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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코스트와 교회의 비겁한 침묵

악 앞에서의 침묵은 악에 동조하는 것일 뿐

by Francis Lee

20세기의 가장 거대한 비극이자 인간 정신의 최저점을 보여주는 홀로코스트(Holocaust)는, 단순히 한 독재자의 광기나 특정 이데올로기의 잔학성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그 사건은 유럽 문명 전체의 구조 속에서 발생한 집단적 실패였다. 특히 그 중심에는 수세기 동안 형성된 기독교적 반유대주의, 그리고 1933년 이후 교회가 보여준 침묵·동조·회피의 윤리적 파산이 자리한다.


역사가 사울 프리드랜더(Saul Friedländer)는 그의 저서 <나치 독일과 유대인: 박해의 시기, 1933~1939>(Nazi Germany and the Jews: The Years of Persecution, 1933~1939) 나치의 유대인 박해는 유럽 기독교의 반유대주의 유산 없이는 상상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의 말대로 유럽 교회는 실제로 중세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유대인은 그리스도 살해자”, “집단적 배신자”, “신의 저주를 받은 민족”이라는 이미지를 끊임없이 반복했다. 이 종교적 반유대주의(anti-Judaism)는 19세기 이후 인종적 반유대주의(antisemitism)의 토양이 되었으며, 결국 나치즘은 그 토양에서 싹을 틔웠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기독교 세계는 유대인을 '신을 배신한 민족', '집단적 저주를 받은 존재'로 규정했다. 기독교 교부들은 이 이미지를 더 선명하게 만들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유대인을 '증거의 민족'(testimonia)이라 하여, 그들은 떠돌고 고난 받음으로써 기독교의 진실성을 드러내는 존재라고 말했다. 곧 유대인의 고난은 신학적으로 기독교의 관점에서 나름 ‘기능’이 있다고 정당화한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역사에서 최고의 설교자로 정평이 난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는 유대인을 “짐승보다 악한 존재”, “타락한 민족”이라 불렀다. 이런 전통을 이어받아 결국 제4차 라테란 공의회(1215)에서 발표한 문헌 제68항에 나오는 가톨릭 교회는 사라센인들과 더불어 유대인을 그들의 복장을 통해 겉으로 구분할 수 있도록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는 유대인 남녀가 ‘유럽 백인’ 남녀와 성관계를 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 조치에 따라 유럽 여러 지역에서는 유대인을 구분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적용했다. 이러한 교회의 명령은 지역 사정에 따라 원형 패치, 원뿔 모자, 파란 스트라이프, 빨간 망토, 흰색 명찰의 착용으로 시행되었다. 여기에 더해 노란 배지의 착용도 지역에 따라 강행되었다. (Shoah Resource Center, The International School for Holocaust Studies, https://wwv.yadvashem.org/odot_pdf/microsoft%20word%20-%2059.pdf?utm_source=chatgpt.com)


바로 이것이 히틀러 통치 아래 나치가 실시한 노란색의 이른바 ‘노란 다윗별’(gelber Davidstern) 정책과 연결된다. 1941년 9월 1일 제3제국 국가보안본부 국장이었던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Reinhard Heydrich)가 제정한 “유대인 표식에 관한 경찰 명령”이라는 제목의 문서에서는 제3제국 안에 사는 6세 이상 모든 유대인이 “ ‘유대’라는 문자가 새겨진 오란 다윗별”(gelber Davidstern mit dem Wort ‚Jude‘)을 옷에 붙이도록 했다. 이로써 중세 가톨릭 교회가 먼저 시작한 유대인 배제의 제도적 관행이 나치 시대에 세속 정치권력을 통해 유럽 전체에 획일적으로 실시된 것이다. 흔히 알려진 대로 이는 히틀러 나치의 발명품이 결코 아닌 것이다. 유구한 기독교 교회 전통을 계승한 것일 뿐이었다.


사실 히틀러 이전인 19세기부터 유럽에서는 과학주의와 인종주의가 발달하면서 유대인 혐오는 신학적 언어에서 “생물학적 언어”로 전환했다. 곧 유대인이 생물학적으로 유럽인에 비해 열등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교회는 이를 반대하지 않았고, 오히려 기존 반유대주의적 인식을 강화하는 가운데 인종주의가 결합해 새로운 차원의 박해가 준비되었다. 예수회가 발행하며 교황청의 검열과 승인을 받는 가톨릭의 대표적인 매체인 <Civiltà Cattolica>는 19세기말 유대인을 다음과 같이 규정했다. “유대인은 사회적·도덕적 타락의 중심이며, 기독교 문명의 적이다.”(Civiltà Cattolica, various issues, 1880~1890. 참조) 이는 단순히 한 신문 기자의 개인적 의견이 아니라, 바티칸이 공식적으로 승인한 철저히 관료적인 교계제도를 통해 나온 실질적 교회의 공식 입장이었다. 한 마디로 유럽의 반유대주의는 기독교에 기반한 종교적, 신학적 차원에서 먼저 실시되었고, 그 위에 아리안족이 최고라는 인종주의가 얹혀 히틀러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 정책으로 구체화된 것이다.


바티칸은 이런 히틀러와 1933년 <제국협약>(Reichskonkordat)을 맺었다. 이 협약은 그 당시 아직 취약한 위치에 있던 나치 정권을 국제사회에서 합법정부로 인정해 주는 가장 강력한 외교적 승인 조치가 되었다. 히틀러의 나치 독일을 합법적 국가로 인정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 당시 교황 비오 11세의 국무장관이었고 나중에 비오 12세 교황으로 즉위한 파첼리는 이 협정 체결 직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독일 정부는 교회와 평화를 원하고 있다.”(Acta Apostolicae Sedis [AAS], 1933.)


그러나 협정의 본질은 오로지 교회의 이기적 이익만 추구한 것일 뿐이었다. 이 협정의 주요 내용은 바로 가톨릭 교회가 독일에서 운영하는 성직자 양성 기관과 학교 운영의 일정한 자율성을 보장받는 것이었다. 그 대가로 바이마르 공화국 때부터 최대의 가톨릭 계열 정당이었던 <중앙당>(Zentrum)을 교회 스스로 해산해 버렸다. 이렇게 하여 나치당을 합법적으로 제어할 장치가 독일 정치계에서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 교회는 히틀러 체제를 공식적으로 비판하지 않았다.


독일 역사학자 Klaus Scholder는 이를 두고 “제국협정은 독일 가톨릭 교회가 히틀러와의 모든 공개적 충돌을 포기한 문서였다.”라고 일갈했다.( Klaus Scholder, The Churches and the Third Reich 참조) 곧 가톨릭 교회는 조직의 이익을 위해 독재자에게 도덕적 정당성을 부여했다.


흔히 1933년 총선에서 가톨릭이 다수인 지역의 나치당 지지율이 개신교가 다수인 지역보다 낮았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는 부분적 사실이다. 1933년 이후 나치 정권이 안정되자 수많은 가톨릭 단체와 성직자들은 적극적으로 “국가에 대한 복종”을 강조하며 히틀러 정권을 수용했다. 가톨릭 신학자 콘웨이(A. Conway)는 가톨릭 교회와 나치주의 사이에는 심각한 신학적 갈등이 존재했만, 많은 신부는 히틀러의 반공주의를 환영했다.”(John Cornwell, Hitler’s Pope, 1999) 반공주의(Antikommunismus)는 가톨릭과 개신교를 막론하고 기독교 교회가 히틀러와 타협하게 만든 가장 강력한 이유였다.


히틀러를 공개적으로 찬양하는 데에서 더 나아가 아예 교회의 나치화를 추진한 집단은 개신교 내부에도 있었다. 이른바 ‘독일 기독교인’(Deutsche Christen)으로 불리운 이들의 주장은 간단명료했다. 먼저 기독교는 아리안 인종의 종교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구약은 ‘유대적’이므로 기독교 경전에서 제거해야 한다고 했다. 게다가 예수는 ‘비유대적 아리안 영웅’이었다는 주장까지 했다. 그리고 마침내 1933년 11월 베를린 ‘스포츠팔라스트’(Sportpalast)에서 개최된 2만 명의 개신교 신자가 모인 집회에서 이들은 히틀러를 독일 민족의 구원자로 믿는다는 선언까지 해버린 것으로 잘 알려졌다.(https://de.evangelischer-widerstand.de/html/view.php?type=dokument&id=18)


이는 단순한 정치적 지지 이상이었다. 한마디로 나치주의를 기독교 신학으로 재해석한 것이다. 이에 맞서 바르트(K. Barth)와 니묄러(M. Niemöller)와 같은 신학자는 1934년 유명한 바르멘 선언(Barmen Declaration)을 발표하며 “그리스도 외 다른 권위를 신앙의 중심에 둘 수 없다”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이는 개신교의 소수파의 작은 목소리에 불과했다. 독일 개신교 교회 소속성직자와 신자 대다수는 나치에 협력하거나 침묵했다.


비오 12세는 역사적으로 ‘홀로코스트 동안 침묵한 교황’이라는 가장 강력한 비판에 직면해 있다. 실제로 그는 나치의 유대인 학살 정보를 1941년부터 충분히 보고받았지만, 공개적인 비난을 자제했다. 콘웰(John Cornwell)은 <히틀러의 교황>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비오 12세는 히틀러 정권을 비난함으로써 가톨릭의 외교적 영향력을 잃는 것을 두려워했다.”⁹ 물론 교황청 일부 연구자들은 “침묵은 가톨릭 신자들의 보복 처벌을 우려한 신중한 선택”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반론은 몇 가지 점에서 설득력이 약하다. 비오 12세는 유대인 학살이 한창 진행되던 1942년 크리스마스 메시지에서조차 유대인을 적시하지 않고 그저 “수많은 사람들”이라는 추상적 표현만 사용했다. 나치와의 외교관계가 교황청의 최우선 이해였으며, 이는 기록상 명확히 드러난다.


물론 일부 수도회와 성직자들은 유대인을 숨기거나 탈출을 돕기도 했다. 이는 역사적으로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교황청 차원의 조직적 계획, 명령에 따른 것이 아니라 일부 영웅적 개인의 행동이었다는 점이다. 일부 성직자와 신자의 양심적 행동이 제도 교회의 도덕적 실패를 상쇄할 수는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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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서 오래 살면서 종교와 여행과 문화 탐방에 관심을 기울인 결과 지식으로 농사를 짓게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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