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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여전히 잘 모를 예수

by Francis Lee

예수에 관한 이야기는 2,000년 가까이 이어져 왔다. 그러나 사실 ‘예수 이야기’는 누구도 확신 있는 결론을 내릴 수 없다. 예수에 관한 이른바 ‘원본’ 자료 자체가 워낙 부실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에 못지않은 이유는 바로 원래의 예수를 각 종파의 이익을 위해 자기 나름대로 채색하여 예수를 오히려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도록 방해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를 바로 알기 위해서는 이른바 현상학적 환원의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 후설(Edmund Hussel, 1859~1938)이 창시한 현상학에서 현상학적 환원(phänomenologische Reduktion)은 판단 중지(εποχη)와 더불어 올바른 인식에 도달하는 결정적인 방법이다. 후설에 따르면 어떤 잘 모르는 사태에 대하여 인간이 올바른 인식을 하기 위해서는 일단 그 사태에 관한 판단을 중지해야 한다. 그리고 그 사태의 본질에 이르기 위해서는 그 본질적이지 않은 요소들을 먼저 제거해야 한다. 그래서 인간의 인식이 그 본질 안으로 돌아가는, 곧 환원하는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예수를 올바로 이해하는 것에도 동일한 방법을 적용해야 한다. 많은 이들이 예수에 대하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지만 대부분이 자기가 만들어 낸 예수만을 이야기한다. 그래서 정작 성경에 나온 있는 그대로의 이른바 ‘날것’의 예수는 버려두고 자기 마음대로 꾸며낸 예수를 사람들에게 들이대게 된다. 그런데 기독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다른 종교에서도 바로 이런 ‘해석’(ἐξήγησις)을 주로 제도권의 성직자들이 한다. ‘엑세게시스’(ἐξήγησις)는 그리스어 동사로 ‘해석하다’라는 뜻의 ‘엑세게이스타이’(ἐξηγεῖσθαι)를 명사화한 말이다. 그리고 그 해석은 신적 권위를 지닌 것으로 신자들이 무조건 받아들여야 하는 교리(dogma)로 선포된다. 그 과정에 예수의 뜻을 성직자 마음대로 해석하고 심지어 예수와 무관한 자기의 의견을 삽입하는 조작의 과정이 반복됐다. 이런 조작된 부분을 제거하는 방법이 바로 현상학적 환원이다. 그 환원을 통해 이르는 사태 자체(die Sache)가 바로 궁극적으로 원래 예수의 모습이 되는 셈이다.

사실 근세까지만 해도 대중들이 그리스어나 라틴어, 히브리어는 고사하고 자국어도 잘 모르는 무지몽매한 상태에 있었기에 성직자들이 제시하였지만,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 그래서 권위가 없는 해석조차도 자연스럽게 권위주의적으로 강요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근세에 들어 특히 독일 튜빙엔 대학을 중심으로 한 19세기의 이른바 ‘튜빙엔 학파’(Tübinger Schule)의 진보적인 신학이 등장하면서 그런 교회의 도그마 중심의 성경과 교리 해석을 극복하고 역사비평적 방법(historisch-kritische Methode)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이 튜빙엔 학파에 속하는 학자들로는 이 학파의 창시자인 개신교 신학자인 바우어(Ferdinand Christian Baur, 1792~1860)를 비롯하여 슈트라우쓰(David Friedrich Strauss, 1808~1874), 베크(Johann Tobias Beck, 1804~1878), 퀘스틀린(Karl Reinhold von Köstlin, 1877~1894) 첼러(Eduard Zeller, 1814~1908)가 있다. 가톨릭 신학자로는 드라이(Johann Sebastian von Drey, 1777~1853), 묄러(Johann Adam Möhler, 1796~1838), 히르셔(Johann Baptist von Hirscher, 788~1865), 슈타우덴마이어(Franz Anton Staudenmaier, 1800~1856), 쿤(Johannes von Kuhn, 1806~1887)이 있다. 이들은 오늘날 성경, 그리고 더 나아가 기독교를 교회의 이해타산과 별개로 바라볼 수 있도록 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물론 기존의 제도권 교회는 이러한 역사비평적 시각을 극렬하게 반대하고 나서며 심지어 이단으로 몰고 가기도 했다. 그러나 자유주의와 과학주의의 시대정신을 신학도 비켜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오늘날 성경 해석은 중세와 근세의 낡은 껍질을 많이 벗어 버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유럽에서 이미 19세기에 성경에 대한 과학적 분석이 이루어졌음에도 한국에 들어온 기독교는 전적으로 매우 보수적인 프랑스외방선교회와 미국 선교사들의 주도권으로 이식된 것이기에 유럽의 중세적 분위기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 전통이 포스트모던한 21세기 한국 사회에서도 여전히 힘을 발휘하고 있다. 게다가 조선시대를 지배한 유교적 가부장제도가 그대로 교회 안에 스며들어 신부와 목사가 신의 권능을 대신한 ‘아버지’가 되는 것이 한국 교회이다.


더구나 성경이 여러 기독교 교파의 교리 수립의 근거 자료가 되면서 학문을 위한 문헌이 아니라 신앙을 위한 경전으로만 여겨지는 경향이 아직도 성경을 분석하는 것을 꺼리는 분위기가 특히 교회를 중심으로 강하게 남아 있다. 성경 해석을 신성모독으로 여기는 이들도 여전히 많다. 그래서 성경 해석은 늘 조심스러운 일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유럽을 중심으로 성경에 대한 역사적 학문적 연구가 상당히 이루어진 오늘날 성경에 나온 예수를 무조건 믿음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이 모순적이라는 증거를 성경 자체에서 얻어낼 수 있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성경 저자가 편집한 자료와 저자의 주관이 복음서와 서간의 작성에 강하게 작용했다는 것을 문헌 분석으로 확인된 이상, 성경을 신성불가침의 존재로만 간주하여 성경 구절에 한 점의 오류도 없다는 맹목적인 믿음을 가질 필요는 없어졌다.


이러한 생각에서 이 책을 저술하게 되었지만, 여전히 아쉬움은 남는다. 안셀무스(Anselm of Canterbury, 1033~1109)는 ‘믿기 위해서 알기보다는 알기 위해서 믿는다’(neque enim quaero intelligere ut credam, sed credo ut intelligam)라고 말했다. 곧 신앙이 이성 위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기독교가 전성기를 누리던 중세에 인류 문명이 암흑시대에 머문 사실이 말해주는 것처럼 맹목적인 신앙은 인간의 이성을 마비시켜 버린다. 이성과 신앙이 서로 보완적인 기능을 해야 한다. 신앙에만 빠지면 독선이 되고 이성에만 집착하면 공론에 머물게 된다.

19세기 이후 유럽 문명사에서 기독교가 중심에서 변두리로 쫓겨난 다음 과학주의가 기독교의 자리를 대신하여 차지하였다. 그러나 과학주의가 과거 기독교와 마찬가지의 도그마로 군림하였지만 인간 사회가 중세보다 더 평화와 조화를 누리고 인간이 서로에게 더 친절해지지도 않았다. 기독교가 고위 권력자와 성직자의 권력 유지를 위하여 신을 이용했다는 비난을 받았지만, 과학자들 역시 과학적 지식으로 권력을 누리기 위하여 지식을 이용했다는 비난을 똑같이 받는 것이 현실이다. 이른바 과학만능주의의 폐해가 바로 환경 파괴이다. 과학자들은 과학적 지식과 기술적 응용으로 인류의 진보를 이룩할 수 있다고 확신하고 인간을 신과 동일한 능력을 지닌 존재로 간주했지만 결국 인간을 지구와 적대적인 관계에 놓이게 했다.


기독교가 신과 인간의 적대적 관계를 해소하겠다고 큰소리쳤지만, 기독교의 역사는 사실 투쟁, 살인, 약탈, 타락, 분열로 점철됐다. 과학은 인류의 진보와 행복을 보장한다고 큰소리쳤지만, 세계는 여전히 전쟁, 갈등, 파괴, 분열, 그리고 더 나아가 환경 파괴와 핵전쟁을 통하여 인류가 스스로 멸망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버렸다. 기독교든 과학이든 독선적인 도그마가 되는 순간 본래의 선한 목표는 상실되고 인간의 악으로 기우는 경향만이 구체화될 뿐이라는 것을 역사가 말해주고 있다.

현재 교회가 보여주는 모습이 원래 예수가 인간에게 가르치고자 했던 것과 과연 얼마나 일치하는가? 일치하는 데도 사람들의 비난을 받는가? 사실 현실에 보이는 교회의 모습은 예수의 가르침과 멀어져 있다. 예수처럼 돈을 멀리해야 할 교회가 부동산 투기꾼이 되고, 평화를 나누어야 할 교회가 우크라이나 전쟁에 나가서 죽으면 순교와 같은 효과를 얻어 천국에 간다는 말을 교회의 최고 성직자가 아무런 주저 없이 한다. 사실 그런 말을 소련의 성직자가 처음 한 것은 아니다. 이미 20세기의 세계대전에서 각 국가의 성직자는 군인만이 아니라 비행기와 탱크와 총을 축복하였다. 그리고 중세에도 정치적 권력과 물질적 이익을 위한 전쟁에 나서는 군인들을 기독교 교회가 축복했다. 초대교회에서는 자기와 다른 신앙관을 가진 이들을 이단으로 단죄하고 문자 그대로 죽자고 싸웠다. 이렇게 교회는 다름 아닌 성경 자체에서 찾아볼 수 있는 예수의 모습과 가르침과 멀어지는 역사를 처음부터 걸어왔다. 예수는 과연 교회가 이런 지경에 이를 것을 예견하지 못했는가? 부활하고 승천한 지 이천 년이 지나도록 예수는 왜 재림하지도 않고 침묵하는 것일까? 예수가 사라진 교회가 사람들의 긍정적인 반응을 이끌어내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런 질문을 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다시 예수로 돌아가게 된다. 그러면서 기본적인 질문이 이어지게 된다. 예수는 누구이며 무엇을 가르쳤는가? 그리고 근본적으로 왜 하필 이런 인간의 세상에 와서 그런 가르침을 남겼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지난 이천 년 가까이 인류가 답을 찾았지만, 여전히 완전히 만족한 답은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예수를 대상으로 눈물을 흘리면서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이 세계에 넘쳐난다. 그럼에도 세상의 악만이 아니라 교회 안의 악도 판치고 있다. 모든 사람을 형제자매로 대한 예수의 모범은 잊은 채 교회 안에서 여전히 신자와 성직자 간의 계급이 존재하는 것은 물론이고 성차별을 포함한 인간 차별이 엄연히 존재한다. 교파 간의 증오와 반목은 다른 어떤 집단에 비해서 더 사악한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다. 다름 아닌 사랑의 종교인 기독교 안에서 말이다. 그리고 기독교 신자들의 도덕성이 결코 비기독교인에 비해 우월하지도 모범적이지도 않다. 문제가 있으니 해결해야 하고, 그 해결은 근본으로 돌아가서 찾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 시대 이전의 사람들이 했듯이 다시 이른바 ‘예수 바로 알기 운동’에서 모든 것을 시작해야 한다. 기독교가 문자 그대로 예수 그리스도교이기 때문이다. 예수가 아니었다면 기독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 존재 근거를 이해하는 것에서 출발하면 현재 보이는 기독교의 모순을 극복할 길이 보일 수 있을 것이라는 소박한 희망에서 이 책을 썼다. 물론 예수를 안다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제 너무 불쌍한 존재가 된 예수를 위하여 뭐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기독교에 관한 3부작을 시작해 보았다.

서두에서 말한 대로 교회가 인기를 잃고 있지만 예수는 여전히 많은 이들의 관심의 대상이다. 종교를 떠나서도 예수는 흔히 공자, 부처, 소크라테스, 무함마드와 더불어 인류에게 중요한 가르침을 전해준 인물로 간주된다.


그러나 서양의 역사를 보면 예수는 단순히 인류의 스승 수준의 영향을 넘어서서 삶 자체를 지배해온 존재로 단순히 기독교라는 종교의 교주 이상의 인물이었다.


그런데 막상 이토록 중요한 인물에 대하여 자세히 알고자 하면 먼저 혼란이 일어나게 된다. 그에 관한 자료가 매우 빈약한 것만이 아니라 그 자료의 이해와 해석마저 오랜 세월 동안 성직자들과 신학자들이 독점하여 교파의 이해관계에 따라 자의적으로 이루어져 오기도 하였던 때문이다.

현재 우연히도 기독교 문명국가들이 이른바 선진국이 되어 세계의 정치, 경제, 문화를 지배하다시피 하는 것이 전적으로 기독교 덕분이라는 오해가 널리 퍼져 있다. 그러나 역사를 보면 오히려 그 반대로 서양이 기독교의 영향에서 벗어나면서 문명이 고도로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흔히 기독교가 서양을 지배한 중세시대를 암흑시대로 규정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가 서양에서 완전히 힘을 잃고 서양의 문화가 탈기독교화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해이다. 현재 서양에서는 기독교가 종교에서 문화로 이행하는 단계에 있을 뿐이다. 교회라는 좁은 틀 안에 있던 기독교가 사회의 정신이 되고 있다. 다만 교회가 도그마적으로 예수를 해석하여 제시한 세계관과 인간관이 변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특히 한국과 같이 전적으로 기독교를 수입한 나라에서는 기독교, 그리고 그 종교의 교주인 ‘진짜 예수’에 대한 바른 이해가 매우 절실하다. 기독교를 무조건 배척하는 것은 기독교를 무조건 절대시 하는 것만큼이나 위험한 일이다. 그래서 기독교에 바른 이해의 시작으로 먼저 예수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그러한 이해를 향해 나가는 길의 첫걸음을 이제 내디딘 바이니 더 깊이 나가 볼 생각이다. 이 책 다음으로 나올 제2부에서는 기독교 교회의 역사를 통시적으로 살펴보면서 교회가 어디서부터 잘못 시작했고 어떤 과정을 거쳤으며 그 결과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분석해 보고자 한다. 단순히 교회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잘못을 반성하여 예수의 참모습을 발견하는 여정으로 나가기 위한 일이다.

예수의 참모습을 왜곡하여 예수와 무관한 교리를 만들어 내어 사욕을 취한 유럽 교회의 긴 역사가 마침표를 찍는 21세기에 예수를 다시 보고 그의 언행에서 본질적 가르침을 찾으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이들이 많다. 그럴 수밖에 없는 근본적 이유는 예수가 인간의 근원적인 질문에 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곧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우리는 왜 사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이다. 예수는 이 질문에 대하여 간단명료한 답을 하고 있다. ‘우리는 신이 자기 모습으로 직접 창조한 신과 거의 다름없는 존재로 살아가다가 죽으면 저승에 가서 이 세상에서 했던 생각과 말과 행동에 대한 책임을 지는 방식으로 새로운 삶을 이어간다.’ ‘우리는 신이 원하는 하늘나라가 이루어지는 데 협력하기 위하여 산다.’ ‘그런 신의 뜻에 맞는 방식으로 살아야 한다.’ 이것이 예수가 우리의 질문에 대하여 준 답이다.


근본적인 문제는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의지’와 그 의지대로 한 행동에 대한 ‘책임’, 그리고 신이 원하는 ‘하늘나라’에 대한 다양한 해석의 차이에서 발생한다. 예수의 가르침을 직접 받고 예수와 직접 이야기를 나누고 부활한 예수를 직접 만난 이들조차 예수의 본질에 대하여 의견 대립이 있었던 것을 고려하면 이런 차이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런 의견의 차이가 파벌을 낳고 파벌이 분열을 낳고 분열이 투쟁과 살육을 낳은 유럽 기독교의 역사를 보면 그저 당연한 일로 치부할 수는 없다. 그래서 이제라도 예수가 추호도 바라지 않은 분열과 갈등을 극복하는 길을 나서야 한다. 그러한 길을 나서는 데 가장 먼저 할 일이 과연 예수는 누구이고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를 정확히 하는 일이다. 교회가 그런 예수를 두고 저지른 잘못을 살펴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 삶을 살도록 해야 한다. 이 삼부작은 바로 그런 뜻에서 시작하였다. 그런 뜻에 과연 이 책이 부합하는지는 독자의 판단에 맡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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