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예배가 아니라 사랑의 실천을 강조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기독교 역사에서 ‘나태(acedia)’는 단순한 게으름이 아니다. 그것은 진리를 알면서도 진리를 향해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는 상태, 즉 “마음의 마비와 책임의 유기(遺棄)”였다. 중세 수도원에서 acedia는 “영혼을 잠식하는 가장 위험한 죄”로 경고되었으며(카시아누스, Institutes),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를 “선(善)에 대한 혐오”라고 정의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acedia는 21세기 교회에서 가장 광범위하게, 가장 은밀하게, 그리고 가장 문제적인 형태로 되살아났다.
오늘날 많은 교회는 여전히 풍요롭고 크고 화려하다. 예배와 찬양은 정교하고, 행사와 프로그램은 가득하다. 그러나 그 모든 활동의 화려함 뒤에서, 교회는 조용히 그러나 체계적으로 ‘영적 나태’라는 깊은 병증을 키워 왔다. 그 병은 제자의 길을 버리고, 신앙을 얕고 안전한 의례로 축소하며, 결국 교회를 ‘영적 소비주의(spiritual consumerism)’의 시장으로 전락시켰다. 교회는 변화를 외칠 때 누구보다도 목소리가 크다. 곧 회개의 필요성, 정의의 실천,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는 겸손과 희생을 강조한다. 그러나 정작 그 말을 실천으로 옮기는 데에는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말은 많되 행동은 적다. 강조는 많되 참여는 적다.
예배 참석, 십일조, 세례, 성찬은 필수적이고 영광스러운 의무로 받아들여지지만, 가난한 자와 함께 살기, 소수자·난민과 함께 서기, 손해를 감수하며 정의를 선택하기 같은 ‘예수 제자로서의 행동’은 불편하고 심지어 위험하고 교회의 질서 유지를 흔들 수 있는 것으로 취급된다. 그래서 교회는 본능적으로 안전하고, 질문받지 않고, 사회적 지위를 위협하지 않는 의례 중심형 신앙으로 계속 후퇴해 왔다. 대형 교회는 더욱 그렇다. 예배는 대규모의 연예인 행사처럼 공연화되고, 신앙은 정기 구독 서비스처럼 단순히 소비된다. 신앙의 목표는 “훈련된 제자”가 아니라 예배 현장에서 ‘감동받은 사람’, ‘위로받은 사람’, ‘만족한 사람’을 양산하는 것이 되어 버렸다. 이런 구조에서는 깊은 자기 성찰과 내적 변혁, 타자를 위한 희생 같은 제자도의 본질이 자연스럽게 설 자리를 잃는다. 기독교의 초대 기독교 교회 전통에서 ‘제자’(discipulus)는 문자 그대로 훈련된 사람을 의미했다. 예수의 제자들은 그 말씀을 듣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 삶을 모방하며, 그 가르침에 따라 위험을 감수하고, 타자를 위해 자신을 내어놓는 실천적 존재였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는 ‘훈련’되지 않은 사람들로 가득하다.
신앙인은 성경의 역사성, 교회 구조의 문제, 현대 사회의 고통을 신학적으로 탐구하는 대신 목회자의 요약된 설교나 단순한 영성 문구에 의존한다. 스스로 사고하는 능력이 약화되며 신앙은 반성 없는 체계가 된다. 신자들이 공부를 안 하는 것이다. 기껏 한다는 것이 성경 필사 정도다. 그러나 성경은 필사만 해서 이해할 수 있는 책이 아니다. 수천 년에 걸친 이스라엘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처한 그 당시 상황도 이해를 해야만 성경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공부를 깊이 하는 신자는 별로 없다. 그저 주일 예배에 참석하고 복을 받는 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그런 신자들은 예배에는 빠지지 않지만 부당한 노동, 정치적 부패, 사회적 차별 앞에서는 침묵한다. “영적”이라는 이름 아래, 세상 속에서의 책임을 교묘히 회피하며 교회 안에 안주하고 마는 것이다. 예수와 그를 따르던 초대 교회의 신자들은 신앙 때문에 체포되고, 재산을 잃고, 때로는 생명도 잃었다. 그러나 현대 교회는 그런 고난의 십자가를 상징만으로 소비한다. 희생 없는 신앙, 손해 없는 신앙, 불편함 없는 신앙이 어느 사이에 기독교 교회의 기본 구조가 되어 버렸다. 결국 신앙은 윤리적 힘을 잃고, 교회는 사회적 발언권을 상실해 왔다. 이러한 영적 나태는 단순히 개인 차원의 게으름이 아니라, 교회 구조 자체가 낳는 시스템적 병리 현상이다.
교회의 관료제도 안에서 가톨릭의 추기경, 주교, 사제, 부제로 이어지는 수직적 구조와 마찬가지로 개신교도 목사 장로 권사 집사로 이어지는 엄격한 수직적 제도가 존재한다. 이는 근본적으로 가부장제에서 온 것으로 상위 권위자는 명령만 하고 아랫사람들은 그 명령을 따르기만 한다. 질문과 충고는 결코 허용되지 않는다. 상위 권위자는 신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물론 참모가 있고 측근이 조언을 하는 구조가 있다. 그러나 최종 결정은 최고 권위자가 단독으로 내린다. 철저한 가부장적 구조다. 질문을 결코 허용하지 않는 권위적 분위기는 올바른 성찰을 억압하고 오로지 순응과 복종만을 요구한다. 그러한 순종을 강화하기 위해 교회는 미사와 예배를 신적 지위로 격상시켜 버리는 짓까지 서슴지 않았다. 예수는 단 한 번도 예배가 신성불가침이라고 주장한 적이 없다. 그저 유대교의 유월절 관습에 따라 행한 최후의 만찬 때 음식을 제자들과 나누는 예식을 거행하며 자기를 기억해 달라고 부탁한 것이 전부다. 그리고 제자들도 예수가 죽고 나서 모임을 가지면서 예수의 언행을 기억하는 기념식 정도로 예배를 진행했다. 엄격한 형식도 규율도 없었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 교회는 예배에 참석하는 조건을 까다롭게 만들어 이른바 '죄인'은 참석할 기회조차 박탈하는 만행을 저지르고 있다, 예수는 모든 '죄인'과도 함께 만찬을 나누었다. 예수에게 다가오는 이는 누구도 막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그 자리에는 '죄인'들도 환대를 받았다. 그런데 그런 예수를 교주로 모시는 기독교 교회가 오늘날에 와서는 이혼한 이들이나 동성애자와 같은 '죄인'은 얼씬도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물론 몰래 예배에 참석하고 몰래 영성체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행위를 '죄'로 단죄하여 비록 이혼한 경험이 있고 동성해자이지만 예수를 사랑하고 믿는 이들에개 죄책감을 느끼게 만드는 죄를 교회가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미사와 예배에 참석하지 않는 것이 마치 대역죄를 저지르는 일인 것처럼 단죄한다. 그러나 그 속내는 뻔하지 않은가? 미사나 예배에 참석하지 않으면 헌금을 안 내게 되고 헌금이 안 걷히면 교회 제정에 타격을 입으니 그러는 것이다. 그러나 차마 돈 이야기를 할 수 없으니 미사나 예배가 마치 신이 명령한 숭고한 예식이나 되는 듯이 호들갑을 떨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예수는 예배가 아니라 사랑의 실천을 강조했을 뿐이다. 성경 어디에도 예배에 참석하지 않으면 죄인이 된다는 말을 예수가 한 적이 없다. 그런데도 미사에 참석하지 않은 죄를 저지른 신자는 고해성사를 하고 용서를 받지 않으면 미사에 합법적으로 참여하지 못하는 죄인으로 전락하게 된다. 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예수가 그런 교회의 행태를 보면 뭐라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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