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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 장윤석 May 31. 2024

우리는 즐겁다, 그러나, 그럼에도.

2024.5.30 청년기후긴급행동 대법원 전원합의체 상고심 원심파기선고!

1.


2024년 5월 30일 청년기후긴급행동의 대법원 전원합의체 심리 상고심에서 원심파기환송 선고가 내려졌다. 2021년 2월 18일 베트남에 붕앙-2 석탄발전소를 수출하는 두산중공업을 비판하는 직접행동 이후에, 자그마치 삼 년의 시간이 흘러왔다.      


법정의 색깔은 무채색이다. 차가운 시멘트로 지어진 법정에 들어서면 높은 자리에 있는 판사와 무장한 경호원들이 아래의 사람들을 위축시킨다. 그 공기는 냄새도 색깔도 내가 익히 아는 공기와는 사뭇 다르다. 돌아보면 몇 년간 그 무거운 공기에 적잖이 위축되어 있었던 것 같다.      


나는 내가 증인으로 출석한 첫 번째 형사재판이 가슴에 크게 남았다. 친환경 수성 스프레이를 준비했고, 재물손괴의 의도가 없었으며, 기후위기 시대에 짓겠다는 마지막 석탄발전소를 반대한다는 의사를 전하는 시위였을 뿐이라고 증언했다. 증언을 기다리는 대기실에서 검사 측 증인으로 온 두산 관계자들이 쑥덕거리며 입을 맞췄다. 선고일 판사는 건조하고 차갑게 판결문을 읽어나갔다. 행위의 사유와 정당성이 무엇이든… 엄정한 법정 질서에 따라… 뉘우침이 없는 피고에게… 형을 선고한다…      


그렇게 흘러 흘러 대법원까지 왔다. 항소를 하고 형사 2심 재판을 치르고 똑같이 차가운 판결문을 받고 다시 상고를 하고. 그 시간 가운데 두산이 1840만 원의 손배를 청구하는 민사소송을 걸었고 청구를 기각하는 이례적인 판결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이제 남은 재판은 대법원 3심뿐이다.    

  

대법원 앞에는 곳곳에서 모인 사람들, 우리들이 있었다. 가는 길에 초조함이 있었지만 이를 넘어서는 반가움도 함께했다. 어제 공가에서 같이 밤새 준비하다가 환복 한다고 갔던 은빈이는 즐겁다 티셔츠를 입고 왔다. 헉, 헛웃음이 나왔다. 조금 후에도 우리가 즐거울까? 생각보다 법정은 작았다. 억울함과 한을 안고 여기까지 왔을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앉아 있었다. 그리고 유달리 높이 앉아 있는 판사들의 정나미 없는 선고들이 공장처럼 반복되었다. 재판번호 2050아 1234 상고를 기각합니다, 하고. 그렇게 몇십 건의 갈등과 쟁의 혹은 염원이 기각되었다. 그렇게 버리지도 간수하지도 못한 작은 희망 내지 기대를 놓아버릴까 말까 갈팡질팡할 무렵...  

   

재판번호 2023도 5885 피고 강은빈 이은호, 원심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수원지방법원에 환송한다. 하고 판사의 선명한 목소리가 울렸다. 탄식과 박수가 터져 나왔고 정숙하라는 말이 이어져 소리 없이 모두가 웃었다. 아니 울었다. 재판의 처음부타 변호인으로 함께해 온 치선님과 보미님이 잠시 서로를 쳐다보시고는 소리 없이 우셨다. 보고 있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마음에서 한 하나가 풀리는 것 같았다.     

 

그것이 풀리자마자 기쁨이 밀려왔다. 즐겁다 티셔츠는 선견지명이었을까. 수고했다고 감사했다고 말들을 전하고 나누며 활동하면서 이런 날이 또 있을까 하고 생각했다. 희보보다 비보가 많기 마련이니까. 한 몸치인데 뭔가 춤을 추고 싶은 마음을 감추기 어려웠다.     


 

2.      


대법원 전원합의체 심리에 사건이 올라갈 때부터 심상치 않았던 것은 맞다. 대법원 전원합의체 심리가 되려면 중대한 공공의 이해관계와 국민적 관심도가 매우 높은 사건 등 중차대한 사유가 있어야 하므로 이례적이고 고무적인 경과다. 긴급행동의 재판을 중차대한 재판으로 만든 것에는 무엇이, 그리고 어떤 과정이 있었을까. 박태현 교수님의 의견서, 법조인 100여 명의 서명을 받아 제출한 것도 보기 드문 일이었을 것이고. 삼 년간 재판을 치러오며 함께한 수많은 시민들과 동료들의 연대도 적잖은 영향을 줬을 것이다.      


이번 재판에서 대법원은 ‘재물손괴 여부’를 쟁점으로 삼았다. 1) 조형물의 용도와 기능, 2) 피고인들 행위의 동기와 경위, 수단, 내용, 3) 이에 따른 위 조형물의 용도와 기능 및 미관을 해치는 정도와 그 시간적 계속성, 4) 원상회복의 난이도와 비용, 5) 위 조형물 이용자들이 느끼는 불쾌감과 저항감 등을 이유로, 재물손괴에 해당하는 효용을 해하였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아래 판결문 일부를 인용해 본다.      


“[2. 대법원의 판단 4]] 피고인들은 기후위기를 알리는 표현의 수단으로 이 사건 조형물에 수성 스프레이를 분사한 직후 바로 세척하는 행위를 하였다. 여기에 형법상 재물손괴죄를 쉽게 인정한다면 표현의 자유를 억누르게 될 위험이 있으므로, 민사상 손해배상으로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하고(심지어 이 사건에서 두산중공업은 스프레이 잔존물 등으로 인한 미관상 이유로 이 사건 조형물을 교체하였다고 주장하면서, 피고인들을 상대로 불법행위에 기한 손해배상청구의 소를 제기하여 이 사건 조형물 교체비용 상당 금원의 지급을 구하였으나, 수원지방법원 성남지원은 2023. 5. 3. 이 사건 조형물의 수리 또는 원상회복이 불가능하거나 그 비용이 과다한 경우임을 인정할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두산중공업의 청구를 기각하는 판결을 선거하였고, 위 판결은 그대로 확정되었다), 재물손괴죄를 쉽게 인정할 것이 아니다.”       


괄호의 ‘심지어’에서 묘한 감정선이 느껴지는 것은 기분 탓일까. 긴급행동이 치른 민사재판의 승소(청구 기각)가 판단의 주요한 근거가 되어있다. 그렇게 대법원은 주문을 내린다.      


“[3. 파기의 범위] 위에서 본 이유로 원심판결 중 재물손괴 부분은 파기되어야 하는데, 이 부분은 유죄로 인정된 나머지 부분과 형법 제37조 전단의 경합범 관계에 있어 하나의 형이 선고되었으므로 결국 원심판결은 전부 파기되어야 한다.”      


전부 파기되어야 한다는 문장이 입가에 미소를 띄운다. 요약하면 미관을 해치는 정도도 아니고, 바로 지우기까지 했는데 이를 처벌하면 표현의 자유가 과도하게 침해되니 재물손괴가 아니라는 판단이다. 그리고 이를 더 넓게 해석하면 해당 사건에서 기업의 재산권보다 표현의 자유가 더 중하다는 판단으로 볼 수도 있겠다. 어찌 되었든 기후불복종, 직접행동에 있어서 큰 걸림돌 하나를 치웠다.    

  

물론 아쉬움은 남는다. 정당행위 여부와 긴급피단 성립요건, 즉 ‘환경활동가들의 집회 시위에 대한 정당행위 내지 긴급피난 인정 여부’는 이번 재판에서 쟁점이 되지 못했다. 재작년 녹색당에서의 포스코 재판 형사 1심 판결에서는 기후위기 심화와 생태학살 책임을 묻는 직접행동 목적의 정당성이 일부 인정되어 감형이 선고되기도 했으니, 이 부분은 계속 논의를 만들어가야 할 지점이겠다. 지금 헌법재판소에서 심리되고 있는 기후위기 헌법소원에 전향적인 판결이 이뤄지기를 기대해 본다.      


사법부의 과정을 몇 년 살펴보면서, 그리고 여러 차례 판결문을 읽으면서 정말 보수적인 동네라는 건 계속해서 느낀다. 하지만 동시에 사람이 하는 일인지라 감정적일 수밖에 없구나 싶은 지점도 여럿이다. 확언할 수는 없지만, 언젠가 피고가 최후진술문을 읽을 때 판사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만 같았다. 기후위기에 관해 제작한 영상을 틀 때 재판장이 술렁였다는 이야기도 기억이 나고. 즉 기사 하나, 피켓 하나, 연대 한 명, 정책 하나가 직간접적인 관계를 만들어간다. 1+1=2 식의 바로 즉시 무언가가 이뤄지지는 절대 않고, 그 변화의 정도는 너무나도 미비해 때로는 없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우리는 분명히 무언가를 만들어가고 있다.    

    

마지막으로 긴급행동의 기자회견문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앞으로도 더 나은 지구를 상상하고 실천하는 생태정치공동체를 일구어 나갈 것이다. 계속해서 세상과 불화하며, 기후위기 시대의 아픔을 엮어 공동의 해방을 모색해 나가고자 한다. 바로, 지금, 여기에서부터 우리는 우리가 살아갈 삶을 일구어 나갈 것이다.” 계속해서 세상과 불화한다는 말이, 우리의 삶을 일구어 갈 것이라는 말이 오묘하게 남는다.       


    

3.      


여하튼, 하여튼. 긴급행동의 재판이 시작될 무렵 창간된 <바람과 물> 1호에 실었던 글 하나가 기억난다. ‘마지막 석탄발전소를 막는 마음’이라고 제목을 지었고, ‘그들의 마지막 석탄발전소’로 제목을 올렸다. 그 글에서 재판을 시작하면서 있던 한과 각오를 담아 이렇게 썼었다. “누가 죄를 지었는지는 가봐야 알 일이다. 반성을 모르는 이들은 법정에서 보자. 나날이 무너져가는 세상에서 시간은 슬프게도 우리의 편이다. 현행 법과 제도가 지금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부족하다면, 해야 할 것은 미래를 내다보고 그 시점을 끌어오는 일이다. 입으로 위기를 말하며 학살을 이어간 이들에게 죄를 물을 것이다.” 이제 곧 3년을 약속했던 <바람과 물>의 12호가 나온다. 그 마지막 호에 지난 시간들의 결과로 좋은 소식을 올릴 수 있어 감회가 깊다.     

  

이 재판으로 내 학위 논문의 결론이 바뀔 것 같다. 내용보다 태도가 바뀔 것 같다. 생태학살, 에코사이드 이야기는 거진 오 년이 돼 가도록 내게 계속되고 있다. 나는 늘 이 비극을 다루는 과정과 방식과 태도와 맥락에서 혼란을 겪어왔다. 그래서 이 주제에 대해서 계속 생각해 왔지만 어느 글도 제대로 말끔하게 적어내지 못한 것 같다.        


선고가 내려지고 잘 살아야겠다, 하는 생각이 정말 강하게 온몸을 휘감았다. 요새 내가 역사에 대한 믿음이 없었구나 하는 생각을 계속하게 된다. 마음이 조급하니까 장시안적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어려웠던 건 아닐까. 그렇다면 마음을 크고 넓고 깊게 닦으면 내가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것도 따라서 커지지 않을까. 적어도 내가 나를 믿고 곁을 믿으면, 지금보다는 좀 더 기운찬 일상을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4.       


이 보기 드문 경사에 곳곳에서 축하한다는 말들이 날아왔다. 축하드려요. 축하합니다. 하는 말들은 들어도 아무래도 낯설었다. 서클댄스를 추고 싶은 마음이 차차 사그라들고, 축하받아도 되는 걸까? 하는 마음이 이어서 진다. 재판이 시작되었던 계기인 붕앙-2 석탄발전소는 계속 지어지고 있다. 상업운전에 들어선다는 2025년은 그 당시에는 멀어 보였지만 이제 일 년 남았다. 설령 환송된 재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는다고 해도 달라지지 않는다. 그런데 기뻐해도 되는 걸까.      


아주 공교롭게도 한날한시에 같이 재판을 이어가고 있는 가덕도와 새만금에 대한 비보가 흘러왔다. 감사와 적정성 검토 연구용역. 환경영향평가가 끝나지 않았는데, 국가교통부가 새만금 신공항 사업을 재개하며 사업자 선정 착수에 들어갔다. 부산에서는 하루 앞두고 날치기로 가덕도신공항건설공단 출범식이 공시됐다. 신공항의 명분이었던 2030 엑스포가 실패로 돌아갔고, 새만금 잼버리가 파행으로 끝났는데도 사업들은 어물쩡 계속된다. 그렇게 생태학살은 천천히 빚어진다. 축하를 건넸던 동지들은 다시 불협화음이 가득한 비극제작소로 돌아가 살얼음판을 걷고 있다. 축하를 받아도 되는걸까.     


아무래도 세상은 잔혹하다. 꿈에서 깨면 천마야차가 날뛰는 것만 같다. 불합리하고 부당하며 부조리하다. 많아도 너무 많다. 하나인 몸맘을 각종 비극 곁으로 보내다가 터져버리기 일쑤다. 살아있는 우리는 살아가야 한다. 아마도 첫 직접행동을 가던 날, 나는 이 비극을 어떻게 마주해야 하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그저 곁에 있는 이들을 따라 발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물론 지금도 모른다. 잠깐만 마음의 끈을 놓아버리면 그 괴로움의 굴레에 놓여버리고 만다. 그래서 더욱, 선고가 내려지던 아주 기쁜 순간에 웃음과 울음이 공존했다는 걸 기억하고 싶다. 역으로 아주 슬픈 순간에도 울음과 웃음이 공존해야 하는 게 아닐까. 우리 시대의 표정은 아이러니 하게도 양면적이고 양극적일 수밖에 없다고 본다.      


저번에 대학원 동기들과 술자리에서 미얀마에서 온 오마Ohmar가 말을 건넸다. 윤석아 좀 웃어. 너무 슬픔에 깊이 빠져서 표정을 망치지 마. 나는 쿠데타 이후에 매일매일이 너무 슬퍼서 거기에 잠겨있다가 무언가를 잃어버린 것 같아. 하지만 우리는 웃어야 해. 울기만 해서는 안 돼. 그 말 들으면서 같이 울었다. 오마는 희망없음hopeless의 마음이 너무 어렵다고 말하면서도 오늘은 재판 이긴 거 너무 축하한다고 말을 건네줬다. 동기들이 건네는 그 말이 너무 귀하게 느껴졌다.      


우리는 순간에 충만해야 한다. 충분히 기뻐하고 축하해야, 충분히 슬퍼하고 위로할 수 있다. 그 즐거움을 충분히 누리자. 그러고 나서 슬퍼하자. 충분히 깊게 즐거워하고, 충분히 깊게 애도하고, 충분히 힘들여 사랑하고, 충분히 맺을 때 우리는 현재를 살아갈 수 있다. 과거를 기억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일은, 오직 그 즐거웁고 슬피웁게 현재를 살아갈 때만 비로소 가능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했다.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히 집중하여 모든 순간에 있지는 못했다. 사람은 그럴 수 없다. 따라서 기억이라는 것은 서로의 기억 조각들이 모여서 그 조각들의 관계로 구성된다. 단일한 민족과 역사가 있을 수 없는 것처럼, 우리의 기억과 역사가 공동체적 구성물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살펴야 한다고 본다. 정말 네가 있어서 할 수 있었다. 너희가 있어서 할 수 있었다. 그 덕에 여기까지 왔다. 그렇게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너에 대한 믿음이, 우리에 대한 믿음이 되고, 우리는 그 힘으로 꿈꾸고 나아갈 수 있는 게 아닐까.        

 

왜인지 모르게 장필순 씨의 ‘사랑해 봐도’ 가사가 마음에 와닿았다. “이 세상 살다 보면 우리는 만나고 또 헤어지고. 그 속에서 울고 웃고 후회하는 일도 많아. 세월만 흘러가네.” 세월 안에서 울고 웃는 것이 공존하는 방식과 모양에 대해서 생각하고 싶다. 우리는 즐겁다, 하는 티셔츠 문구 다음에 '그러나'를 썼다가 '그럼에도'로 고쳐 쓴다.


정성과 평화 담아

윤석 성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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