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갓집 골목길 담벼락에서

<골목길 추억>

외할머니 등에 업혀서 도림천 흙탕물을 건널 때면 너무 무서운 나머지 매번 외할머니의 목을 졸라서 힘들게 해 드린 기억이 난다.

구멍이 숭숭 뚫린 출렁다리라도 있으면 거기로 조심조심 건너면 되었지만 그마저도 여름 장마 때면 쉽게 떠내려가곤 했기 때문에 여름방학에는 종종 외할머니 등에 업혔다.

그날은 무슨 날이었을까?

양장점에 들려 가제손수건을 왼쪽 가슴에 달고 가는 동안 때때로 누런 코를 닦아 냈으니 아마 국민학교 1~2학년 때였지 싶다.

그때 대림동 외갓집으로 가는 동안 오른쪽으로 보이는 산으로 빨갛게 물든 해가 껑충 껑충 뛰어 올라가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이건 아마도 보다가 길을 걷다가 보다가 길을 걷다해서 그렇게 보였을 듯- 문득 뒤를 돌아 보다가 본 산에는 새빨갛게 물든 해가 타오르고 있었다.

한 동안 보아도 눈이 아프지 않았던 것으로 보아 아마도 겨울안개를 머금은 때가 아니었나 싶다. 이런 저런 정황으로 유추해 볼 때-누런 코, 빨갛게 불타오르는 태양(일출), 바라보아도 눈이 부시지 않음- 그땐 아마도 설날 아침이었던 것 같다.

일찍 하늘로 돌아가신 아빠를 기리는 차례를 지내고 외갓집에 가는 길이었던 것 같다.

그 무렵엔 물이 불어나는 일은 없었으니 엄마 손을 잡고 도림천 출렁 다리를 건넜을 터였다.

외갓집 앞으로는 골목길이 길게 이어져 있었고 바로 앞에는 쌀창고, 옆으로 이어진 골목을 따라 오른쪽으로 꺽이면 이모네집이 있었다. 외갓집이건 이모네집이건 형들이 다들 나이가 많아 마주 대하기가 어려웠는데 다행히 이모네집에 '날개'라는 멋드러진 이름을 가진 막내형이 두 살 터울 밖에 나지 않아 나는 그 형과 친하게 지냈다.

아마 평소에는 어린 동생을 데리고 노느라 귀찮았을 텐데 막내형은 돌봐줄 필요가 없고 많은 것들을 알려주었으니 당시 별명이 '왜요?'였던 나에게 날개형은 구루 그 자체였다.

하지만 지나치면 없는 이만 못하다던 그 말이 딱 맞는 것 같다. 궁금하면 꼬박꼬박 물어봐야 했던 나에게 일일이 대답해 주는 것이 점점 귀찮아졌던 어른들은 급기야 시큰둥하게(무성의하게) 대답하기 주기 시작했다.

그런 문답이 잦아지게 되자 스스로 답을 찾기 시작했다.

'궁금하면 스스로 해 보자.'

그렇지만 검증되지 않은 방법으로 하다 보니 탈도 많았던 모양이다.

내 기억엔 없는데 사고를 많이 쳤던 모양인지 그날 새해를 함께 보내고 이모네 와서 안방에서 담소하시는 엄마를 몰래 빠져 나와 건넌방으로 향하는데 날개형과 딱 마주쳤다.

"어디 갈라고?"

짧아진 형의 물음에 나온 답이 궁(군?)색했다.

"오줌 쌀라고"

날개형은 건넌방 문 앞에 서서 수돗가를 가리켰다. 이런 때는 열 몇 살 먹은 형들보다 엄마보다 무서운 것이 두 살 터울 형이었다.

나오지도 않는 오줌을 짜내듯 털어내고 그때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는 날개형의 뒤를 따라 안방으로 들어갔다.

동생은 어느새 잠이 들어 엄마는 동생을 들쳐 업으려 하고 있고 이모는 설 음식들을 바리 바리 챙기시고 형들은 다들 일어섰고 나는 어수선한 틈을 타 건넌방으로 갔다.

그대로 있었다.

처음 보는 신기한 물건.

네모지게 각진 물건.

뭔가를 꽂도록 구멍이 여러 개 나 있었다.

이게 무엇이길래 날개형은 내가 이곳에 오자마자 경계하였던 걸까?

호기심에 불이 일대로 일어 버린 나는 근처에 있던 걸 가지고 그 물건에 끼워 넣었다.

순간,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전기가 나갔고 바로 뒤를 이어 날개형의 고함이 터져 나왔다.

"이! 병! 력!"

여태 들어보지 못한 가장 무서운 소리였다.

건넌방 부엌으로 나온 나는 그 길로 외갓집 쪽으로 향해 달렸다.

외갓집을 지나 이번에는 왼쪽 골목으로 뛰어 들어갔다.

어디에 숨을까 하다가 전봇대와 옆에 만들어진 시멘트 쓰레기통 사이에 숨었다.

몸이 작아 다행이었다.

그 틈으로 쏙 들어간 나는 골목길에서 탕탕거리며 뛰어 다니는 날개형의 추적을 따돌릴 수 있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다 고쳤다고 하는 달콤한 목소리...

그런 거짓말에 속을 내가 아니다.

다시 얼마쯤 시간이 흐른 뒤에 조금은 다급해진 목소리가 골목 여기저기에서 들렸다.

아마도 너무 무서워서 도망가 버린 나를 찾는 모양이었다.

'아, 그것 참 재미있다.'

놀란 마음과 호기심을 채운 마음이 뒤섞여 마구 두방망이질 쳤다.

그리고는 그대로 잠이 들어버렸다.

한참이나 잠이 들었다가 한기에 잠을 깨어 보니 고요한 새벽이었다.

울면서 찾아간 외갓집에는 엄마는 동생만 데리고 떠나고 없었다.

듣기로는 한바탕 울다가 지쳐 잤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 날, 날개형의 손에 이끌려 집으로 돌아갔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