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는 사실 필요 없었다
오늘날 십자가는 기독교의 가장 보편적인 상징물이 되었다. 그런데 정작 십자가가 기독교의 상징이 된 것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의 종교 활동을 공인한 이후부터다. 초기 기독교에서는 유대교와 마찬가지로 신과 관련된 형상을 꺼렸고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하여 십자가는 물론 특정한 형상을 만들거나 사용하지 않았다.
현재 십자가는 교파마다 다양한 형태로 사용된다. 그리고 종교와 무관하게 일종의 부적이나 장식품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원래 십자가는 기독교가 수립되기 이전부터 고대 바빌로니아 지방에서 일종의 부적으로 사용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미 이집트, 그리스, 인도, 그리고 남미에서도 십자가 문양이 오래전부터 사용되어 왔다. 그래서 십자가 형태가 기독교의 전유물이라고 할 수는 없다.
기독교 십자가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는 타우 십자가(Taukreuz)와 스와스티카(swastika)이다. 타우 십자가는 그리스어 알파벳의 19번째 글자인 타우(T)의 형상을 빗대어 그리 불리며 기독교 전통에서는 흔히 안토니우스 성인(Antonius der Große, 251-356)의 수도회와 연관되어 안토니우스 십자가(Antoniuskreuz)로 불리게 되었다.
나중에는 프란치스코 성인(Franciscus de Assisio, 1181/82~1226)의 수도회에서도 이 형태의 십자가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원래 이 타우 십자가는 이미 바빌로니아와 이집트에서 즐겨 사용되던 것이었다. 그것이 기독교 문화에 수용된 것이다. 물론 전혀 다른 의미를 부여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이보다 더 오래된 것은 스와스티카이다. 한국에서는 흔히 불교의 상징으로 잘 알려진 스와스티카는 유라시아 전역에서 널리 사용된 것이다. 특히 인도에서는 힌두교, 불교, 자이나교가 공통으로 사용하였던 것이었다. 그리고 유럽에서도 사용되었다.
그러나 히틀러가 이를 자신의 나치당의 표징으로 사용하면서 매우 부정적인 의미를 담게 되었다. 사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이는 풍요와 행운의 상징이었었다. 그래서 원래 그런 의미에서 히틀러도 이를 사용한 것이었다. 그래서 이 문양이 히틀러의 나치 정권을 연상시키고 더 나아가 유대인 학살을 연상시킨다는 의미에서 독일어권에서는 거의 터부시 되고 있지만 이는 그 원래의 의미와는 전혀 무관한 일이다. 이에 관한 이야기를 다음 기회에 더 다룰 필요는 있어 보인다.
최근 종교학의 발달로 히틀러의 십자가가 타 종교의 신앙적 의미를 지닌 것이라는 사실이 잘 알려지게 되었지만, 여전히 히틀러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강력한 서양 세계에서 이 스와스티카는 아직도 그 온전한 의미가 충분히 받아들여지고 있지는 못하다.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사실 이 스와스티카는 워낙 다양한 형태로 활용되어 불교의 만(卍)의 형태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공통된 점은 모두 일종의 소용돌이 모양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만 그 회전 방향이 오른쪽이든 왼쪽이든 큰 차이는 없다. 브라만교에서 사용한 것이 기원이라는 설이 가장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기독교의 십자가를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원래 예수가 당한 십자가형은 당시 로마제국에서 흔한 사형 방법이었다. 그리고 반드시 지금 알려진 것과 같은 십자가를 세우는 방식만 있지는 않았다. 중세의 철학자 립시우스(Justus Lipsius, 1547-1606)는 그의 저서 <십자가에 관하여>(De Cruce, 1594)에서 로마제국 시대에 십자가형은 단순형(crux simplex)과 복합형(crux compacta), 두 가지가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단순형은 말 그대로 기둥을 하나 세워 거기에 죄인을 매달아 죽이는 방법이고 복합형은 두 개 이상의 기둥을 사용하는 방법이다. 그보다 훨씬 이전의 학자인 세네카(Lucius Annaeus Seneca, BC4-AD65)가 남긴 문서에는 복합형에 관한 설명만 들어 있다.
사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십자가형에 대한 설명은 2세기부터 본격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유일한 국교로 지정되면서 십자가도 고정된 상징으로 정착하게 된다.
성경에 나오는 십자가를 지칭하는 단어는 ‘스타우로스’(σταυρός)와 ‘질론’(ξύλον)이다. 그리고 이 단어는 고대 그리스어로 단순히 땅에 박은 기둥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 단어에 대한 해석을 놓고 학자들마다 의견이 분분하였다.
흔히 알려진 십자가 모양이 아니라 단순히 큰 기둥을 박아놓고 죄인을 매달아 사형시키는 것이 더 효율적인데 굳이 기둥에 나무를 가로로 박아서 사형을 시키는 수고를 들일 필요가 없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래서 바인(William Edwy Vine, 1873~1949)과 같은 성경학자는 그의 저서 <신약 어휘 설명집> (Expository Dictionary of New Testament Words)에서 고대 그리스어로 스타우로스가 오늘날 알려진 십자가를 지칭할 수 없는 것으로 3세기 교회에서 이교도들이 사용하던 타우 십자가를 수용하여 기독교의 개념으로 정착시킨 것이라는 주장을 하기도 하였다.
실제로 오늘날 예수가 매달린 십자가의 모습은 같은 크기의 두 개의 기둥을 같은 크기로 교차시킨 것이 아니라 거의 알파벳 T의 모양에 가까운 형태를 하고 있다. 사실 성경에는 십자가의 모양이나 그 구성에 대한 설명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다만 성경의 그리스어로 된 명사 스타우로스(σταυρός)를 라틴어로 크룩스(crux)로 번역하면서 자연스럽게 십자가로 인식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실 라틴어 크룩스도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형태의 십자가가 아니라 원래 단순한 기둥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그러나 이런 논리에 반대하는 이들도 많다. 비록 고대 그리스의 어휘에서 스타우로스는 원래 기둥만을 의미하지만, 기원전 1세기와 그 이후의 어법에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십자가를 지칭하는 것이기도 하였다는 주장이다.
성경에는 분명히 예수가 사형장에 끌려가면서 자신의 십자가를 등에 짊어지고 간다는 설명이 나온다. 그런데 많은 학자들은 이 십자가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온전한 형태의 십자가가 아니라 사형장에 이미 박혀 있는 기둥에 가로로 매달 또 다른 기둥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그러나 또 다른 많은 이들은 예수가 십자가 모양으로 만들어진 사형 도구를 끌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갔다고 확신하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언어학적인 연구와 성경 연구를 통해서도 십자가의 모양을 단언할 방법은 전혀 없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십자가가 실제로 예수가 못 박힌 형태라는 증거도 없지만, 아니라는 증거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실 중요한 것은 어떤 모양의 십자가에서 예수가 사형당했는지가 아니다.
이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왜 결국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되었으며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종교적, 문화적, 사회적 의미는 무엇인가이다. 십자가가 아니라 기둥에 못 박혀 사형당했다고 해서 예수의 존재 의미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십자가인가 기둥인가를 둘러싼 논쟁은 그래서 무의미한 지엽말단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중요한 것은 형상이 아니라 그 뒤에 있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지엽말단적인 것을 둘러싼 논쟁은 예수의 본모습을 파악하는 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다만 19세기까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모습은 거의 일관되게 십자가였고 그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중반 이후부터 성경 해석학이 발달하면서부터이다. 그러니 이 논쟁은 아직 열려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문제는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에 대한 해석이다. 신학적으로 십자가는 예수가 인간의 죄를 대신 씻어주고 신과 인간을 화해시키기 위하여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치는 데 사용한 도구로 이해되고 있다. 곧 신의 인간에 대한 무한한 사랑의 상징인 셈이다. 그리고 이 십자가의 죽음은 부활을 전제로 한 복음 선포의 자리이기도 하다. 복음, 곧 기쁜 소식은 예수가 인간을 대신하여 인간의 죄를 용서받은 의미이다. 그래서 인간은 영생이 보장되었던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이후 다시 영원한 생명을 얻을 기회가 마련되었다.
그런데 이 십자가의 희생으로 인간이 영생을 누리게 된 것은 기쁜 소식인데, 이에 대한 해석이 교파마다 차이를 두게 되었다. 가톨릭에서는 예수의 희생으로 원죄를 용서받았지만 이른바 잠벌이 남아 있기에 선행과 고해성사로 계속 죄의 용서를 빌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개신교에서는 예수가 십자가에서 스스로를 제물로 바쳐 과거의 원죄와 현재의 죄와 앞으로 지을 죄도 모두 용서하는 신과 인간의 완전한 화해를 완성한 것이기에 더 이상의 고해성사는 필요 없다고 주장한다. 동방정교에서도 십자가의 희생으로 예수는 악을 이긴 승리자가 된 것이기에 인간은 더 이상 죄와 무관한 존재가 되어 예수에 대한 믿음으로 신과 함께 기쁨을 나눌 수 있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은 것이 아니라는 의견도 있다. 대표적인 것이 이슬람교이다. 이슬람교에서는 예수가 실제로 십자가에서 죽은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코란에 그런 내용이 직접 나오기도 한다. 예수가 죽임을 당하거나 십자가에 매달린 것이 아니라 그렇게 보일 뿐이라고 한다(코란, 수라 4, 아야 157/158 참조). 영지주의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사실 악마가 예수를 죽이려 했지만, 그가 죽인 것은 자신의 족속이고 진짜 예수는 하늘로 승천하였다고 한다. 악마는 결코 완전한 지혜의 존재인 예수의 지혜를 따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다양한 주장들의 진실 여부는 사실 큰 의미가 없다. 이들에게는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은 역사적 사실보다는 그렇게 죽었다고 믿는 신자들의 믿음이 종교에서는 더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십자가 자체의 역사적 진실과 무관하게 오늘날 많은 사람이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믿기에 십자가에 의미가 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예수가 죽지 않았다는 주장은 무의미한 논쟁을 일으킬 뿐이다.
그럼에도 예수의 십자가 죽음의 역사적 사실에 관한 논쟁은 지속되었다. 그러나 성경학자들의 성경 분석으로 적어도 예수의 제자들이 자신의 스승이 당시 범죄자들의 사형 방식인 십자가 죽음을 숨길 수 없을 사정이 있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사실, 문제가 되는 것은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상황이다.
교회 설립 초기에, 특히 비잔틴 제국의 동방정교에서는 예수의 십자가 죽음에서 악을 이긴 승리를 보았다.
그러나 중세로 넘어오면서 서양에서는 십자가에서 고통을 받는 예수를 부각하며 그 고통을 일으킨 인간의 원죄를 강조하는 분위기가 점차 형성되었다. 그래서 예수가 살아 있을 때와 먼 시대에 사는 이들에게도 예수의 고통에 대한 죄를 물었다. 이미 그 죄는 예수의 희생으로 다 용서가 되었음에도 다시 죄의식으로 몰아간 것이다. 예수가 십자가의 고난을 견디고 부활함으로써 인간을 죄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한 것임에도 여전히 인간의 죄를 묻는 모순이 발생한 셈이다. 제도 종교가 늘 해 오던 종교의 권력화의 산물이다. 죄의식으로, 그것도 신을 죽였다는 죄의식으로 인간을 통제하는 것만큼 강력한 도구는 없기 때문이다.
결국 이미 속죄받은 이후에도 되풀이하여 묻는 인간의 죄는 결국 근원적인 죄의식을 야기하고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를 볼 때마다 죄에서 해방된 기쁨보다는 예수에게 고통을 주었다는 죄송스러운 마음이 더 커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고통받는 예수의 모습은 성경에 묘사된 십자가 밑에서 슬퍼하는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의 이야기로 더욱 극대화되었다. 그런데 예수는 단 한 번도 마리아를 어머니로 부른 적이 없었다. 내 십자가는 어머니도 대신 짊어질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들의 고통을 나누는 어머니의 모습을 통해 나머지 신자들도 그 고통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야기된 셈이다.
그런데 교회의 교리에 따르면 그렇게 십자가에서 고통스럽게 죽어간 예수가 부활과 승천을 거쳐 하늘에 올라 신의 오른편에 앉으면서 신과 본질적으로 동질인 존재가 되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위격으로는 신과 부자 관계를 맺으며 성령을 인간 세계에 보내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본질은 같으나 위격으로 다른 관계가 수립된 것이다. 과연 그런가? 한번 자세히 살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