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일기
얼마 전 하지가 지났다.
감자가 가장 맛있다는 '하지'.
아침 출근길에 보니 예의 그분께서 올해도 감자를 보내오셨다.
저녁에는 파근파근한 감자를 먹겠구나.
일전에 보내 주셨을 때 감사의 뜻으로 담아 둔 글을 다시 꺼내어 본다.
요 며칠 전, 회사에서 저를 '삼춘'이라고 부르는 여직원에게 아침 인사를 하느라고 그 친구 자리에 간 적이 있습니다.
그 친구는 성격이 야무지고 꼼꼼한 편인데 요새 털실 인형을 만드느라 한창 재미를 붙인 중입니다.
자기 혼자만 만드는 게 아니라, 바로 옆 직원에게도 털실로 니트 만드는 것을 알려줘서 옆 직원은 돌이 막 지난 아기에게 턱받이 같은 걸 만들어 줄 정도가 되었어요.
점심 때에도 이따금 보게 되면 일찍 식사를 마치고 둘이 머리를 맞대고 앉아서 인형이며 니트 조각을 만드는 모양이 무척 보기 좋았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 얼마나 흐뭇한지 모릅니다.
인사 담당자로서 사명이 팍팍 느껴지는 때입니다.
지난 월요일에도 주말 동안에 얼마나 만들었나 궁금해서 가 보았더니 인형 몸통을 만든 것을 보여 주며
"삼춘, 이뿌지?^^"하며 정답게 물어봅니다.
그럴 때에는, 실제로 꼭 받겠다는 뜻은 아니지만 "나도, 만들어줄거지?^^" 이렇게 한번 건네죠...
그럼 대답은 "웅,웅"
메신저에서 'ㅇㅇ'하는 게 성의 없다며 우리끼리는 '웅웅'이나 '붕붕'이라고 하자는 친구입니다.
사실, 전에 코바늘로 컵 받침을 만들어 준 게 있는데 정말 예쁘게 잘 만들었어요...
情을 담은 말들은 하루를 즐겁게 합니다.
아침 인사를 나눈 뒤, 자리로 오려는데 이번에는 삶은 밤을 하나 건네 줍니다.
덩치가 큰 밤인 걸 보니 아마 '공주밤'인 모양입니다.
제가 살던 시골에는 커다란 공주밤은 드물었고 보통 엄지 손가락 한 마디 만한 '산밤'이 많았어요..
그리고, 오늘 곶감을 보내 온 동생네에는 '꼬소밤'이라는 엄지 손톱 크기 만한 밤이 있었어요.
-'꼬소밤'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기회가 닿으면 한번 하려고 해요.-
그러다 보니, 서울 와서 알게 된 '공주밤'을 볼 때에는 크기가 너무 엉뚱해서 그만 웃음이 나와 버렸죠...^^
아무튼, 그 밤을 책상 모니터 밑에 올려 두고 정신 없는 월요일을 보내고 나니-다들 느낌, 아시죠?- 어느 새 하루 해가 저물었습니다.
삶은 밤이 말라서 그냥 먹으면 그다지 맛이 없을 것 같아 저는 며칠 더 말려서 '밤쌀'을 만들기로 했어요..
밤쌀을 아시나요?
밤쌀은 삶은 밤을 말려서 며칠이나 햇볕에 잘 말린 후에 나중에 껍데기를 깨고 보늬(속껍질)를 벗겨낸 밤을 말해요.
저 또한, 시골 전학 간 뒤에 얼마간이나 지난 후에야 그 존재를 알게 되었는데요.
이 역시 저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던 S형을 통해서였습니다.
버섯 말리는 망태기 위에 삶은 밤을 며칠이나 말린 게 있어서 그게 무어냐고 물었는데 S형은 대답 대신에 몇 개 집어 들더니 망치로 깨서 안에 들어 있는 밤을 저에게 주는 거였습니다.
입 안에 넣고 깨물어 보라는 얘기에 꽉 깨물었는데 어이쿠, 돌덩어리 같이 딱딱합니다.
히히히, 웃는 형의 모습에 제가 또 당했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S형은 가끔 그런 식의 장난을 쳤습니다.
그래도 천성은 정말 따뜻하고 착한 형입니다.
배를 잡고 웃던 S형이 저에게 이번에는 제대로 알려 줬습니다.
깨물지 말고, 입 안에 넣고 잠시 기다리라고요.
잠시 기다리면 그 밤이 부드러워진다고 합니다.
아, 정말 말대로 기다리니 조금씩 부드러워지고 혀 끝에 달달함이 전해져 왔습니다.
이제야 아는 사실이지만, '아밀라아제?'던가요?
그것 덕분에 녹말이 분해되어 포도당이 되었던 과정이었겠죠?^^
아무튼, 회사 조카 덕분에 '밤쌀' 한 톨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한 열흘쯤 말리고 나니 껍데기가 그냥 바스러집니다.
햇볕에 직접 말린 것은 아니지만 보늬를 벗겨내니 제법 밤쌀 테가 느껴졌습니다.
바사삭 부셔진 밤쌀 한 조각을 혓바닥 위에 조심스레 올려 놓았습니다.
바싹 마른 입 안에 침이 돕니다.
'아, 이럴 수가'
어릴 적 먹던 밤쌀의 맛이 희미하게 느껴집니다.
뭐라고 해야할까요?
마치, 골목 안 어느 쯤인가에서 나는 고등어 자반 굽는 고소~한 냄새처럼 느껴집니다.
냄새는 나는데 어딘지는 잘 모르겠는...
해질 무렵, 골목 안에서 나는 고등어 자반 굽는 냄새에 '혹시, 우리집에서?!'하는 마음으로 들어갔는데 사실은 우리집이 아니었던 적이 있지 않았나요?
혹은, 출근길 골목을 지나오면서 어느 집에선가 밥 태우는 냄새가 나는데 어느 집인지는 모르겠던 적...한번 쯤은 있지 않았나요?
그런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요?
분명 제 혀 끝에서 나는 맛이기는 한데 어딘지 좀 약한 단 맛입니다.
맛이 강렬하지 않다 보니 이른바, 초집중을 해야 하는데...그러다 보니 좀 눈을 감았던 모양이지요...
맛을 다 느끼고 나니, 저 쯤에서 여직원 한 명이 저를 바라보며 웃고 있습니다.
손에 결재판을 든 걸 보니 아마 결재를 받으려고 했던 모양입니다.
저와 눈을 마주치더니 헤헷거리며 자기 자리로 돌아갑니다.
'그냥, 있을까 보냐'
몇 개 있지도 않은 밤쌀 부스러기를 집어 들고
아까 그 직원 자리로 갔습니다.
대부분 허물없이 지내는데 그 중에 더 친한 친구들도 좀 있습니다.
"아, 해봐."하는 제 얘기에 무슨 소린가 하던 직원이 제 손에 든 걸 보더니
"뭐예요?"합니다.
"응, 밤쌀이야."
"밤쌀이 뭐예요?" 알 리가 없습니다.
"응? 먹는 거지."하며 제 입에 한 조각을 넣어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아까의 표정을 지어 보였어요.
조금 뒤, 맛을 한번 느끼고는 이번에는 한 조각을 집어
손바닥 위에 올려 주었어요.
많지 않아서 모두 세 명에게 주었어요.
모두 좋은 친구들입니다.
그렇게, 받아 든 친구들이 입 안에 넣고 가만히 기다렸어요.
"어때?" 제가 물었어요.
"네?"
"음, 아무 맛도 안나요." 그 중 성격이 솔직한 직원이 얘기했습니다.
"그럴, 리가?" 제가 짐짓 놀라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정말이에요. 팀당님. 아무 맛도 안 나는데요." 이번엔 애교가 많은 여직원이 얘기했습니다.
"아, 고래?" 되지도 않는 개그맨 김준현씨 흉내를 내 보았습니다.
"네, 무슨 맛인지 모르겠어요.^ㅡ^" 마지막으로 웃을 때 이렇게 웃는 조용한 여직원이 얘기했습니다.
"히히, 사실 맛을 잘 모를 거야. 요새 사람들은... 단 것을 워낙 많이 먹으니까."
맞아요. 사실 그렇습니다.
요새 젊은 친구들이 '밤쌀' 맛을 알 수 없을 테지요.
서울 토박이시라면 그 친구들의 부모님 세대도 어쩌면 모르실 테지요.
삼 십 여 년 전, 그 시골에 살 때야 먹을 게 없어서 밤쌀이 달고 참 맛있었는데 말이에요
그래도 한 조각씩 모두 네 명이 나누어 먹은 밤쌀의 맛이 나쁘지는 않았다고 해요.
아마도 情을 좀 느꼈던 것은 아닐런지.
하루 해도 다 저물었습니다.
내일은 어떤 모습으로 사람들을 만나고 얘기를 나눌지 기대가 되는 시간입니다.
그럼, 마무리도 잘하시구
또 뵐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