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우리는 예수를 다시 물어야 하는가
2장. 예수 없이 교회만 남았을 때 생기는 일
많은 사람들은 아직 교회를 떠나지 않았다. 예배당에 앉아 있고, 주보를 받고, 설교를 듣고, 때로는 봉사도 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안쪽에서는 이미 어떤 균열이 시작되었다. 예수의 이름은 여전히 많이 들리는데, 이상하게도 예수의 흔적은 잘 보이지 않는다는 느낌이다. 말은 넘치는데, 삶을 건드리는 말은 줄어들었다는 감각이다.
교회는 여전히 예수를 말한다. 예배의 시작과 끝, 찬양의 가사, 설교의 결론은 언제나 예수로 수렴된다. 그러나 그 예수는 점점 추상적인 존재가 된다. 설명되고, 정리되고, 관리 가능한 개념이 된다. 예수의 말과 행동이 지녔던 불편함과 위험성은 줄어들고, 대신 안정과 위로, 질서와 순응을 제공하는 상징으로 남는다. 그렇게 예수는 삶을 뒤흔드는 인물이라기보다, 제도를 유지하는 이름이 된다.
이 과정에서 신앙은 점점 제도 중심으로 이동한다. 무엇을 믿느냐보다 어디에 속해 있느냐가 중요해지고, 어떻게 살고 있느냐보다 얼마나 충실히 참여하고 있느냐가 기준이 된다. 신앙은 삶의 방향이 아니라, 소속의 증명이 된다. 그 결과 예수는 더 이상 따라야 할 인물이 아니라, 이미 도달한 결론처럼 취급된다. 질문은 필요 없고, 순응만 요구된다.
아직 교회 안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이 지점에서 설명하기 어려운 피로를 느낀다. 신앙이 힘들어서가 아니라, 신앙이 너무 매끄럽게 굴러가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정리되어 있고, 모든 질문에는 준비된 답이 있으며, 불편한 침묵은 허용되지 않는다. 예배는 익숙하고 안전하지만, 끝나고 나면 삶은 거의 달라지지 않는다. 예수의 말이 오늘 무엇을 바꾸어야 하는지는 명확하지 않고, 대신 ‘잘 믿고 있다’는 감각만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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