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은 아버지와 다름이 없다
사실 기독교 이전에 이미 고대 그리스에서는 덕행을 쌓은 사람은 신으로 부활한다는 사상이 널리 퍼져 있었다. 또한 고대 로마제국에서는 황제가 사망하면 천국에 들어가고 그를 대신한 신성한 존재가 그의 영혼을 담은 존재로 황위를 계승한다고 믿었다. 사실 이 두 문명 이전에 이집트에서도 지상의 통치자인 파라오는 오시리스 신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죽은 영웅을 신격화하는 데에는 고대 그리스를 따를 문명이 없었다. 물론 이런 신격화가 가능한 것은 지배층이 백성을 통치하는 데 좋은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 못지않게 백성들도 신성한 능력을 지닌 지도자가 자기들을 편하게 살도록 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신과 다름없는 지도자가 나라를 다스린다면 그 백성은 바로 신의 자녀들 아니겠는가?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지도자의 측근들은 왕이나 황제가 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었기에 그런 신성화에 쉽게 동의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로마제국이 부패해 가면서 황제만이 아니라 황제의 죽은 첩까지 신격화하는 일도 벌어지면서 이러한 신선놀음은 종말을 고하게 된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예수는 삼위일체론의 확립으로 신과 동격의 존재로 격상한다. 다만 예수는 아버지도 아니고 성령도 아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아버지도 신이고 예수도 신이고 성령도 신이다. 다시 말해서 세 위격(persona)이 동일한 본질(ὁμοούσιος)을 지니고 있다는 교리이다. 문외한이 들으면 말장난이나 다름없어 보일 정도의 이 이론은 기독교 신앙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 예수는 아버지가 될 수는 없다. 아들이니 그렇다. 그러나 신이라는 본질에서 아버지와 다를 것이 없다. 이를 인간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유추해 보면 이해가 쉽다. 아버지와 아들은 독립된 개체이다. 그러나 유전적으로 볼 때 아버지와 아들은 적어도 50%의 DNA를 공유하고 있다. 다만 예수는 아버지와 완전히 100% 일치하는 DNA를 지닌 존재이다. 문제는 이러한 삼위일체론이 성경 어디에도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삼위일체론은 기독교의 고유한 이론도 아니다.
유대교보다 훨씬 앞선 고대 이집트의 종교에서 삼위일체 정신은 매우 강력하게 드러나 있다. 아버지 오시리스, 어머니 이시스, 아들 호루스가 하나로 합치된 삼위일체적 신격을 이룬다. 테베스 지역에서는 아문, 문트, 콘수가 삼위일체의 신이었다. 멤피스 지역에서는 아버지 프타, 딸 세크메트, 아들 네페르템이, 엘레판틴 지역에서는 크눔, 사테트, 아누케트가 나일강의 본질을 나타내는 세 신격이었다. 그리고 고대 이집트의 태양신인 라는 아침에는 케프리, 낮에는 레 호라크티, 저녁에는 아툼이 되었으나 역시 삼위일체를 이루는 신격이었다.
이러한 고대 이집트의 삼위일체적 신관은 프톨레메이우스 1세가 세운 헬레니즘 시대의 왕국에서도 이어졌다. 이시스와 세라피스 그리고 하르포크라테스가 삼위일체의 신격이었다. 왕국 초기 한때에는 세라피스, 이시스, 아폴로가 삼위일체의 신격이 되기도 했다.
이미 고대 그리스의 올림포스 신화에서는 아버지 제우스, 어머니 아테나, 아들 아폴로가 삼위일체를 이루는 신으로 숭배되었다. 마찬가지로 델로스 지역의 신화에서는 어머니 레토, 딸 아르테미스, 아들 아폴로가 삼위일체의 신으로 숭배되었다. 고대 아테네에서 북서부로 18km 떨어진 엘레프시나 지역에서는 어머니 데메테르, 딸 페르세포네, 양자 트립톨레무스가 삼위일체의 신격으로 존중받았다.
고대 로마에서도 그리스의 영향을 받아 아버지 주피터, 어머니 주노, 딸 미네르바가 삼위일체를 이루는 신격으로 숭배되었다. 기원전 500년경에는 평민들의 신앙에서 아버지 주피터, 아들 마스와 퀴리누스, 후기에 가서는 아버지 주피터, 어머니 주노, 딸 미네르바가 삼위일체의 신격을 이루었다.
아예 중동이나 유럽과 무관한 인도에서도 삼위일체적 신격은 자주 등장하는 모티브다. 힌두교에서는 창조주 브라마와 세상을 통치하는 비슈누 그리고 파괴의 신 시바가 삼위일체를 이룬다. 이 세 신적 존재는 우주의 탄생과 유지와 파괴를 지배하는 본질적으로 단일하지만 세 가지 형태로 나타나는 ‘트리무르티’(त्रिमूर्ति, Trimūrti)가 된다. 불교도 고유의 삼위일체론을 가지고 있다. 바로 부처가 법신(Dharma-kāya), 보신(Saṃbhoga-kāya), 응신/화신(Nirmāṇa-kāya)으로 이루어진 지닌 트리카야(त्रिकाय,trikāya)의 존재라는 교리이다.
이처럼 기독교의 삼위일체는 기독교의 고유한 사상이라기보다는 이집트와 팔레스타인뿐 아니라 고대 그리스·로마 지역, 더 나아가 인도와 아시아 지역에 흔히 유행한 신념이었다. 심지어 암살당한 율리우스 시저, 그를 이어 최초의 로마제국의 제1대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된 옥타비우스, 그리고 모든 인간에게 존재하는 수호천사를 각각 율리우스 신(Divus Iulius), 성자(Divi filius), 아우구스투스의 수호신(Genius Augusti)으로 칭하여 역시 삼위일체적 숭배의 대상으로 삼았다.
특히 예수가 탄생한 시절에 로마제국의 황제였던 아우구스투스로 불린 옥타비우스가 통치하던 시절에는 과거에 암살된 율리우스 시저가 성부(Holy Father), 황제 자신이 성자(Holy Son), 그리고 자신의 수호신이 성령(Holy Spirit)으로 불렸다. 바로 이 틀을 그대로 기독교가 가져와서 기독교의 삼위일체론을 만들어 낸 것으로 볼 수밖에 없는 정황이 보인다. 다만 지독히 가부장적 종교인 유대교에 뿌리를 둔 기독교의 정체성에서 여성을 삼위일체에 개입하는 것은 용납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남자인 성부, 남자인 성자, 또한 남자일 수밖에 없는 성령을 규정해 버렸다. 이러한 남성중심주의는 오늘날 기독교에서도 여전히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 다만 페미니즘이 확산되는 21세기에 들어와서 기독교 신학은 성부의 성별에 대하여 애매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렇게 로마제국에 관행적으로 존재한 전통적인 삼위일체적 신관을 기독교에 적용하는 것이 기독교를 선교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은 자명한 일이다. 이는 마치 마리아 숭배를 이미 소아시아에서 널리 퍼져 있던 시빌레 여신 숭배에 차용한 것과 동일한 프레임이다. 바울이 초기 기독교 공동체를 수립하던 지역인 소아시아에서는 풍요의 여신인 시빌레의 인기가 굉장하였다. 그들에게 성모 마리아가 바로 풍요를 가져다주는 신적 존재라고 설명하는 데 이보다 좋은 도구는 없었다. 이는 마치 한국에 처음 기독교 선교를 할 때 기독교의 신을 이미 존재하는 개념인 천주나 하나님 또는 하느님으로 부른 것과 같은 맥락이다.
사실 성경에 나온 예수의 언행을 보면 굳이 신격화를 하지 않아도 충분히 존경받을 만한 인물이다. 그러나 종교의 특성상 예수의 신격화는 필수적이었다. 문제는 그 신격화를 위한 교리의 수립에 근간이 되는 성경의 내용이 예수를 신의 반열에 올리기에는 매우 부족하다는 사실이다. 보통 신성한 존재의 탄생 설화는 기독교만이 아니라 모든 종교, 심지어 정치적 지도자에 관련되어 나온다. 그리고 그 설화는 문자 그대로 설화이기에 신자들이 후대에 만들어 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수가 맺은 신과의 관계도 그런 유대교와 중동 지방의 종교사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해 볼 수 있는 일이다.
신과 예수와 성령이 3개의 위격으로 구분되지만 본질적으로 동일하게 존재한다는 삼위일체론은 교회 안에서도 매우 오랜 기간에 걸쳐 ‘성숙한’ 이론이다.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트리니타스’(trinitas), 곧 삼위일체라는 용어 자체도 테르툴리아누스(Quintus Septimius Florens Tertullianus, 155~240)가 최초로 만든 용어이다. 용어를 만든 만큼 삼위일체론은 기독교가 제도적인 종교로 발전한 다음에 예수의 신성에 관한 교리를 확립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이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삼위일체론은 기독교 안에서 벌어진 이단 논쟁에서 중요한 도구로 사용되었다.
교리의 근거는 늘 성경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기에 초대교회 학자들은 성경에서 삼위일체의 근거를 수집하는 데 큰 노력을 기울였다. 예수의 신성에 가장 심혈을 기울인 것은 당연히 <요한복음>이다.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그분께서는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요한 1,1-2.14)
여기에서 말씀은 당연히 예수이고 예수는 신으로서 태초부터 신과 함께 존재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말씀이 신의 독생자로 세상에 태어나 사람들 사이에서 살았다.
성경 그리스어 본으로는 다음과 같다.
Ἐν ἀρχῇ ἦν ὁ λόγος, καὶ ὁ λόγος ἦν πρὸς τὸν θεόν, καὶ θεὸς ἦν ὁ λόγος. οὗτος ἦν ἐν ἀρχῇ πρὸς τὸν θεόν.(요한 1,1-2)
Καὶ ὁ λόγος σὰρξ ἐγένετο καὶ ἐσκήνωσεν ἐν ἡμῖν, καὶ ἐθεασάμεθα τὴν δόξαν αὐτοῦ, δόξαν ὡς μονογενοῦς παρὰ πατρός, πλήρης χάριτος καὶ ἀληθείας.(요한 1,14)
‘로고스’(λόγος)의 뜻은 원래 ‘말’이지만 여기에서는 신이 한 말이라 진리가 된다. 창세기에서도 신은 오로지 말로 세상을 창조하였다. 말을 하면 그것이 바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신의 언어는 진리가 된다. 신의 말에는 거짓이 없기 때문이다. 의도적으로 창세기의 시작 문구와 같은 형태를 갖춘 이유는 예수가 바로 창조주와 같은 존재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요한복음사가는 이렇게 시작한 <요한복음>의 말미에서도 토마스의 입을 빌려 예수가 곧 신이라고 단언한다.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28)
그리스어로는 다음과 같다.
ἀπεκρίθη Θωμᾶς καὶ εἶπεν αὐτῷ, Ὁ κύριός μου καὶ ὁ θεός μου
퀴리오스(κύριός)와 데오스(θεός)를 병렬시켜서 예수의 본질이 신이라는 것을 확언한 이 문장은 <요한복음>에만 나온다.
예수의 으뜸 사도인 베드로조차 이런 말을 한 적이 없다.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마태 16,15-16)
그리스어 원문은 한글 번역과 약간 다르다.
ἀποκριθεὶς δὲ Σίμων Πέτρος εἶπεν, Σὺ εἶ ὁ Χριστὸς ὁ υἱὸς τοῦ θεοῦ τοῦ ζῶντος
직역하면 “당신은 살아 있는 신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이다.
‘살아 있는 신의 아드님’이라는 표현은 신약에서는 <마태복음>에만 나온다. 살아 있는 신은 구약에 등장하는 표현이다. 유대인들이 야훼를 살아 있는 신이라고 말하는 것은 다른 신들은 모두 죽어 있는 우상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여기에 더해 유대-기독교의 신은 인간에게 생명을, 그것도 영원한 생명을 주는 존재라는 의미가 포함된다. 당연히 이는 유대교와 기독교와 같은 배타적인 유일신교에서 내세우는 신관이다. 다른 모든 종교의 신이나 신적 존재의 가치나 실제를 부인하는 신앙이다. 더 나아가 <구약성경>에서 야훼는 유대인들을 위하여 다른 종족을 몰아내는 전투적인 신이다.
여호수아가 말을 계속하였다. “이제 일어날 이 일로써, 살아 계신 하느님께서 너희 가운데에 계시면서, 가나안족, 히타이트족, 히위족, 프리즈족, 기르가스족, 아모리족, 여부스족을 너희 앞에서 반드시 쫓아내시리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여호 3,10)
그런데 베드로는 예수가 그런 신인 야훼 자체라는 고백은 하지 않는다. 다만 예수가 메시아, 곧 신이 기름을 부어 지도자로 만든 자기 아들이라고 정의한다. 그 당시 유대인으로서 차마 예수가 신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런데 예수를 본 적이 없는 이가 저술한 <요한복음>에서는 예수가 신이고 신이 예수라는 논리를 전개한다. 이것이 삼위일체론의 기초가 되는 그리스도론(Christologie)의 시작이다. 물론 본격적인 그리스도론은 바울이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저술 시기로 보면 바울의 서간들이 복음서에 앞서는 것이기에 그 중요성이 더해진다. 특히 공관복음서에는 그리스도론으로 추론할 만한 내용이 명확히 나오지 않기에 예수의 신격화에서 바울이 차지하는 위치는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바울조차도 예수의 본질에 관한 명확한 학문적 정의를 내리지는 않았다. 그래서 후대의 신학자들이 <신약성경>을 바탕으로 그들이 신과 동등한 본질을 가진 것으로 믿는 예수의 본질에 대한 이론을 수립할 수밖에 없었다. 바울은 예수의 본질에 대하여 두 가지 추측이 가능한 주장을 한다. 먼저 <필리피서>에 다음과 같은 중요한 단서가 나온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필리 2,5-11)
여기에서 바울은 예수가 신의 모습을 지녔지만, 신과 같지는 않은 존재라고 정의한다. 그런데 <창세기>에서 신은 아담을 신의 모습으로 창조하였다. 그런데 그렇게 창조된 아담은 신과 맞먹는 존재가 되었다.
주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자, 사람이 선과 악을 알아 우리 가운데 하나처럼 되었으니, 이제 그가 손을 내밀어 생명나무 열매까지 따 먹고 영원히 살게 되어서는 안 되지.” 그래서 주 하느님께서는 그를 에덴동산에서 내치시어, 그가 생겨 나온 흙을 일구게 하셨다.(창세 3,22-23)
신은 인간이 선악을 구별할 줄 알게 되어 신과 같은 존재가 된 것이 당황스러웠다. 그래서 그런 지혜를 가진 인간이 신과 유일하게 다른 점인 영생마저 누리게 될 것이 두려워 에덴동산에서 내쳤다. 인간이 신과 맞먹으려 하는 것을 못 견딘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아담과 달리 신과 같은 존재가 되고자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인간 가운데 가장 낮은 곳을 찾아 세상에 왔다. 그리고 세상에 살면서도 가장 낮은 이들과 함께하면서 그들과 형제자매처럼 지낸 것이다. 바울은 이러한 예수의 본질적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에서 종의 모습으로 세상에 온 신의 논리가 추론된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에 대하여 또 다른 주장도 한다.
그분께서는 육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셨고, 거룩한 영으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시어, 힘을 지니신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확인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로마 1,3-4)
필리피인에게 보내는 서간을 쓴 사람과 동일한 인물이 쓴 편지에 나오는 내용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의 주장이다.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예수는 인간으로 태어났으니 부활하고 나서 신이 자기 아들로 확인했다는 말이다. 그래서 비로소 신과 같은 주님이 되었다는 해석이 나온다. 그렇다면 예수는 처음부터 신이 강생한 존재가 아니다. 물론 정통 신학자들은 여기에서 예수는 처음부터 신의 아들이었기에 신적 힘이 있는 존재라고 해석한다. 논란을 없애기 위해 그리스어 원문을 보자.
περὶ τοῦ υἱοῦ αὐτοῦ τοῦ γενομένου ἐκ σπέρματος Δαυὶδ κατὰ σάρκα, τοῦ ὁρισθέντος υἱοῦ θεοῦ ἐν δυνάμει κατὰ πνεῦμα ἁγιωσύνης ἐξ ἀναστάσεως νεκρῶν, Ἰησοῦ Χριστοῦ τοῦ κυρίου ἡμῶν
육체라는 의미의 그리스어 ‘사르크스’(σάρξ)는 육체적 본성을 지닌 존재로서의 인간을 지칭하는 단어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핵심이 되는 문장은 ‘τοῦ ὁρισθέντος υἱοῦ θεοῦ ἐν δυνάμει’이다. 곧 예수가 그 ‘권능의 차원’(ἐν δυνάμει)에서 ‘신의 아들’(υἱοῦ θεοῦ)로 ‘정해졌다.’(ὁρισθέντος) 이제 예수는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신과 동등한 권능을 지닌 신적 존재가 된 것이다. 논리적으로 부활이 없었다면 예수는 신적 존재가 되지 못했다. 그러나 부활로 예수는 자신이 신적 존재임을 증명해 보였기에 바울은 그를 주님(κυρίου), 곧 신으로 부를 수 있게 되었다.
어떤 경로든 결론은 예수가 신적 존재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삼위일체에서 아버지 신과 아들과 동등한 본질을 지닌 위격의 의미를 지닌 성령은 성경에서도 그 근거를 찾기 힘들다. 물론 <요한복음>에 다음과 같은 관련 구절이 나오기는 한다.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까? 그분께서 바로 물과 피를 통하여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물만이 아니라 물과 피로써 오신 것입니다. 이것을 증언하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곧 진리이십니다. 그래서 증언하는 것이 셋입니다. 성령과 물과 피인데, 이 셋은 하나로 모아집니다.(요한 1서 5,5-8)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이 7-8절이다.
한글 번역본은 위와 같지만, 영어로 번역된 이른바 <킹제임스판 성경>(King James Version)에는 이 구절이 다음과 같이 나온다.
For there are three that bear record in heaven, the Father, the Word, and the Holy Ghost: and these three are one. And there are three that bear witness in earth, the Spirit, and the water, and the blood: and these three agree in one.
명확히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번역되는 부분이다. 삼위일체론이 뚜렷하게 담겨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성경학자들은 이 구절이 4세기경에 누군가의 조작으로 추가된 부분이라는 것에 동의하고 있다. 삼위일체론에 성경의 권위를 더하기 위해 이런 무리수를 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온건하게 수정 번역된 한글본에서도 신과 예수와 성령의 삼각관계를 충분히 암시하고 있다. 물론 영어로 된 <킹제임스판 성경>은 라틴어로 된 <불가타판 성경>을 그대로 번역한 것이다. 이런 무리수를 두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성경 본문에서 삼위일체론의 명확한 근거를 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런데 성령이라는 단어 자체는 <구약성경>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신약성경>에 많이 등장한다. 특히 예수가 태어나서 세례를 받고 공생활을 하고 수난과 죽음을 통해 마침내 부활할 때까지 성령은 늘 예수의 삶에 ‘함께’하는 존재가 된다. 그리고 그 성령은 <마태복음>에서 비둘기의 형상으로 나타났다.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셨다. 그때 그분께 하늘이 열렸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영이 비둘기처럼 당신 위로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그리고 하늘에서 이렇게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태 3,16-17)
왜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왔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구약에서도 성령과 비둘기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 누군가 만들어 낸 듯하다. 그리고 신의 목소리로 나왔다는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는 말도 사실은 구약의 <시편>(2,7)과 <이사야서>(42,1)에 나오는 문장을 재조합한 것으로 생각된다.
주님의 결정을 나는 선포하리라.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시편 2,7)
유대인들은 그들 왕국의 기름부음받은 이, 곧 지도자가 신의 아들이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이런 식으로 표현했다.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이, 내가 선택한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 그는 민족들에게 공정을 펴리라.(이사야 42,1)
여기서 말하는 ‘신의 종’이 누구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당연히 메시아와 더불어 예수를 지칭하는 의미로 사용하였다. 문제는 이 경우와 마찬가지로 신약에서 예수가 구약에서 예언된 존재임을 확증하기 위하여 인용하는 구약의 구절이 완전히 일치하는 경우가 드물다는 사실이다. 사실 초대교회의 신자들이 구약을 깊이 연구한 이들이 아니었을 것이니 이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을 듯하다. 디아스포라 상황에 부닥친 유대인 기독교 신자들조차 히브리어보다는 그리스어가 더 익숙했을 것이니 말이다. 어찌 되었든 이러한 삼위일체의 도식은 초대교회 신자들의 신앙이 성경의 구절로 표현된 것으로 여겨진다.
사실 <구약성경>에서 성령은 신의 현존을 보여주는 현상의 의미가 강했지만 <신약성경>에서 성령은 아예 인격적인 존재로 등장한다. 그래서 성령으로 잉태되고, 세례 때 성령이 내리고, 성령에 이끌려 광야에서 악마의 유혹을 받는다. 그런데 <사도신경>에서 성령은 사람의 형상이 아니라 불꽃 모양의 혀로 나타난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거센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 안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불꽃 모양의 혀들이 나타나 갈라지면서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다. 그러자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성령께서 표현의 능력을 주시는 대로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였다.(사도 2,2-4)
이 불꽃 모양의 혀는 정확히 말해서 혀가 불꽃같이 생겼다는 말이다. 여기에서도 성령은 아직 인격체적인 모습을 지닌 존재가 아니다. 이 성령강림 사건은 사실 기독교 교회가 실질적으로 창립된 시점으로 받아들여진다. 기독교의 전승에 따르면 성령강림 사건은 예수가 승천한 지 정확히 50일 후에 이루어졌다. 그렇다면 서기 30년에서 36년 사이에 벌어진 일이다.
그런데 이 성령을 예수가 보내겠다고 이야기한 성경적 근거는 <요한복음>이 유일하다. 잘 알려진 대로 <요한복음>은 예수가 죽은 지 100년이 훨씬 지난 시점에서, 그것도 여러 저자가 오랜 기간에 걸쳐 편집하여 완성한 책이다. 말하자면 <요한복음>에서 설명한 예수가 보낸다는 성령이 이미 와서 교회 안에서 활동한 지 오래된 후에야 그 성령을 보낸다는 약속이 문서화되었다. 더구나 공관복음서에서는 유대교의 전통대로 신의 뜻을 전하는 존재였던 성령이 <요한복음>에서는 예수가 승천 후에 제자들을 돕기 위해 보내는 일종의 ‘가이드’와 같은 역할을 하는 존재로 변한다.
좀 자세한 내용을 살펴보자.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요한 15, 26)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요한 14,26)
예수가 죽고 난 다음 신이 인간에게 보내는 존재는 ‘파라클레토스’(παράκλητος), 곧 인간을 도우라고 신이 파견한 자이다. 이를 보호자로 번역하는 경우가 있지만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번역이다. 차라리 변호사가 더 원래 뜻에 가까운 번역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예수가 신과 함께 있던 이 보호자를 인간에게 보낸다고 했다. 곧 파라클레토스는 신 곁에 있는데 그를 보내도록 하는 것은 예수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이 두 문장보다 앞에 있는 14장 16절에는 보내는 주체가 신 자신이다.
그리고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요한 14,16)
보호자, 진리의 영, 성령이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지만, 성령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14장 26절에 단 한 번만 나온다. 그리스어 원문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ὁ δὲ παράκλητος, τὸ πνεῦμα τὸ ἅγιον ὃ πέμψει ὁ πατὴρ ἐν τῷ ὀνόματί μου, ἐκεῖνος ὑμᾶς διδάξει πάντα καὶ ὑπομνήσει ὑμᾶς πάντα ἃ εἶπον ὑμῖν [ἐγώ].(요한 14,26)
한글로는 다음과 같이 번역된다.
보호자, 곧 아버지가 내 이름으로 보낼 성령이 여러분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여러분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줄 것이다.
이렇게 ‘성령’(τὸ πνεῦμα τὸ ἅγιον)을 ‘나(예수) 명의로’(ἐν τῷ ὀνόματί μου) 보낸다는 약속은 오로지 <요한복음>에만 나오고 공관복음에는 전혀 언급이 없다. 이렇게 성경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 관한 일관된 논리가 성경에 제대로 전개된 적이 없었다. 물론 <마태복음>의 마지막 장에는 삼위일체적인 표현이 나온다.
열한 제자는 갈릴래아로 떠나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산으로 갔다. 그들은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하였다. 그러나 더러는 의심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가가 이르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16-20)
이런 식으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라는 이른바 ‘성삼위 신조’는 초대교회에서부터 세례 양식에 사용되어 왔다. <마태복음>에 나온 것은 그런 초대교회의 관습을 예수의 이름으로 확정하려는 의도에서 첨부된 내용으로 보인다. 사실 예수 자신은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지만, 그 자신은 단 한 사람에게도 세례를 베푼 적이 없다. 그러면서 제자들에게는 세례를 베풀 것을 권유하였다. 무엇보다 예수 자신은 삼위일체론적인 발언을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그러나 예수 사후 수립된 기독교 교회에서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관계를 명확히 하려는 시도가 로마교회를 중심으로 지속해서 있었다. 그래서 2세기가 시작될 무렵을 전후로 하여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한꺼번에 언급하는 일이 잦아지기 시작하였다. 로마의 주교였던 클레멘스(Κλήμης Ῥώμης, 35~99)나 안티옥의 주교였던 이냐시오(Ἰγνάτιος Ἀντιοχείας, †108/140), 유스티아누스( Ἰουστῖνος ὁ μάρτυς, 100~165)와 같은 초대교회의 대가들이 공통적으로 삼위를 언급하였다.
그러나 모든 교부들이 삼위일체만을 주장한 것은 아니다. 테오필루스(Θεόφιλος ὁ Ἀντιοχεύς, †183/185)는 신과 말씀과 지혜의 일치를 주장하였다. 오리게네스(Origen Adamantius, 185~253)는 성자가 성부의 아래 있다고 보았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일체를 교회 안에서 최초로 체계적으로 주장한 사람은 테툴리아누스(Quintus Septimius Florens Tertullianus, 155~220)이다. 그러나 그가 살아 있을 당시만 해도 이러한 주장은 논쟁거리가 되었다.
본격적으로 삼위일체론이 교리로 확립된 것은 콘스탄틴 황제가 325년에 소집한 니케아 공의회였다. 삼위일체론이 나오게 된 배경은 교파 간의 세력 싸움이 주된 원인이었다. 특히 기독교 초기부터 벌어진 교리 논쟁은 피를 부르는 투쟁을 불사할 정도로 격렬하게 진행되었다. 니케아 신경의 탄생 배경이 된 이른바 아리우스(Arius, 256~336)와 알렉산더(Alexander, †326/328) 사이에 벌어진 예수와 신의 본질적 관계를 둘러싼 논쟁이었다. 아리우스는 유대교 신자와 마찬가지로 오로지 신만이 전지전능한 존재로 보았다. 그래서 예수는 신과 같은 권능을 지녔지만, 신과 동등한 존재가 될 수는 없었다. 예수는 최고의 피조물일 뿐이었다. 그래서 알렉산더와 그 일파가 주장하는 예수가 ‘창조’된 것이 아니라 신으로부터 ‘나왔다고’ 하는 것은 말장난에 불과한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니케아 신경을 만든 주 세력은 그리스 철학에서 사용한 용어들인 우시아(οὐσία) 휘포스타시스(ὑπόστασις)에 더하여 호모스(ὁμός)와 우시아(οὐσία)를 합친 호모우시온(ὁμοούσιον)이라는 개념을 만들어 신과 예수, 아버지와 아들이 동질적인 존재라는 것을 신경으로 확정해 버렸다. 그리하여 예수가 신에서 나왔기에 아버지인 신과 동일한 존재는 아닌 성자의 위격을 지녔지만 호모우시아, 곧 성부와 성자는 본질적으로 같다는 도그마를 만들어 내었다. 이리하여 성부와 성자가 다르다는 아리우스파와 성부와 성자는 유사하다는 유세비우스(Ευσέβιος της Καισαρείας, 263~339)의 주장은 모두 이단적인 것으로 단죄되었다. 특히 아리우스파의 주장은 교회 안에서 신성모독을 저지른 죄인의 헛소리로 취급당했다. 교회에서도 승자가 정의이었다. 이 니케아 공의회는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소집한 것으로 최종 결론도 콘스탄티누스가 내렸다. 교회 내부의 문제를 교회 지도자들이 해결하지 못하자 정치가 해결해 준 셈이다. 그리고 이러한 것은 선례가 되어 이후에도 오랫동안 교회 내부의 문제는 정치적 권력으로 정리되는 일이 잦았다.
예수가 명확하게 정리하지 않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관계는 이런 방식으로 정리되었다. 결국 예수는 신이고 신은 예수인데 신과 예수는 별개의 위격이다. 그리고 그들은 인간 세상에 실체적인 성령을 보냈다. 구약에서는 오로지 신의 권능을 나타내는 힘이었던 성령을 말이다.
그런데 그런 강력한 힘을 지닌 존재인 예수가 21세기에 들어와서도 여전히 이해하기 힘든 존재로 남아 있다. 게다가 종교가 사적 영역으로 물러나면서 각자가 믿는 예수가 더욱 개인주의적 해석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 통일된 영적 힘을 하나로 뭉친 인류에게 발휘하는 예수가 사라진 것이다. 그 과정을 살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