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조할아버지의 이름은 한만복, 증조할머니의 이름은 김숙이다. 증조할아버지 한만복은 1876년 3월 19일에 태어나서 1928년 11월 27일 53살에 돌아가셨고, 증조할머니 김숙은 1878년 2월 13일에 태어나서 52살인 1929년 5월 2일에 돌아가셨다.
두 분이 언제 어떻게 부부의 연을 맺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은 증조할아버지 한만복은 농사를 지으면서 동시에 봇짐장사도 하셨다. 증조할아버지가 농사와 장사를 어떻게 병행했는지, 또 얼마동안 장사를 했는지, 무엇을 팔았는지 알 수 없다. 다만 할아버지의 모습은 상상이 간다. 아마 할아버지는 당시 봇짐장사들처럼 판매할 물건을 등에 지고, 이 마을 저 마을, 이 시장, 저 시장으로 다녔을 것이다.
증조할머니의 본관은 김해 김씨이다. 나의 어머니(아버지의 아내)도 김해 김씨이다. 어머니와 김숙 할머니의 본이 같다. 그러나 두 분은 가까운 친척이 아니다. 어머니는 경상도 경주 사람이고, 그곳에서 오래동안 살았던 집안 출신이다. 증조할머니 김숙의 고향은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추측컨데 김숙 증조할머니는 아마도 전라도에 살았을 것이다. 누구나 알다시피 19세기 말에는 교통이 발달하지 않았다. 걷거나 말을 타고 이동을 하는 시대였다. 이런 시대에 한만복 증조할아버지가 전라도가 아닌 먼 경상도에서 부인을 맞아들였을 리는 없다. 정말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전라도 남성과 경상도 여성이 결혼을 했을 가능성은 없다고 봐야 한다. 바꿔 말해 증조할머니 김숙은 어머니와 같은 경주 사람도 아니고, 경상도 사람도 아니었을 것이다. 증조할머니 김숙과 어머니가 김해 김씨라는 이유로 가까운 친척이었다거나, 혹은 먼 친척이었을 가능성은 사실상 없는 셈이다.
증조할아버지 한만복과 증조할머니 김숙은 슬하에 할아버지를 비롯해 딸 4명을 낳았다. 첫째, 둘째, 셋째는 모두 딸이었고, 넷째로 아들이 태어났는데, 이 아이가 바로 할아버지 한판금이다. 다섯째로 태어난 분은 할아버지의 여동생이다.
다시 말해 할아버지는 1남 4녀 집안에서 위로 누나가 3명 있고, 아래로 여동생이 한명 있었다. 큰고모할머니 세 분 중에 두 분(첫째, 둘째)은 모두 송씨 집안으로 시집을 갔고, 한 분은 중국인가 만주인가로 떠났으며, 작은고모할머니는 김씨 집안으로 시집을 갔다. 아버지는 예전만큼 활발하지는 않지만, 고모할머니들이 낳은 아들과 딸, 손자, 손녀들 중에 몇몇과 교류도 하고 있다.
경기도 가평 사는 조카는 요즘에도 아버지가 자주 만난다. 경기도 가평 조카는 첫째 고모할머니의 손자로 아버지보다 한 살이 많다. 할아버지가 죽고, 가족이 뿔뿔이 흩어진 후, 1년 정도 아버지에게 먹을 것과 잠자리를 제공했던 분은 둘째 고모할머니이다. 또 둘째 고모할머니의 아들인 고종당숙(아버지의 고종사촌 형)은 아버지가 전라도에서 경기도 마석 월산리로 왔을 때, 아버지에게 인정적으로 힘이 되어 주었다.
첫째 고모할머니는 아버지가 태어난 동네인 가리점으로 시집을 왔다. 남편은 송씨 성을 가진 분이었다. 둘째 고모할머니는 임실군 강진면 필봉으로 시집을 갔다. 필봉은 풍물 필봉굿으로 유명한 바로 그 동네이다. 남편은 첫째 고모의 남편과 마찬가지로 송씨 성을 가진 분이었다. 첫째 고모할머니의 남편과 둘째 고모할머니의 남편은 성은 같았지만, 본관은 달랐다. 넷째 고모할머니는 첫째 고모할머니와 마찬가지로 가리점으로 시집을 왔고, 후에 임실군 덕재로 이사를 가셨다.
아버지의 추측에 따르면, 할아버지는 자신의 큰 누나인 첫째 고모할머니와 동생인 넷째 고모할머니가 시집을 간 곳이 가리점 이었기 때문에 이 인연으로 가리점에 정착을 하게 된 듯하다. 첫째 고모할머니의 집과 할아버지의 집은 앞집, 뒷집 사이였고, 아버지의 기억에 첫째 고모할머니는 매우 좋은 사람이었다. 아마 할아버지도 자신의 누나인 첫째 고모할머니에게 의지하는 바가 꽤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