금전을 관리하는 권한이 있었다. 자신이 다스리는 지역의 토지에서 나오는 수익을 거두어들이고 백성들에게 세금을 징수할 권한이 있었다. 여기에 더해 교회 법정을 통해 백성들을 통제하는 사법권도 있었다. 게다가 군대를 보유하고 지휘할 수 있는 권한도 있었다. 주교 휘하에 군사력을 유지하는 권한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어느 지역에서 누가 주교가 되느냐는 문제는 신학적 문제가 아니라 철저한 정치, 군사, 경제 권력의 분배와 관련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교회와 세속 권력의 결탁은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지면서 더욱 공고해졌다.
예를 들어 오늘날 서유럽의 토대를 만든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대제는 충성도가 높은 성직자들을 주교로 세워 봉건 질서를 강화했다. 그 결과 주교좌는 귀족 집안의 자리를 놓고 벌이는 세습적 투쟁의 전쟁터가 됐다. 이리하여 유럽 여러 지역에서 피비린내 나는 투쟁이 벌어졌다. 대표적인 지역이 독일의 마인츠와 이탈리아의 밀라노였다.
마인츠 대주교좌는 신성로마제국 제국 정치의 심장부로 장 영향력이 큰 자리였다. 마인츠 대주교는 단순한 종교 지도자가 아니라 독일 지역의 대재상(Erzkanzler)이자 황제 선출권을 가진 세 명의 영적 선제후(Elektoren) 중 하나였다. 그래서 마인츠 대주교좌를 차지하는 것은 곧바로 제국 전체의 정치 운영을 좌우하는 힘을 의미했다. 이런 자리를 놓고 문자 그대로 피를 흘리는 투쟁이 벌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대표적인 것이 1070년부터 1100까지 벌어진 이른바 그레고리우스 개혁과 제국 교회제 붕괴 사건이었다. 당시 마인츠 대주교였던 지크프리트 1세(Siegfried I)와 바르톨로메오(Bardo)는 교회 개혁에 동조하면서 신성로마제국 황제, 특히 하인리히 4세와의 서임권 투쟁을 벌였다. 이 일로 마인츠 지역 전체는 내전에 휘몰리게 되었다.
1120년부터 1138년까지는 로타르 3세와 슈타우펜 가문 사이에 무력 충돌이 발생했다. 1120년대 후반 마인츠 대주교 임명을 둘러싸고 프리드리히 2세 황제를 앞세운 슈타우펜 가문과 작센-바이에른의 게르만 귀족 연합이 서로 자신이 미는 인물을 주교좌에 앉히려다 결국 지역 영주들 사이에 무력 충돌을 야기했다. 두 명의 대주교가 동시에 선출되어 정통성 논쟁이 벌어진 것이다. 한 사람은 교황이 승인한 하인리히 폰 라이닝겐(Henrich von Leiningen, ?~1247) 다른 한 사람은 제후들과 황제 지지 세력을 등에 업은 지그프리트 3세(Siegfried III. von Eppstein 1195~1249)였다. 하인리히는 1238년경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와 인노켄티우스 4세의 지지를 받아 마인츠 대주교로 선출되었다. 그는 교황파의 대표 인물이기에 교황이 그의 정통성을 공식 승인한 것이다. 그러나 마인츠 귀족 엡슈타인(Eppstein) 가문 출신 지그프리드 3세는 프리드리히 2세 황제와 마인츠 대성당의 고위 성직자들의 지지로 이른바 대립대주교(Gegen-Erzbischof)로 선출되었다. 이 대립은 결국 군사적 대결로 이어졌다. 양측은 군대를 동원해 상대방의 성채를 공격하며 지역 봉건 제후들이 개입하게 되면서 10년에 가까운 내전이 이어졌다. 이 때문에 마인츠 주변과 라인강 상류 지역에서는 장기간의 전쟁으로 세금 부담 증가, 무역 위축, 농촌 피해 등이 이어졌다. 그리고 사제 임명, 교회 재정 관리, 재판권 행사 등 교회 행정이 마비되었다. 그러나 하인리히 폰 라이닝겐이 사망하면서 전세는 지그프리트 3세를 공식적으로 대주교로 임명했다. 그러나 교황청과 지역 영주들과의 갈등은 지속되었다.
마인츠 못지않은 교회가 정치권력의 대립에 깊이 관여한 지역이 밀라노였다. 밀라노는 중세 유럽에서 매우 부유하고 인구가 많았던 도시국가였다. 밀라노 대주교는 이 도시의 실질적 통치자이자 정치, 경제, 법률권을 거의 단독으로 행사했다. 그래서 밀라노 대주교좌는 단순한 종교적 자리라기보다 도시 전체를 지배하는 군주적 위치였다. 이 때문에 도시 귀족 가문들은 이 대주교좌를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밀라노는 원래 람피타(Lampitta) 귀족 가문과 치비코(Civico) 공동체 세력이 균형을 이루던 도시였다. 그러나 10세기 이후 비스콘티(Visconti), 델라 토레(Della Torre), 스포르차(Sforza)와 같은 신흥 대귀족 가문이 도시 지배권을 두고 무력 투쟁을 벌이면서, 대주교좌를 둘러싼 갈등이 심화되었다. 먼저 11세기 후반에 개혁파와 제국파의 충돌이 발생했다. 암브로시우스 전통을 계승한 밀라노 교회는 교황 개혁파의 주요 거점이었기에 그레고리우스 7세 교황과 하인리히 4세 황제가 각각 대주교 후보를 임명하며 대립하다가 결국 도시 전체를 전쟁터로 만들어 버렸다. 이 대결은 파타리아(Pataria) 운동을 촉발했다. 그 와중에 성직매매에 반대하는 민중운동도 있었지만 결국 이 갈등은 귀족 가문의 내전 형태로 변질되었다. 먼저 124년부터 1270년까지 델라 토레 가문과 비스콘티 가문이 대립하였다. 이들은 대주교좌를 놓고 치열하게 다투었다. 델라 토레 가문은 공동체주의를 내세우며 민중의 지지 기반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에 비해비스콘티 가문은 제국의 지배층과 귀족 가문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각 가문은 자신들의 후보를 대주교로 앉히기 위해 교황과 황제는 물론 베로나, 파비아, 피아첸차 등과 같은 다른 도시국가까지 끌어들여 대규모 전쟁을 벌였다. 교황이 임명한 오토네 비스콘티(Ottone Visconti) 대주교는 밀라노 귀족 가문의 반대 때문에 20년 가까이 자리에 오르지 못했다. 그러다 결국 군대를 조직해 데솔라리오 전투(Battaglia di Desio)에서 델라 토레 가문을 이기고 마침내 도시를 무력으로 점령했다. 이후 비스콘티 가문은 150여 년간 밀라노를 통치하는 사실상의 군주가 되었다. 그러다가 1450년 이후에는 비스콘티 가문의 대가 끊어지면서 스포르차 가문이 세력을 얻게 되어 대주교좌를 자가 가문 지배 체제의 정당화 도구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교황청은 밀라노 통제력을 강화하려고 자체 후보를 밀었고 그 결과 양측은 군사적으로 충돌하여 도시 경제 마비와 시민 봉기를 초래되었다.
이런 대표적인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주교좌는 ‘성령의 은사’가 아니라 ‘정치권력의 최전선’이었다 마인츠 대주교좌는 제국 전체의 정치 향방을 결정하는 전쟁터였고 밀라노 대주교좌는 도시국가 지배권의 상징이자 왕권 그 자체였다. 주교좌는 그 지역의 군사적, 정치적 패권 확보의 수단이 되는 것이었기에 세속 귀족 가문들이 자신들의 영향력 강화를 위해 주교좌 장악 시도를 되풀이하게 되었다. 이 분쟁에 흔히 교황과 황제가 개입하여 도시가 전쟁터가 되고 일반 시민은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되었다. 교회가 주교를 임명하면서 내세우는 성령의 인도는 이런 권력 투쟁에서 그 실체를 찾아볼 수 없었다. 마인츠와 밀라노는 성직 임명권이 권력투쟁의 핵심이라는 사실을 잘 드러낸 지역이다. 주교좌는 신앙의 자리라기보다 유럽 중세의 권력 구조가 압축된 핵심 자리였다. 이런 주교좌를 두고 귀족 가문끼리 살인을 동반한 암투가 오가던 상황에서는 교회가 내세우는 주교는 성령의 감동에 따라 임명된다는 가톨릭 교회가 내세우는 명분은 그저 허황된 공염불에 불과했다.
주교좌를 놓고 벌인 투쟁 못지않은 폐해인 성직 매매는 중세 기독교 교회의 구조적 병폐였다. 이는 단지 일부 탐욕스러운 성직자가 아니라, 제도 전반이 부패한 결과였다. 대표적으로 레오 10세 교황은 재정 확보를 위해 성직을 대규모로 판매했다. 그리고 수도원장직은 막대한 수입을 보장했기에, 귀족 자녀들이 노리는 황금 티켓이 되었다. 강력한 귀족 가문은 자기 집안사람들을 주교나 추기경으로 만들기 위해 교황청에 거액의 돈과 선물을 보냈다. 그 결과, 성직은 종교적 소명이라기보다 귀족 가문의 권력 확장의 도구가 되었다. 이 구조에서 경쟁과 시기, 암투가 발생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수도원은 흔히 권력투쟁과 무관한 순수한 신앙 공동체로 묘사되지만 현실은 정 반대인 경우가 많았다. 중세 문헌을 보면 수도원 내부에서도 권력과 지위를 둘러싼 심각한 갈등이 있었다. 그 주요 원인도 결국 돈이었다. 수도원장은 막대한 토지와 재정을 관리했다. 수도원의 고위 성직자는 권력 다툼의 핵심 축이었다. 같은 수도원의 수도사들 사이에서도 특정 파벌이 형성되어 조직적 경쟁을 벌였다. 특히 클뤼니 수도원과 시토 수도원은 서로 수도원 세계의 헤게모니를 둘러싸고 대립한 것으로 유명하다. 수도사들은 겉으로는 경건과 청빈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교황청과 각국 왕실의 인사와 재정 문제에 깊숙이 개입했다.
이러한 가톨릭의 비리를 참지 못한 기독교 지도자들이 가톨릭의 부패를 더 이상 묵과할 수 없어서 종교개혁을 일으켰지만 개신교도 권력을 잡고 제도화되고 나서는 가톨릭과 똑같은, 심지어 그보다 더 치열한 경쟁의 프레임을 만들어 서로 투쟁을 벌였다.
루터파와 츠빙글리 파가 벌인 마르부르크 회담(1529)은 사실 신학 논쟁이 아니라 정치적 헤게모니 싸움이었다. 역사는 흔히 이것이 성찬론을 둘러싼 신학 논쟁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철저히 독일 루터파와 스위스 개혁파가 개신교 세계의 주도권을 놓고 벌인 헤게모니 싸움이었다. 잘 알려진 대로 루터는 독일 제후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반면에 츠빙글리는 스위스 도시국가 연합의 지지를 받았다. 양측은 자신의 노선이 정통 개신교임을 주장하며 서로를 이단으로 규정했다. 그래서 마르부르크 회담은 단순한 교리 논쟁이 아니라, “누가 유럽 개신교의 중심이 될 것인가”를 결정하는 힘의 대결이 벌어지는 사건이었다. 결과적으로 루터파와 개혁파는 완전히 분리되었고, 이때부터 개신교는 모래알처럼 부서지는 이른바 연쇄 핵분열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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