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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랑 Oct 18. 2018

작은 그릇만이 담을 수 있는 것들이 있다.

단막극 <그 하루의 꽃> 프리뷰


작품에는 세 가지 형태의 관계가 나온다. 동성애자와 그 쌍둥이의 다툼, 이혼을 예정한 부부의 마지막 만남, 비정규직 간병인과 부자 고용인의 논쟁.

이 세 개의 에피소드는 ‘꽃’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하나로 엮음으로써 인간과 인간의 소통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 연극 ‘그 하루의 꽃’ 줄거리 中


시놉시스를 읽자마자 한 편의 영화가 생각났다. 작년에 개봉한 김종관 감독의 영화, ‘더 테이블’.



영화 ‘더 테이블’은 하루 동안 같은 카페의 같은 자리를 스쳐간 네 개의 서로 다른 인연을 다룬다. 그들이 주고받는 짧고 담백한 대화 속에는 살아가면서 느끼는 미묘하고도 복잡한 것들이 녹아있다. 영화는 하나의 공간에서 벌어지는 네 개의 작은 에피소드를 통해 우리의 감정을 다루고, 관계를 다루고, 삶을 이야기한다. 시간적 길이가 짧은 만큼 함축적이고 은유적이었으나 절대 부족하지는 않았다. 절제된 표현 속에서도 다양한 각도로 관계성을 풀어내는 모습이 오래도록 인상 깊게 남아있던 영화였다.




이 연극이 영화와 많이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에서 카페가 맡았던 역할을 꽃이 대신할 뿐. 꽃을 중심으로 연극은 세 가지 서로 다른 관계를 엮고, 그를 통해 인간 보편의 소통과 관계에 대해 이야기한다. 연극이 궁극적으로 묻고 싶은 것은 한 가지이다.


‘내가 너에게 진정으로 닿을 수 있을까?'


자기 자신의 복잡한 내면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질문에 그다지 긍정적으로 답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나조차도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데 남들이 나를 이해해주기 바라는 것은 무리 아닐까. 또 나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내가 남을 이해하는 것 역시 아주 힘든 일일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수천, 수만 개의 블랙박스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해할 수 없고 이해시킬 수도 없는 타인. 타인과, 타인에게 또 하나의 타인인 내가 마찰하며 날카롭게 튀는 불빛들이 바로 연극 ‘그 하루의 꽃’의 이야기가 아닐까 하고 상상해본다.



저마다 자기 고유한 세계를 가진 사람들은 타인의 세계를 완전히 알 수 없으며,
자기 자신 조차도 자기만의 세계를 끝내 알 수 없다.

서로 함께하면서 동시에 서로가 알 수 없는
각자가 누리며 함께 살아가는 ‘우리 서로’의 이야기로 풀어낸다.

- 2018 서로단막극장 소개 中



‘그 하루의 꽃’은 단막극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공연되는 작품이다. ‘2018 서로단막극장’이라는 이름의 이 프로젝트는 단막극이라는 장르와, 이 장르가 삶과 관계를 이야기하는 방식에 대해 생각한다. 짧은 호흡으로만 이야기될 수 있는 것들. 그만큼 사소하고, 하찮고, 또 소중한 것들이 단막극의 주제가 된다. ‘그 하루의 꽃’ 역시 단막극이라는 장르적 특성을 최대한 살린 작품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꾸 크게 보고 멀리 보는 데에만 익숙해진 우리들이 어느새 무시하고 잊어버린 것들에 대하여. 그런 우리들의 발 바로 아래에서 움트는 미약한 것들에 대하여 다시금 상기할 수 있는 작품이 되기를. 나와 당신이 마찰하면서 순간적으로 반짝이는 작은 빛들을 추적하는 작품이 되기를 기대해본다.



아주 짧은 순간 잠시 드러났다가
사라지는 삶의 반짝이는 순간들

단막극은 긴 이야기 속으로는 흡수될 수 없는
긴 이야기로는 담을 수 없는
삶의 순간들을 그리기에 적합한 장르다.

- 작품 설명 中



작은 그릇만이 담을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섬세하고 예민하고 상처받기 쉬운 것들이 큰 그릇에 들어가면 쉽게 부서지고 뭉개져버린다. 그것들은 깨지지 않게 조심조심, 작은 그릇에 담아야만 한다. 그렇게 담아 놓은 그 약한 것들은 다른 것으로는 절대 대체될 수 없는 고유한 빛을 가진다. 예민한 사람은 이 미약하고 아름다운 빛을 잃어버리고 싶지가 않다. 그래서 끊임없이 시가 쓰이고, 단편 소설이 쓰이고, 영화 ‘더 테이블’이, 혹은 이 작고 담백한 단막극이 만들어지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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