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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 장윤석 Oct 23. 2024

어느 환대의 기억(상)

산세바스티안 2024.9.12

순과 유자차와 단호박마차를 마시다가 환대에 꽂혀버렸다. 언제부터였는지는 가물가물하지만 환대라는 말을 들으면 가슴이 뛰었다. 우리에게, 이 시대에 가장 중요한 무언가를 담고있는 듯 하여. 생각하니 환대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 더할나위 없이 귀한 사람들이었다. 환대라는 말이 담고 있는 어떤 따뜻함이 있는 것 같다. 그 색온도에 끌린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풍경들을 나는 사랑했던 것 같고, 나도 그런 풍경들을 만들어가고 싶었던 것 같고. 어쩌면 환대는 우리가 잃어버린 것 중 가장 큰 무언가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잃어버린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고 할 때 가장 크고 깊은 것. 한국 사회의 모든 문제는 압축적으로는 성장, 상징적으로는 '빨리빨리' 속에 담기는 것 같은데, 환대라는 것은 여유라는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이라, 이 빠른 속도의 사회는 환대를 잃어버리기에 너무 충분한 것이 아닐까. 그러면서도 오지랖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하는 우리 사회의 어떤 잃어버린 가능성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된다. 또한, 그럼에도 환대를 말하고 발굴하는 새로운 세대 - 환대의 풍경을 드물게 경험했을테지만, 그 갈망이 가득한 - 가 나타나는 것을 보면 잃어버렸고 아니고를 말하는 것은 섣부르겠다.          


꼭 한 달 전 겪었던 환대의 기억으로 떠나보자. 스페인 바스크의 북쪽 길을 지나가다 만난 나오미와 일키야 그리고 그 공동체의 여러 존재들. 그들이 내어준 환대의 품 속에서 하루 내내 웃고 웃었더니 어느새 마음이 충만해져 있었다. 그러니까 바다를 따라 걷고 있었다. 바닷바람이 세찼지만 아침에 끓여먹은 우동 덕인지 온 몸에 힘이 감돌았다. 하루의 아침을 요가와 명상으로 시작하면 그렇게 개운할 수가 없다. 오래토록 몸에 배이게 해 지니고 싶은 습관이다. 


사과를 먹다가 다가온 작은 새에게 사과를 나눠줬던 기억, 번개에 맞았는지 풍랑에 쓰러졌는지 몸통이 꺾였지만 그럼에도 살아남아 자라난 어느 소나무가 생각난다. 그렇게 계속 걸어갔다. 얼마 흐르지 않아 갈림길이 나왔다. 한 길은 오래된 험하고 먼 길이고, 다른 길은 새로 만들어진 말끔하고 가까운 길이었다. 나는 이런 상황이 오면 대게 험난한 길을 고르는 것 같다. 그러게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험한 길을 고르는 편이다. 풍경이 아름답다면 늦어도 돌아간달까. 다행히 이번에는 현명한 수를 건네받아 말끔하고 가까운 길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곳에 도착했다.


넓고 잘 가꿔진 정원 사이로 빵 냄새를 풍기는 집이 있었다. 그 집의 이름은 옐로 델리 Yellow Deli, 열두 부족 Tweleve Tribes이라는 초기 기독 신앙을 이어가는 공동체 마을 중 한 집이었다. 그 집에는 가격표가 없었다. 한 해맑은 할아버지가 걸어나오더니 어서오게 배고프니 목마르니 하고 친절하게 말을 건넸다. 그리고는 콧노래를 부르며 커피 한 잔 빵 하나를 쟁반에 담아 내왔다. 비가 내리다 말다 하는 날씨 사이로, 햇살이 비추는 정원이 너무나 아름다워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커피도 좋았지만 빵이 기가 막혔다. 직접 구웠다고 했다. 그리고 이 공간에 대한 그의 아름다운 설명을 들었다. 많은 종교와 공동체와 사회가 초심을 잃어버린 것 같다고, 우리는 사랑과 환대를 복원한 삶을 살아가고자 한다고, 이렇게 손님을 맞을 수 있어서 감사하다고. 그 말들을 들으면서 내가 오랫동안 찾아다녔던 환대의 공간에 도착했다는 것을 알았다. 갈길이 태산이었지만, 우리는 발길을 멈추고 그 공간에 머물기로 했다. 실은 나는 들어올 때부터 그럴 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후편에서 계속)

 

“바로 그 말입니다. 환대(歡待)라는 것이야말로 올바른 의미에서의 공동체 삶, 즉 좋은 사회에 수반하는 조건인 것이지요. 그리고 지금에 와서는 그것은 공동체적 삶, 즉 올바른 의미의 정치의 출발점이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환대가 있기 위해서는 내가 당신을 맞아들일 수 있는 문지방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중략) 내 생각으로는, 우리의 희망이 달려있는 한가지 단어를 골라야 한다면 그것은 환대라는 말이 될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는 문지방과 테이블과 참을성, 그리고 귀기울여 듣는 습관을 회복하면서 환대의 관습을 부활하여, 거기로부터 덕성과 우정의 묘판을 만들어내고, 다른 한편으로는 공동체의 재생(再生)을 향하여 빛을 발산하게 될 희망 말입니다(이반 일리치, 1996, 우정에 대하여, 녹색평론 1997)." 


"가족공동체가 열린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소수자에 대한 돌봄과 이방인에 대한 환대가 함께 이루어질 때 가능하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돌봄과 환대는 거실에서 보통 이루어집니다. 사실 가족공동체가 외부로부터 문을 닫고 이기적인 집단으로 나타나는 이유는, 그 내부에 있는 소수자에 대해서 돌봄과 정동, 사랑으로 대하는지, 그 외부에 있는 이방인에 대해서 우정과 환대로 대했는지가 결정적입니다. 돌봄과 환대라는 이러한 두 가지 태도가 교차하면서 직접적으로 나타나는 공간이 바로 거실인 점에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가정을 열린 공동체로 만들려는 노력은 거실을 어떻게 돌봄과 환대의 공간으로 연출할 것인가에 달려있다고 해도 무방합니다(신승철, 2017, 저성장 시대의 행복사회, 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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