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호선에서 있었던 일' 그 다음 이야기
가방 문 열리셨어요!
조금의 부끄러움을 잠시 내려놓은 후 앞에 계신 여성분의 어깨를 톡 건드렸다.
"아.. 저기요"
"네?"
"가방 문 열리셨어요"
"아!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자초지종은 이렇다. 버스를 타려고 정류장에 갔는데 앞에 계신 여성분 가방이 헤벌쭉 입을 벌리고 있지 뭔가. 내용물이 떨어질락말락 하고 있어 말해드려야 할 것 같은데 망설여졌다. 공연스레 든 걱정 때문이다. 혹시 낯선 이가 말 거는 걸 불편해하면 어떡하지? 차가운 목소리로 '제가 알아서 할게요'하고 툭 내뱉으면 어떡하지? 막상 용기 내 말해드리자 이 걱정은 말 그대로 '괜한' 걱정이었던 것으로 판별났다. 보다시피 감사하단 말만 들었을 뿐이다.
소심한 성격 탓인지 서울 생활을 하며 이리저리 데인 탓인지 낯선 사람에게 말을 걸기를 참 어려워한다. 게다가 언젠가부터 서로에게 말을 걸지 않기로 하는 법이 공포된 것마냥 쌀쌀맞은 분위기가 자리잡았으니 말이다. 지하철과 버스에 자리 잡은 '보이지 않는 벽'부터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의 침묵까지. 우리는 외로운 사회를 살고 있다.
꼭 한 주 전이었다. 3호선에서 있었던 일이다. 돌아가는 귀갓길 만취한 청년 하나가 위태롭게 지하철에 올랐고 한 할머님께서 염려되셨는지 청년을 부축하셨다. 그러다 청년의 바지에서 커피우유가 터져 일대에는 순식간에 혼란이 퍼져나갔다. 모두 자리를 피해 이동할 때 할머님은 손수건을 꺼내 홀로 바닥을 닦으셨고, 칸 끝에서 휴지를 들고 뛰어오신 여성분과 나도 함께 가세해 청소를 마쳤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할머님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눈 게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이 따뜻한 이야기를 글로 옮겨 보았다.
https://brunch.co.kr/@noma1030/49
그간 브런치에 끄적거린 글을 올렸을 때 퍽 반향이 없었는데 이 글은 사람들에게 와 닿았는지 그야말로 '대박'이 났다. 팔만 명이나 되는 분이 읽어주셨고 좋아요와 따뜻한 댓글도 많이 남겨주셨다. 그간 우리 사회를 외롭고 차가운 곳으로만 여겼는데 마냥 그렇지만은 않은 것으로 생각이 바뀌었다.
확실한 벅참이 일었는데, 이 황량한 얼음도시 서울에서 나 혼자만 시려웠던 게 아니구나 싶어 그랬다. 우리 다 사람인지라 따스한 온정에 목말라 있던 것이다. 눈물겹게도.
댓글에 일일이 답을 달면서 홀로 벅찬 맹세를 했다. 부끄러운 글쓴이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따뜻한 사람이 되어야겠다. 톨스토이의 단편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사랑이 있는 곳에 신도 있다」가 생각났다. 우리가 왜 이 세상에 태어나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 톨스토이는 신의 뜻을 따라서, 즉 굶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고 헐벗은 자에게 입을 것을 주는 삶을 살아가라 말한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간단명료한 가르침이다.
난 굉장히 어렵고도 벅찬 기로에 서 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게 거창한 철학적 대안과 정책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거창한 이념에 갇혀 사회의 냉기를 조소하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사회망 곳곳에서 따스한 온기를 피워내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고작 흘린 커피우유를 닦는 것밖에, 가방 문 열렸다고 말해주는 것밖에 내가 한 건 없지만, 이 이야기가 글을 타고 퍼져나가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온기를 지펴냈다면 나는 조금이나마 세상을 변화시켜낸 게 아닐까.
벅차다는 말밖에 못 하겠다. 외로운 실천 하나가 곳곳으로 퍼져나가 언젠가는 우리 사회를 따스하다 부를 수 있을테다. 세상이 끝내 변화하리란 걸 이제야 믿기 시작했다. 박노해 시인의 '사람만이 희망이다', 그 말이 꼭 맞다. 우리 주위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리고 이 글을 읽고 있을 여러분이 희망이다. 함께 온기를 지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