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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 장윤석 Nov 28. 2018

3호선에서 있었던 일

나 하나 살기 벅찬 세상이지만 그래도 함께 살아가요오

  나는 지하철을 타는 게 무섭다. 지하철은 날 것 그대로의 우리 사회를 보여준다. 지하철에 탐으로써 마주하게 되는 시련들이 버겁다. 술 취해 주정 부리는 행인, 큰 소리로 설교를 늘어놓는 해병대 할아버지, 임산부 보호석에 떡하니 앉아있는 사람들 모두 버겁기만 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버거운 것은 사람들의 표정이다. 어째 웃고 있는 사람 하나 없을까. 사람들의 얼굴에서는 피곤이 묻어난다. 단지 보기만 했을 뿐인데 그 피곤함이 스물스물 기어와 전염병처럼 달라붙는다. 하나같이 스마트폰을 들고 이어폰을 꼽은 채 아무 표정 없이 덜컹덜컹 실려가는 광경은 이상하게 보기 힘들다.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졌다마는 가끔 그 익숙함에서 깨어 주위를 둘러보면 무척이나 기이하게 느껴진다.


지하철의 색을 고르라면 나는 조금의 주저함 없이 회색을 고르겠다. 음침한 지하에 개미굴처럼 복잡한 통로. 어딜 둘러봐도 회색뿐이다. 나는 알록달록한 사람들의 옷차림과 대비되어 짙은 무채색을 본다.


충무로에서 대행 3호선에 탔다. 여느 사람들처럼 스마트폰을 잡은 채 덜컹덜컹 실려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말소리가 들려 옆을 쳐다보았다. 할머님 한 분이 잔뜩 만취한 양복 차림의 청년에게 말을 걸고 계셨다. 청년은 겉보기에 퍽 신입사원으로 아마 회식자리에서 잔뜩 마신 모양이었다. 할머님은 청년의 어깨를 토닥이며 "문에 기대면 위험혀"하고 저쪽의 빈자리에 앉히려 하셨다. 문이 열리면 취한 청년이 넘어져 다칠까 염려하신 모양이었다. 청년은 눈도 뜨지 못하고 뻐끔거리는 입술로 "괜찮아오"를 힘겹게 반복했다. 보다 못한 승객 한 분이 자리를 양보했고 할머님은 청년을 부축해 자리에 앉혔다.

  

문제는 여기서 터졌다. 실제로 뭐가 터졌다. 청년의 바지에서 무언가 터졌다. 재난이 시작되었다. 청년에게 눈짓 한 번 주지 않던 옆옆의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얼핏 보기에 물똥처럼 보이는 갈색의 액체로 인해 일대에는 순식간에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이 퍼져나갔다. 십여 초의 시간이 흐르고 할머님이 허리춤의 가방에서 주섬주섬 손수건을 꺼내 들어 자리를 닦기 시작한 뒤에야 그 정체불명의 액는 커피우유였음이 밝혀졌다. 청년이 쓰러지듯 앉으며 깔아 모양이었다. 홀로 외로운 청소를 하는 할머님 주위로 사람들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곁눈질만 보내고 있었다. 혼란이 왔다. 머릿속에서 악마가 속삭였다. "그냥 없던 일처럼 네 갈 길 가. 그럼 편하잖아. 너 아니라도 누가 치우겠지. 사람들 다 쳐다보는데 움직이기도 그렇고. 휴지도 없으니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던 찰나, 칸 끝에서 한 여성분이 휴지를 들고 이쪽으로 뛰어오셨다.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휴지를 나눠 들고 바닥에 흘린 커피우유를 닦았다. 할머님, 나, 휴지를 들고 오신 여성 분 이렇게 세 명이서 마냥 외롭지는 않은 청소를 마쳤다. 커피우유가 밴 시트 자리에는 공책을 찢어 '앉지 마시오'라 써서 올려놓았다. 그렇게 재난을 해결했다.


늦은 밤 서울의 지하철이 그렇듯 자리는 다 차고 반 정도의 사람들은 서 있었지만, 청년의 커피우유 덕에 일대의 자리는 텅텅 비었다. 덕분에 할머님과 나는 단둘이 나란히 자리에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람들은 같은 지하철에 탄 사람이 어찌 되는지는 관심 없지만 자기에게 닥쳐오는 커피우유에는 예민하다. 스마트폰과 이어폰 때문인지 언제부턴가 사람들은 더 이상 서로에게 말을 걸지 않았고 아주 가끔 길을 물어오는 외국인을 빼놓고는 지하철에서 말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그래서인지 할머님과 내가 낸 말소리는 애틋하게만 느껴졌다. 별 이야기를 하진 않았다. 그냥 펑퍼짐한 평범한 이야기였다.


"할머님, 수고하셨어요. 할머니가 아니셨더라면 아무도 나서지 않았을 거예요."
"에고, 내가 하긴 뭘 해. 저 청년은 집에 잘 들어갔으려나. 아까 보니까 아무 역이나 얼떨결에 내린 것 같더만..."


할머님이 내리실 때까지 평범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사뭇 이상한 광경처럼 보였을 것 같다. 이상할 것 하나 없는데 이상하게 보였을 것 같다. 이상한 세상이니까. 그래서 이상하게도 기분이 좋아졌다. 적막을 부수어낸 하나의 파을 만들어낸 것 같았다. 지하철은 서울의 축소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옆의 누군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조금도 괘념치 않고 제 갈 길을 다. 다소 무정하게도 보이고, 이렇게 개인화되고 파편화되면 우리 사회는 어떻게 될까 싶어 한숨이 푹 쉬어지기도 한다. 그래도 괜찮다. 가끔은, 아주 가끔은 허리춤에서 손수건을 꺼내 들고 먼발치에서 휴지를 들고 뛰어오는 따뜻한 사람들이 있으니까. 이런 사람들이 있으니까 세상은 한 발자국이나마 나아갈 수 있는 거겠지. 미소를 짓다가 메모장을 꺼내 적었다.

'휴지를 가지고 다녀야겠다. 손수건이나. 나 하나 살기 벅찬 세상이지만 누군가를 위한 여유를 품어두고 사는 건 너무 좋은 일이니까.'  - 2018.11.27  


커피우유 젖음, 앉지 마시오

 

 좌혜선 작가의 그림이 떠올랐다. 짙은 무채색 사이에 톡하고 나타난 따뜻한 기운이 그랬다 / 좌혜선 <밤,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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