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모두에게 예수다
21세기의 물질문명 사회에서도 예수는 여전히 인기가 있다. 전 세계 인구의 20%가 넘는 22억 명이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한다. 물론 과거와는 다른 믿음이지만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과거의 믿음은 대부분 중세, 그리고 일부 지역에서는 근세까지의 것을 말한다. 19세기에 성경해석학이 등장한 것은 단순히 성경을 학문적으로 연구하기 위한 학자들의 열정 때문만은 아니다. 시대정신이 교회를 사회의 중심에서 주변으로 몰아낸 결과 교회의 권위와 권력이 동시에 줄어들게 된 탓이다. 상징적인 사건이 2004년 체결된 유럽연합헌장의 전문 작성 과정에서 교회가 보여 준 모습이다. 이 헌장은 유럽의 정신이 마침내 종교색, 곧 기독교의 색깔을 벗어나 세속 정신을 중심에 놓게 되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유럽연합헌장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We the People of the European Union, united in our diversity, common history, and shared values and future, in order to form an ever-closer Union, ensure the fundamental rights of all, promote solidarity, development and the general welfare, and secure a free, peaceful and sustainable future for generations to come, establish and adopt this Constitution for the European Union.
반역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 유럽 연합의 사람들은 다양성, 공통의 역사, 공유된 가치와 미래로 일치하여 더욱 긴밀한 연합을 이루고, 모든 이의 기본권을 보장하며 연대, 발전, 보편 복지를 증진하고, 미래 세대를 위한 자유롭고 평화로우며 지속 가능한 미래를 확보하고자 이 유럽 연합 헌장을 제정하고 채택합니다.
기독교 교회는 이 전문에 반드시 기독교라는 종교를 명시하고자 했다. 곧 ‘공동의 역사 공동의 가치’가 나오는 부분에 ‘공동의 종교’(다시 말해서 기독교)라는 표현을 삽입하고자 했다. 이를 위하여 당시 교황이었던 요한 바오로 2세도 유럽연합 본부에 친서를 보낼 정도였다. 그러나 특히 프랑스의 강력한 반대로 그러한 종교적 문구의 삽입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는 기독교가 세속화된 유럽 사회에서 더 이상 중심이 아니라 주변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매우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사실 기독교 신자가 22억 명에 이르지만 실제로 이들이 모두 참다운 의미에서 교회의 ‘충실한’ 신자는 아니다. 특히 현대 기독교의 발상지나 다름없는 유럽의 교회에 대한 충성도는 심각한 수준이 되어버렸다.
비록 예수가 유대인이고 기독교의 발상지가 예루살렘이지만 이미 초기부터 기독교는 로마제국, 곧 유럽과 현재 터키와 소아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한 유럽 종교였다. 특히 서기 70년 로마제국의 군대가 유대인의 반란을 제압하며 예루살렘을 완전히 초토화하면서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고 있던 예루살렘의 초기 형태의 ‘예수 공동체’도 종말을 고한다. 이후 기독교는 예수의 사도가 아닌 바울이 세운 교회들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하게 된다. 그리고 바울은 스스로 고백한 대로 이른바 이방인, 곧 비유대인 기독교 신자들의 사도였다. 오늘날의 기독교는 유대 땅이 아니라 처음부터 유럽 땅에서 시작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베네딕토 16세 교황도 기독교와 유럽 문화의 불가분적 관계를 역설하기까지 하였다. 물론 언론의 비판이 곧 그의 발언을 뒤따랐지만 말이다.
과연 예수는 누구의 예수인가? 유대인인가? 유럽인인가? 아니면 아시아나 아프리카인가? 물론 교회는 모든 인간의 구원을 위한 예수를 이야기한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예수가 모든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노력했다는 구절은 나오지 않는다. 예수는 철저히 유대인들만의 회개와 그들을 위해 마련한 하늘나라를 선포한 존재였다. 유대 지역의 이웃이자 다윗을 공동 조상으로 하는 이스라엘 왕국의 사마리아인조차 예수가 말한 복음을 들을 자격이 없는 이들이었다.
그런데 정작 오늘날 유대교와 이슬람교에서 예수는 한 사람의 예언자일 뿐이다. 또한 예수는 당시 유대교 성직자들, 특히 바리사이들의 ‘타락’을 집중적으로 비판하며 그들을 ‘독사의 족속’으로 비난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역사의 아이러니로 서기 70년에 멸망한 이스라엘이 1948년 다시 국가를 재건하기까지 거의 2,000년 동안 디아스포라 상황에 부닥친 유대인의 종교적 지주가 된 이들은 바로 예수가 비난한 바리사이들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 기독교의 예수는 유대인과 무관한 인물이다. 그렇다면 이 예수는 누구의 예수이어야 한단 말인가?
만약 유대 왕국이 멸망하지 않고 베드로와 야고보가 중심이 된 예루살렘의 교회가 예수를 교주로 하는 기독교의 정통성을 유지했다면 오늘날의 기독교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이른바 예수의 정통 제자들이 세운 교회가 망하고 예수를 한 번도 본 적도 없고 예수의 가르침을 직접 배운 적이 없는 ‘로마인’이었던 바울이 기독교의 정통성을 내세우고 팔레스타인 지역이 아닌 유럽 대륙에 기독교를 퍼뜨리지 않았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기독교도 없었다.
원래 유대인만을 위해 설교했던 예수를 놓고 오늘날 기독교에서는 그가 온 인류를 구원하러 온 존재임을 강조한다. 성탄절과 부활절은 물론 기독교 전통의 여러 축일과 행사, 더 나아가 원래는 이교도의 것인데 기독교에 흡수된 만성절, 그리고 그와 함께 따라다니는 핼러윈도 기독교 문화의 축제로 세계 여러 나라에서 거행된다. 이 모든 기독교 문화는 원래 유대인이었던 예수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철저히 유럽의 문화이다. 예를 들어 성탄절은 로마제국의 황제 아우렐리우스는 274년 12월 25일을 ‘무적의 태양신’(sol invictus) 축일로 제정하여 태양신을 기념하는 날을 거행하도록 한 것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유일한 종교, 곧 국교가 되면서 이날을 태양신 대신 예수의 탄생일로 기념하게 되었다. 곧 기독교 신자들은 이 태양신을 대신하여 예수를 ‘그리스도, 참된 태양’(Christus, verus Sol)으로 숭배하게 된 셈이다.
재미있는 것은 성탄절에 아이들에게 선물을 하는 관습을 시작한 것이 다름 아닌 독일의 마르틴 루터였다는 사실이다. 사실 이미 그 이전에 독일에서는 니콜라스 축일(12월 6일)에 아이들에게 선물을 하는 관습이 있었다. 그런데 이런 관습을 마르틴 루터가 1535년 성탄절에 대한 아이들의 관심을 촉진하기 위하여 성탄절로 옮겼다.
그 훨씬 전부터 유행한 말구유 장식은 이탈리아 아시시의 프란치스코가 1223년부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크리스마스트리는 16세기부터 장식하기 시작했고, 대림초는 1839년 비커른(Johann Hinrich Wichern, 1808~1881)이 시작하였다. 오늘날 전 세계가 공통으로 알고 있는 산타의 모습은 1931년부터 코카콜라가 광고에 사용한 인물이다. 이처럼 기독교에 관련된 많은 제도와 풍습은 이른바 ‘이교도적’인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오늘날 그것을 따지는 사람은 거의 없다. 기독교는 그 시작부터 유대민족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유럽인의 종교이기 때문이다.
다시 기독교의 예수로 돌아가 보자. 예수와 기독교에 대한 인식의 결정적 전환을 맞이하게 된 것이 20세기에 두 번 치러진 세계대전 때문이었다. 독일의 가톨릭 신부는 독일의 전차를 예수가 보호해 주기를 기원했고 영국의 성공회 신부는 영국의 전투기가 독일을 무찌르기를 예수에게 간구하였다. 그리고 프랑스의 신부는 프랑스 국민이 독일에 맞설 것을 역설하였다. 예수는 누구를 도와야 했는가? 그리고 누구를 도왔는가?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때 600만 명의 유대인을 포함하여 7천만 명의 인간이 사망할 때 예수는 어디에 있었는가? 신이 그토록 사랑해서 인간이 멸망하지 않게 하도록 자기 외아들을 보냈다는 그 신 말이다.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기독교에서 찾을 수 없다는 절망감에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은 급격히 기독교 교회로부터 멀어져 갔다. 현재 독일만 해도 매년 수십만 명이 기독교 교회를 떠나고 있다. 그리고 교회에 적을 두고 있는 이들 가운데에도 주일 예배에 참석하는 이들은 10%대에 머물고 있다. 이는 기독교가 시작된 유럽 대륙에서 현재 광범위하게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도 설문조사를 해 보면 예수에 관한 관심은 여전히 높다. 특히 미국의 경우가 그렇다. 그리고 통계자료는 종교와 무관하게 많은 사람들이 예수에 관하여 상당한 지식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다만 그에 비하여 정작 성경에 대한 지식수준은 개신교나 가톨릭이나 높지 않다. <퓨조사연구소>(Pew Research Center)에서 지속해서 발표하는 자료를 참조해 보면 교회의 가르침이나 성경 지식과 무관한 예수에 대한 인상을 많은 사람들이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갤럽이 1993년에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도 결과는 비슷하였다. 미국인의 대부분(84%)은 예수가 신의 아들이며 언젠가 재림할 것으로 믿고 있었다. 그러나 같은 설문에서 예수가 신의 아들이라고 믿는 영국인은 절반도 안 되었다(46%).
그럼에도 예수가 인류에게 모범적이며 훌륭한 인물이라는 데에는 반대가 없다. 그리고 실제로 개인적인 삶에서 예수의 도움을 받았다고 대답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러나 같은 설문조사에서 예수가 살았던 삶의 모습을 모범으로 삼는 인생을 산다고 대답한 사람은 10%에 불과하였다. 예수의 도움을 받고 예수의 재림을 믿고 예수가 매우 친절한 분이라고 인식하면서도 막상 그의 삶대로 살아간다고 인식하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이러한 모순은 왜 생기는 것인가?
그것은 바로 시대정신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이제 특정 종교의 교주라기보다는 종교와 사상을 초월한 인류의 보편 가치를 대표하는 인물이 된 것으로 봐야 한다. 곧 이웃사랑, 자기 헌신, 이타주의, 인류의 미래에 대한 긍정적인 확신을 예수가 대변하고 있다. 그리고 이 예수는 이제 가톨릭이나 개신교만이 배타적으로 보유한 인물이 아니라 22억 명의 기독교 신자 각자가 지닌 ‘나의’ 예수가 되었다.
과거 기독교 학자 특히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 1260-1328)와 같은 인물은 교회에서는 ‘나의’ 예수가 아니라 보편적인 ‘참된’ 예수를 찾을 것을 촉구하였다. 그러기 위해서 내세운 방법이 ‘케노시스’(kenosis), 곧 나를 비우는 것이었다. 인간의 자아는 거짓과 욕심으로 가득 차 있기에 참다운 예수, 참다운 신의 만남을 방해한다고 한다.
그런데 이렇게 나를 비운 상태에서 내 안에 들어오는 신은 ‘나의 신’ 일뿐이다. 그래서 이러한 신조차 내 안에서 비울 때 진정한 신이 내 안에 들어오게 되어 신을 체험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비유하자면 선불교에서 참 나를 찾는 과정과 비슷하겠다.
색계의 공허한 나를 버리고 참 자아를 찾아가는 선불교의 참선 과정에서 주화입마의 폐해를 극복해야 진정한 열반에 이르게 되는 것처럼 신을 찾는 구도의 길에서 가짜 신, 곧 나만의 신을 척결할 수 있어야 참다운 신과의 합일이 가능하다.
그러나 다원주의, 과학주의, 상대주의가 만연한 상황에서 ‘절대’는 오히려 독재와 동일한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21세기에 신과 예수는 오히려 철저히 개인적인 것 일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서 약 22억 명의 기독교인과 그 나머지 사람들을 포함한 약 80억 명의 인류는 궁극적으로 개별적인 ‘나’의 예수와 ‘나’의 신을 만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출발점이 된다. 그 22억 명 정도의 개인으로 이루어진 ‘기독교적 예수들’ 포함한 약 80억 명의 ‘인간 예수’의 원형이 2,000여 년 전 팔레스티나 지역에서 태어난 ‘역사적 예수’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이는 포이어바흐(Ludwig Feuerbach, 1804-1872)가 갈파한 것처럼 단순한 인간의 이상적 존재의 투사가 아니다. 예수의 역사적 실존은 이제 거의 부인하기 힘든 상황에서, 그리고 성경의 권위가 무너진 상황에서도 예수의 의미가 퇴색하지 않은 것이 지금의 시대정신이다. 과연 이러한 예수의 모습에서 우리가 무엇을 배울 수 있을 것인가? 그 답은 바로 특정 시대와 집단에서 시작된 종교의 도그마가 아니라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중심으로 한 문화적 접근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런 문화적 예수의 규명이 현재 한국 사회에서 일부 목사들이 보여주는 시대착오적이고 도그마적인 배타적 예수 해석을 극복하는 방법이 될 수도 있다. 그런 시대착오적인 예수의 모습은 이미 제2차 세계대전의 폐허와 함께 무너져 버려서 이제는 그 유적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유럽은 그러한 사실을 역사적 현실로 체험하고 이미 종교적 도그마에서 문화적 기독교로 넘어선 지 오래다. 유럽 역사에서 볼 수 있듯이 이른바 ‘도그마적 예수’는 사회를 분열시키고 혼란에 빠지게 하지만 ‘문화적 예수’는 사회를 통합하고 발전시킨다. 그래서 예수는 더 이상 도그마로 머물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다시 말해서 예수를 교회가 독점하여 이른바 ‘저작권’을 내세울 수 없게 되었다고 봐야 한다. 예수는 종교가 아니라 문화가 되었으니 말이다.
그런데도 한국의 기독교에서는 유럽이 이미 극복한 배타주의적 신앙관이 여전히 지배적인 이데올로기가 되고 있다. 그리고 그 근거를 <요한복음>에서 찾고 있다. 그러나 사실 예수를 통하지 않고는 신에게 다가갈 수 없다는 <요한복음> 특유의 신앙 교리도 나중에 예수를 신격화한 이후에나 수립된 것이 거의 확실하다. 공관복음서에서 예수는 늘 신에게 직접 기도할 것을 권유했지, 자신이 대신 빌어주겠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 그런데 느닷없이 <요한복음>에서 예수를 통하지 않으면 신에게 다가갈 수 없다는 식으로 예수를 샤만과 같은 존재, 곧 신과 인간의 중계자로 묘사하는 신앙고백이 만들어진 셈이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그리스 원어로는 다음과 같다.
Ἐγώ εἰμι ἡ ὁδὸς καὶ ἡ ἀλήθεια καὶ ἡ ζωή
여기서 생명을 의미하는 ‘쪼에’(ζωή)는 기독교적인 개념이다. 그러나 길을 의미하는 ‘호도스’(ὁδὸς)는 유대교의 개념이고, 진리를 의미하는 ‘알레테이아’(ἀλήθεια)는 전적으로 헬레니즘적인 개념이다. 그것을 <요한복음>의 저자가 예수를 따르는 기독교 신자들의 신앙고백에 적용하였다. 길은 유대인들이 모세에게 이끌려 이집트를 탈출한 행로를 의미하는 개념이다. 구역 신명기에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너희는 이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를 인도하신 모든 길을 기억하여라.(신명 8,2)
히브리어로는 다음과 같다.
וְזָֽכַרְתָּ֣ אֶת־כָּל־הַדֶּ֗רֶךְ אֲשֶׁ֨ר הוֹלִֽיכְךָ֜ יְהֹוָ֧ה אֱלֹהֶ֛יךָ
여기에서 길을 의미하는 단어가 ‘하드라크’(הַדֶּ֗רֶך)는 동사 ‘밟다’를 의미하는 ‘다라크’(דרך)에서 나온 명사이다. 특별한 뜻이 없고 그저 물리적으로 사람이 걸어 다니는 길을 의미한다. 물론 그 의미가 확장되어 ‘여정’의 뜻도 포함된다. 그래서 신학적으로는 신의 인도로 걸은 유대민족의 탈출로를 의미하였다. 이런 이집트 탈출길이 기독교에 들어와서 아예 예수 자신으로 의미를 전환하게 되었다.
원래 ‘알레테이아’는 고대 그리스 철학 용어이다. 예수가 살던 무렵부터 <요한복음>의 저자가 이 책을 저술할 시기까지 로마제국을 지배한 것은 헬레니즘이었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 철학 용어와 개념이 사회에서 널리 통용되었다. 이 ‘알레테이아’도 그중 하나다. 많은 성경에서 이 단어를 흔히 ‘진리’로 번역하지만, 이는 틀린 해석이다. 정확한 의미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레테강’(Λήθη)이라는 단어 앞에 이를 부정하는 접두사 아(ἀ-)를 붙여 ‘레테강을 건너지 않은 자의 정신’을 의미했다. 곧 ‘하데스’(ᾍδης)가 지배하는 저승 세계로 가는 5개의 강 가운데 하나인 레테강을 건너고 나서도 저승의 기억을 정확히 하는 명료한 정신을 지닌 상태를 말한다. 플라톤은 바로 철학자만이 이러한 정신을 지닌 자라고 주장한 바가 있다. 그리스 전설에 따르면 레테강을 건너는 이들은 목이 너무 말라서 그 강물을 마시지 않을 수 없는데 일부 정신이 명민한 자들은 아무리 목이 말라도 그 물을 마시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 이들은 이 세상에 태어나서도 저승에 대한 기억, 플라톤의 용어로는 이데아 세계에 대한 기억이 남아 철학자로 살아갈 수 있다고 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는 이 세상의 논리를 뛰어넘는 놀라운 지혜를 지닌 존재라는 것을 묘사하기 위하여 이러한 용어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 자체가 진리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이는 요한복음 1장에 나오는 태초에 존재한 말씀, 곧 ‘로고스’(λόγος)와 같은 의미로 해석한다. 그래서 <요한복음> 14장 6절은 예수가 신 자체라는 기독론이 수립된 이후에 쓰인 것임을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러나 공관복음서에서 예수의 입을 빌려 주장한 바에 따르면 인간은 신과 직접 1대 1로 대면하는 존재라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진리이다. 그 중간에 굳이 예수나 마리아를 매개로 둘 필요가 없다. 그러나 기독교는 이런 프레임을 만들고 나서 다시 신부나 목사가 예수를 대신하는 또 다른 샤만이 되는 듯 교만을 부리는 역사를 만들게 된다. 그런 프레임을 만든 이유는 당연히 권력과 돈이다. 신과 예수를 대신하는 신부와 목사에게 천당 갈 수 있는 조건으로 자신의 모든 재산을 바치는 것을 신자의 도리로 가르친 긴 역사가 그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다시 위의 성경 구절로 돌아가 보자. 원래 위의 구절은 유대인들의 사법 기관인 산헤드린, 곧 최고회의 위원이었던 니코데모가 예수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 나온 이야기이다. 이 말을 하기 전에 예수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3, 13-15)
이는 예수의 입을 통하여 <요한복음> 공동체의 신앙을 고백하게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 곧 예수 이외에도 구약성경에 나온 대로 두 사람이 하늘로 올라갔다. 그럼에도 이런 고백을 하는 것은 예수의 신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 신적 존재인 예수가 약속한 것은 영생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런데 예수, 곧 신의 외아들까지 보내서 인간에게 영생을 약속해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그 이유는 <창세기>에 나온다. 아담과 하와가 신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을 아는 지혜를 주는 나무에 달린 열매, 이른바 선악과를 먹고 선악을 분별하고 부끄러움을 알게 되자 신은 분노 하여 그들을 에덴동산의 동쪽으로 쫓아내 버린다. 그러자 인간은 땀 흘려 농사를 짓고 고통 속에서 후손을 보면서 생존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곧 에덴동산에서는 노동도 안 하고 출산도 할 필요가 없이 영생을 누리다가 선악을 분별하게 되었다는 이유로, 더 정확히는 신과 맞먹는 존재가 되었다는 이유로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결국 언젠가는 죽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바로 그렇게 죄를 지어 죽게 된 인간의 운명을 되돌려 놓고자 예수가 이 세상에 왔다는 것이 기독교의 논리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영생이 예수의 재림 이후 전개될 최후의 심판에서 내려진 판결에 달려 있다는 사실이다. 세상에 온 예수를 믿는 것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그리고 기독교 신학적으로는 예수를 믿는 것에 더하여 신의 은총이 필수적이다. 과연 구원이 믿음으로, 또는 인간의 선행으로 이루어지는 것인지에 대한 논쟁에서 결국 가톨릭교회가 감리교에 졌던 바가 있다. 개신교에서는 인간의 선행이 아니라 신의 은총만으로 구원받는다고 주장한 데 비하여 가톨릭에서는 인간의 선행이 구원에 작용한다고 주장해 왔었다. 그러나 교리적으로 개신교의 주장이 훨씬 논리적이고 예수의 가르침에도 합당하다. 다시 말해서 신이 구하기로 이미 작정을 한 인간이 선행을 하는 것이지, 선행을 했기에 신이 그를 구하기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논리를 흔히 의화론이라고 한다. 이 논리를 놓고 서로 팽팽하게 대립해온 가톨릭교회와 개신교, 특히 루터교회는 1999년 10월 31일 독일 아우크스부르크(Augsburg)에서 <의화 교리에 관한 가톨릭교회와 루터교 세계연맹의 합동 선언문>(Joint Declaration on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을 채택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인간의 선행은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다는 진리에 동의하기로 합의한 셈이다. 기독교의 기본 교리에 맞는 이 선언에 따르자면 논리적으로 착한 인간이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을 인간이 착한 인간이 되는 것이다. 구원은 절대적으로 신의 권한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한복음> 14장 6절의 논리에서 더 큰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후반부의 문장이다. 곧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라고 한 말이다. 이 말대로라면 예수가 태어나기 이전의 모든 사람, 그리고 현재 세계 인구 가운데 예수를 전혀 믿지 않는 약 60억의 인구는 절대로 하늘나라에 갈 수 없다는 논리적 모순이 발생한다. 그런데 모든 인간의 신이 자기 모습대로 창조한 소중한 존재다. 그런데 단지 예수를 몰라서 믿지 않았다고 해서 하늘나라에 들어갈 자격조차 박탈당해야 한다는 것은 논리를 떠나 억울한 일이 된다. 어차피 그럴 것이라면 예수 이전에 태어난 인류는 뭣 하러 이 세상에서 착하게 살았는가? 그리고 그렇게 21세기를 살아가는 비기독교인인 약 60억의 인구는 뭣 하러 이 세상에서 착하게 살겠는가?
이 논리대로라면 이순신 장군도 세종대왕도 하늘나라에 갈 확률은 제로다. 그리고 기독교의 신과 같은 야훼 신을 섬기는 유대교와 이슬람교 신자도 하늘나라에 갈 확률이 제로다. 도대체 말이 되는 주장인가? 공관복음서 어디에도 나오지 않고 오로지 <요한복음>에 단 한 줄 나오는 예수의 입을 빌려 한 이 문장을 가지고 극단적인 배척주의적 종교관을 설파하는 자들이 넘쳐나는 세상이다.
이 모순을 인식한 가톨릭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발표한 문헌 가운데 하나인 <교회헌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끝으로, 복음을 아직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도 여러 가지 이유로 하느님의 백성과 관련되어 있다. 먼저, 계약과 약속이 주어졌던 저 백성이 참으로 그렇다. 인성으로 말하면 그리스도께서 그 백성에게서 태어나셨으며(로마 9,4-5 참조), 선택에 따라 보면 그 백성은 조상 덕택으로 하느님의 가장 큰 사랑을 받았다. 하느님께서는 한 번 주신 선물이나 소명을 다시 거두지 않으시기 때문이다(로마 11,28-29 참조). 그러나 구원 계획은 창조주를 알아 모시는 사람들을 다 포함하며, 그 가운데에는 특히 무슬림도 있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신앙을 간직하고 있다고 고백하며, 마지막 날에 사람들을 심판하실 자비로우시고 유일하신 하느님을 우리와 함께 흠숭하고 있다. 어둠과 그림자 속에서 미지의 신을 찾고 있는 저 사람들에게서도 하느님께서는 결코 멀리 계시지 않으신다.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호흡과 모든 것을 주시고(사도 17,25-28 참조), 구세주께서 모든 사람이 구원받게 되기를 바라시기 때문이다(티모 2,4 참조). 사실, 자기 탓 없이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분의 교회를 모르지만, 진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찾고 양심의 명령을 통하여 알게 된 하느님의 뜻을 은총의 영향 아래에서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영원한 구원을 얻을 수 있다. 또한 하느님의 섭리는 자기 탓 없이 아직 하느님을 분명하게 알지 못하지만, 하느님의 은총으로 바른 생활을 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에게는 구원에 필요한 도움을 거절하지 않으신다. 사실 그들이 지닌 좋은 것, 참된 것은 무엇이든지 다 교회는 복음의 준비로 여기며, 모든 사람이 마침내 생명을 얻도록 빛을 비추시는 분께서 주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흔히 악마에게 속아 허황한 생각에 빠져 하느님의 진리를 거짓과 뒤바꾸고 창조주보다 피조물을 더 섬기며(로마 1,21.25 참조), 또는 이 세상에서 하느님 없이 살다가 죽어 가며 극도의 절망에 놓인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영광과 이 모든 사람의 구원을 증진하고자, 교회는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 하신 주님의 명령을 기억하고 선교 촉진에 진력하고 있다.(교회헌장 16항)
외아들까지 인간의 죄를 대신 씻도록 세상에 희생 제물로 보낼 정도로 인간을 사랑하는 신은 개신교만이 아니라 가톨릭, 이슬람교도, 유대교인,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이들까지 사랑한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런데도 많은 개신교파 교회는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을 여전히 금과옥조의 진리로 내세우고 있다. 그러면서 극도의 배타주의를 보인다. 과연 예수가 다시 살아와서 21세기 한국에서 그런 배타성을 보이는 교회를 보면 무슨 말을 할까? 일요일마다 교회 건물 안에 모여 ‘주여! 주여!’ 한다고 다 구원받는다고? 절대 그렇지 않다고 예수가 이미 단언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주님,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그때에 나는 그들에게,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들 가라,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 하고 선언할 것이다.”(마태 7,21-23)
교회 건물 안에서 ‘주여!’만 외치다가 교회 건물 밖에 나와서는 전혀 성령과 무관한 삶을 사는 자가 진정으로 예수를 믿는 자일까? 예수를 믿는다면 마땅히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바로 바울이 다음과 같이 말한 그 성령의 열매 말이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막는 법은 없습니다.(갈라 5, 22-23)
교회에 열심히 다니고 기도를 열심히 하고 자타가 공인하는 기독교 신자라 해도 위에서 말한 성령의 열매를 보이지 않는다면 그는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그와는 반대로 교회는 열심히 다니면서 바울이 말한 육의 행실을 보이는 이들이 더 많은 것이 현실 아닌가?
육의 행실은 자명합니다. 그것은 곧 불륜, 더러움, 방탕, 우상 숭배, 마술, 적개심, 분쟁, 시기, 격분, 이기심, 분열, 분파, 질투, 만취, 흥청대는 술판, 그 밖에 이와 비슷한 것들입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이미 경고한 그대로 이제 다시 경고합니다. 이런 짓을 저지르는 자들은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지 못할 것입니다.(갈라 5,19-21)
교회 안에서 같은 기독교 신자들끼리 적개심을 가지고 분쟁을 벌이고 시기하고 화내며 이기심을 보이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그러면서 김장로파, 박장로파로 분열과 분파를 일삼고 몰래 술에 취해 흥청대지 않는가? 심지어 불륜도 저지르지 않는가? 그러면서 오직 예수 믿으니 하늘나라 갈 것이라고 장담한다고? 그런 자들이 오히려 적그리스도 아닐까?
예수를 믿는 것과 예수를 숭배하는 것을 혼동하는 이런 자들이 짓는 가장 큰 죄는 바로 예수를 숭배하는 것으로 자신이 의롭게 된다고 착각하는 일이다. 예수를 믿는 자는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자다. 예수가 가르친 것은 간단하다. 바로 이웃사랑이다. 이웃사랑의 내용은 예수의 산상수훈에 정확히 나온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 38-48)
예수의 이런 불같은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이들이 진정한 크리스천이 아닌가? 그런데 많은 기독교인은 오른뺨을 맞기도 전에 먼저 상대방을 두들겨 패고, 속옷을 달라는 이야기를 듣기도 전에 내뺀다. 원수는커녕 같은 교회 신자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한다. 그러면서 예수만 믿으면 하늘나라 간다고 뻔뻔하게 말하고 돌아다니는 이들로 교회는 넘쳐난다.
‘예수를 믿는다’라는 것의 참된 의미는 그를 맹목적으로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다. 오직 신의 은총만으로 인간이 구원받는다는 것은 물론 기독교의 진리다. 그리고 그런 구원을 확신하는 믿음이 있어야 구원받는 것도 맞는 말이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 육의 열매만 맺는 믿음은 거짓 믿음, 자기기만에 불과하다.
21세기 한국 교회는 어떤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가? 왜 비기독교인만이 아니라 같은 기독교인마저 ‘개독교’라는 용어를 스스럼없이 사용하고, 전교의 손길을 뿌리치는가? 그 답은 간단하다. 스스로 기독교인이라고 내세우는 이들에게 ‘기독교 신앙의 향기’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 향기는 오로지 성령의 열매에서만 나는 것이다. 많은 기독교 신자들은 선교를 생명처럼 여긴다. 그런데 선교 용지를 나누어 주고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을 외치는 것이 선교가 아니다. 만약 선교하는 기독교인에게 성령의 열매에서 나오는 기독교 신자의 향기가 난다면 굳이 교회에 나오라고 권하지 않아도 그 향기에 이끌려 많은 사람이 교회로 달려가게 된다. 그러나 21세기 한국의 교회에는 성령의 열매에서 나오는 향기가 사라진 지 오래다. 오히려 많은 경우 육의 열매의 악취가 진동한다. 그런데 어찌 성령과 구원을 다른 사람에게 권유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교회의 생존 자체가 예수에 달린 것이기에 예수의 신성을 강조하고 교회의 기능을, 예수를 교주로 한 종단의 사제직을 수호하는 조직으로 보존하려는 노력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그래서 교회가 그리고 종교가 사회의 발전과 괴리를 이루는 어색한 관계가 존속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무엇보다도 예수의 인성에 관한 도그마에서 교회는 더 이상 그 권위를 세울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그렇다면 과연 인간 예수는 누구란 말인가? 영원히 존재하는 신의 아들일 뿐 아니라 지상에서 30여 년을 살다 간 그 인류의 스승 예수 말이다. 사실 수천 년 동안 많은 사람이 수많은 글과 강연을 통하여 예수를 이야기했지만 21세기에 들어서도 예수는 여전히 많은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존재이다. 무엇보다 그에 대한 ‘과학적’ 정보가 매우 부족한 것이다. 그래서 그에 관한 이야기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미완성인 상태로 전해지고 있다. 그래도 기왕 시작한 여정이니 예수의 정체에 대한 물음으로 매듭을 지어보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