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때나 오렴

<골목길 추억>

'아무 때나 오렴.'


개발이 다 된 곳 구석진 곳에 그런 골목이 있기 마련이었다.

향교 밑으로 이어진 길을 가만 가만 걸었다.

북쪽 벽으로는 높이 솟은 아파트.

이 길이 그 길인지, 저 길이 그 길인지...갈림길에서는 잠깐 걸음을 멈추었다.

꿈에 가끔 보는 길이 혹 그즈음에 걷던 그 길인지도 몰랐다.

가슴에 사무치는 일이라면야 꿈에도 나올 법 하다지만 그곳에 찾아가는 걸음에 내 무에 그리 사무치는 일이 있단 말가.


'아무 때나 오렴.'


지금도 생생한 C형의 말은 지친 나를 가만 다듬어 주었다.

특히 오늘처럼 사람의 관계가 어찌 이리도 가벼운가 하는 탄식 아닌 탄식에 빠지는 날이면 그 골목 걷던 생각이 간절하였다.

서울대병원에서 을지로4가까지 걸었다.

귀마개를 하며 요란을 떨며 걸었지만 실은 추운 줄을 모르겠더라.

왜 마음의 짐은 쌓일 땐 눈처럼 쌓여도 눈처럼 쉬이 녹지는 않는걸까?

그때의 감흥을 느껴 보려 추운 걸음을 종종 걸었지만 어쩐지 그때의 마음이 와닿지는 않더라.

어쩌다 만나게 된 사람을 보고 가벼운 목례 정도는 괜찮았지 싶다.

진달래 브로치를 매단 여학생을 만나기도 했다. 한때의 있고 없어지는 추억처럼, 오다 만 것만 같은 봄이 여름 뜨거운 기운에 훌쩍 증발해 버린 것 같은 갈증 덕에 깊은 곳에서 울컥 울컥 알 수 없는 것들이 올라온다.


'아무 때나 오렴.'


'네에?'


어린 내가 물었다.


'아무 때나 오렴.'


C형은 더 말하지 않았다.

그저 나를 가만히 바라볼 뿐.


'아. 네.'


무슨 말인지 그제서야 알고

나는 흰쌀밥을 한 숟가락이나 입에 퍼넣어 우물거렸다.

일부러 크게 씹는 모양을 하고 씨익 웃어 보려 하였지만 눈 끝에 매달리는 이슬을 감추기엔 난 조금 어렸다.

배고픔 보다 더한 것은 영혼의 갈급함.

내 마음에는 잔잔한 물결이 일었다.

바람을 타고 전해오는 C형의 말이 굳어진 내 마음을 녹여 주었다.


'아무 때나 오렴.'


C형의 말이 잠들지 않는 이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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