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단련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URI Feb 28. 2021

비움과 나눔

정수련의 단련일기

서랍에 가득했던 털실 뭉치들과 나눔 후 비어버린 서랍

뜨개질, 재봉 등 손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것을 좋아한다. 요즘 같은 시대에는 직접 만드는 것이 재료비부터 노동비를 생각하면 비용이 훨씬 많이 든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재료를 고르고, 원하는 모양대로 하나씩 만들어가는 과정이 좋아 비효율적인 만들기를 계속해오고 있다. 여행을 가서도 그 나라의 느낌이 듬뿍 담긴 재료를 사서 돌아와 하나씩 만드는 것이 좋아 털실 가게와 원단 가게는 꼭 들린다. 다람쥐처럼 재료를 여기저기서 모아 작업실에 차곡차곡 쌓아둔 지 오래다. 쓰고 남은 재료들은 물론, 다 쓴 통이나 안 입는 옷도 언젠가 만들기에 활용할 수 있을 것만 같아 계속 쟁여둔다.


작년 마지막 날에 집중, 연습과 함께 구글미트를 켜놓고 각자의 공간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었는데, 그때 모아둔 자투리 원단을 정리해서 당근마켓에 나눔까지 하니 기분이 아주 개운했다.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던 이유도 '버리기에는 아까워서' 라는 게 컸는데 버리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기까지 한다니 얼마나 좋은가. 비어버린 나의 재료 상자에는 공간이 생기고, 정리가 되어 한눈에 재료를 찾기 쉬워졌다.


이번에는 원단에 이어 털실을 정리해 보기로 했다. 회사에서 뜨개동호회를 운영해온 지도 벌써 5년이 넘다 보니 그때부터 쓰고 남은 털실들이 3단 서랍장으로 한 개, 공간 박스로 두… 개쯤 된다. 서랍을 하나씩 열어본다. 버려도 미련이 남지 않을 실을 골라보았다. 인형 만들기에 주로 쓰는 색색깔의 실은 모아둔 지 오래되었지만, 손이 간 지 오래다. 뜨개에도 트랜드가 있어 초반에는 인형을 많이 만들었지만, 지금은 가방 같은 소품 위주를 만들고 있어 인형실은 서랍 속에만 오래 있었다. 과감하게 다 꺼내어 바닥에 색깔별로 모아보았다. 역시 인형을 만들 때 쓰던 실이다 보니 흰색, 살구색, 베이지색이 많았다. 아예 사용조차 하지 않은 실타래도 많다. 시원하게 모두를 나눔 해버리면 좋았겠지만 좋아하는 색깔인 초록색과 갈색 실은 고양이 소품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아 조금 남겨두었다.


당근마켓에 [자투리 털실 나눔]이라고 글을 올리기가 무섭게 나눔 받고 싶다는 분의 메시지가 줄줄이 왔다. 당근마켓의 최대 장점은 내 “근처”의 분들과 거래를 할 수 있다는 것. 동네분이길래 조금이라도 더 빠르게 서랍을 비우고 싶어 오늘 바로 시간이 가능하냐고 물었더니, 언제든 시간이 가능하다며 내가 있는 근처까지 와주신다고 하셨다. 30분 후 약속을 잡고 바닥을 살펴보니 인형실 말고 겨울용 실들도 눈에 들어왔다. 서랍 하나는 완전히 비우고 싶어, 그 실들도 모아서 사진을 찍어 두 번째로 메시지를 주신 분에게 이 털실은 어떤지 물어보았다. 나눔이라 그런지 바로 승낙. 인형실을 나눔하고는 원두 한 통을 받았고, 겨울용 털실을 나눔하고는 다이제스티브를 받았다. 겨우 서랍 하나만 비웠을 뿐이지만, 아직도 쓰지 않은 실들이 더 많이 남아있지만, 마음이 가벼워진다.

매거진의 이전글 파일 비우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