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우리는 예수를 다시 물어야 하는가
3장. 질문하는 신앙은 왜 위험해 보이는가
많은 신자들은 질문을 품는 순간부터 이미 조심스러워진다. 질문의 내용이 급진적이어서가 아니다. 질문을 던지는 행위 자체가 교회 안에서는 늘 미묘한 긴장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이건 왜 이렇게 해석해야 하나요?” “이 가르침이 예수의 말과 정말 일치하나요?” “다른 선택지는 없나요?” 같은 질문은 논쟁을 일으키지 않아도, 분위기를 바꾸어 놓는다. 회의실의 공기가 조금 굳고, 누군가는 의미심장한 침묵으로 반응하며, 누군가는 “그건 나중에 이야기하자”거나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자”고 말한다. 질문은 종종 대답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대신 관리의 대상이 된다.
이것은 질문이 본질적으로 파괴적이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질문은 언제나 무언가를 살려내려는 시도에 가깝다. 이해하려는 질문, 연결하려는 질문, 삶과 신앙을 다시 이어보려는 질문 말이다. 그런데도 질문하는 신앙이 위험해 보이게 된 이유는, 질문이 교회의 어떤 취약한 지점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질문은 구조를 드러내고, 구조는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1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교회를 떠난 자리에는 질문이 남는다. 그 질문은 신앙을 포기했기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앙을 계속 붙들고 싶어서 생긴 것이다. 2장에서 보았듯이, 예수 없이 교회만 남아 있을 때 신앙은 공허해지고, 그 공허함을 가장 먼저 감지하는 사람들이 바로 오래 신앙생활을 해온 이들이다. 이 두 지점이 만나면 자연스럽게 하나의 질문이 떠오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 질문을 마음껏 할 수 없는가?”
교회가 질문을 불편해하는 이유는 단순하지 않다. 그것은 질문이 신앙을 무너뜨릴지 보아서라기보다, 질문이 신앙을 개인의 양심과 책임으로 되돌려 놓기 때문이다. 질문은 ‘믿어야 할 것’을 ‘고민해야 할 것’으로 바꾼다. ‘따라야 할 지침’을 ‘선택해야 할 방향’으로 바꾼다. 이 전환은 신앙을 더 어렵게 만드는 동시에, 더 진지하게 만든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제도는 불안해진다.
모든 제도는 안정성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동일한 언어, 동일한 해석, 동일한 반응이 반복될수록 제도는 유지되기 쉽다. 그런데 질문은 이 반복을 멈추게 만든다. 그리고 질문이 많아질수록 한 교회의 ‘신앙’은 균질해지지 않고, 각자의 삶의 자리로 흩어진다. 그러면 교회의 통제는 어려워지고, 관리의 언어는 힘을 잃는다. 그래서 질문은 종종 ‘믿음이 약해진 신호’, ‘영적으로 미성숙한 상태’, ‘교만의 표현’처럼 해석된다. 질문의 내용보다 질문하는 태도가 문제로 지적되는 이유다.
많은 신자들이 실제로 겪는 장면은 이렇다. 신앙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수록 말수가 줄어든다. 질문을 던질수록, 더 설명하기 어려운 사람이 된다. 어느 순간부터는 “괜히 말 꺼냈다”는 후회가 먼저 들고, 결국 질문은 마음속에서만 맴돈다. 교회 안에서는 평온을 유지하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더 깊은 혼란이 남는다. 질문을 억누르는 신앙은 겉으로는 안정적이지만, 내적으로는 점점 분열된다.
그러나 복음서를 읽어보면, 예수의 주변에는 오히려 언제나 질문이 있었다. 제자들은 끊임없이 묻는다. “이 비유의 뜻은 무엇입니까?” “왜 우리는 할 수 없었습니까?” “주여, 그때는 누가 큽니까?” 예수는 질문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때로는 즉각 대답하지 않았고, 때로는 더 불편한 질문으로 되돌려주었다. 중요한 것은 질문 자체가 신앙의 실패로 취급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히려 질문은 예수와의 관계 안으로 들어오는 통로였다.
그런데 언제부터 질문은 위험해졌을까. 질문을 ‘믿음의 과정’이 아니라 ‘믿음의 결함’으로 간주하기 시작한 순간, 신앙은 점점 설명의 체계가 되었고, 삶과 분리되기 시작했다. 질문이 사라진 자리에는 확신이 남았지만, 그 확신은 종종 삶을 바꾸지 않았다. 질문이 허용되지 않는 신앙은 빠르게 굳어지고, 굳어진 신앙은 더 이상 성장하지 않는다.
질문하는 신앙이 위험해 보이는 또 하나의 이유는, 질문이 결국 책임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질문을 한다는 것은 누군가 대신 답해주기를 기다리는 태도가 아니다. 질문은 스스로 선택해야 하는 자리로 사람을 데려간다. 이 길을 갈 것인지, 이 해석을 받아들일 것인지, 이 방식으로 살 것인지를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많은 신자가 이 지점에서 불안을 느낀다. 지금까지는 교회가 정해준 답을 따라왔는데, 이제는 스스로 판단해야 할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불안은 타락의 신호가 아니라, 성숙의 문턱일 수 있다.
이 장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분명하다. 질문은 신앙을 파괴하지 않는다. 질문을 억압하는 방식이 신앙을 약화시킨다. 질문을 덮어두고 유지되는 평온은 오래가지 않는다. 오히려 질문을 견딜 수 있는 신앙만이, 변화하는 삶의 자리에서도 살아남는다. 질문은 예수를 떠나게 만드는 힘이 아니라, 예수에게 더 가까이 가게 만드는 긴장일 수 있다.
그래서 이 책은 질문을 잠재우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질문을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으려 한다. 교회 질서를 위협하는 위험 요소가 아니라, 예수를 따르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신앙의 언어로 말이다. 질문은 불순종의 표시가 아니라, 더 이상 자동적으로 믿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그리고 그 선언이야말로, 탈교회 시대에 예수를 다시 따르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할 자리일지도 모른다.
�〈이 장을 읽고 오늘 할 수 있는 한 가지〉
오늘 하루,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말하지 않고 넘겼던 신앙 질문 하나를 적어보자. 답을 찾지 않아도 된다. 그 질문을 없애려 하지 말고, 예수 앞에 그대로 두어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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