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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탈리스트 Sep 01. 2020

제12과 그때 그때 다른 정의

그것이 의롭지 않음을 알았다면 빨리 그만두어야 할 것인데 무엇 때문에


제12과 正義, 不義 (中 二節) 



如知其非義(여지기비의)인댄 斯速己矣(사속이의)니 何待來年(하대내 년)이리요。 (孟, 謄文下) 



<<가령 그것이 의롭지 않음을 알았다면 빨리 그만두어야 할 것인데 무엇 때문에 내년까지 기다려야 하겠는가?>> 


<맹자> 月攘一鷄(월양일계)에 나오는 말씀이다. 대영지가 “10분의 1의 세금과 관시에 세금을 받지 않는 것을 바로 시행하기는 어려우니 액수를 낮춰서 내년을 기다린 후에 폐지하도록 하면 어떻겠습니까?” 하고 맹자에게 물었다. 맹자께서 “이제 사람이 있어서 날마다 그 이웃의 닭을 훔치는 자가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일러 말하기를 이런 짓은 군자의 하는 도리가 아니라고 말하니 그 사람이 말하기를 그러면 수를 좀 줄여서 한 달에 한 마리씩 훔치다가 내년을 기다린 후에 그만두겠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그것이 잘못인 줄 안다면 빨리 중단할 것이지 무엇 때문에 내년까지 기다리고 있겠습니까.”라고 말씀하셨노라 기록하고 있다. 의로움을 세우는 일, 정의를 바로 세우는 일은 미루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이다. 


왠지 뜨끔하다. 


정의(正義,justice)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정의를 담당하는 여신 유스티티아(Justitia)에서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justice는 동양(東洋) 철학(哲學)의 의(義)와는 조금 다른 개념이다. 영어에서 Justice는 사법적(司法的), 판결적(判決的) 의미(意味)가 강하지만, 동양에서 말하는 의(義)는 의리(義理), 도의(道義)라 할 때의 의(義)로 영어로는 justice에 righteousness, 즉 주관적(主觀的), 도덕적(道德的) 당위성(當爲性)이 첨가된 개념(槪 念)이다. justice는 ‘정의(正義)’라는 말보다 ‘공의(公義)’라는 말 로 풀고 싶다. 


명사들은 각자 “정의”에 대한 자신들의 생각들을 말하였다. 


정의는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한다. (소크라테스)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다. (트라시마코스)

정의란 각자 마땅히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받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정의는 그 안에 분노를 지닌다. 정의에서 나오는 분노는 진보의 한 요소가 된다.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

피레네산맥 이쪽에서의 정의는 저쪽에서의 불의다. (블레즈 파스칼) 

그렇다. 정의는 보이지 않고 또한 처지가 다르면 정의도 다를 수 있다. 


일반적으로 평화로운 세상이 오면 그것을 정의(正義)가 바로 서 있는 상태라고 말한다.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이상적인 국가가 아닌 한 어느 나라든지 이것을 완벽하게 실현할 수는 없지만 이러한 현실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인류 모두가 추구해야 하는 가치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한편, 정의는 선(善)이 아니다. 또 한, 악(惡)일 수 있다. 개인 적으로 정의에 대한 명사들의 말 중에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라는 트라시마코스의 말에 더욱 공감한다. 인류의 역사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그 시대와 국가의 이익과 통치자의 신 념이 정의되는 일은 늘 있었던 일이었다. 


“정의가 지나치면 잔인하다”
 박근혜 대통령 시절 검찰의 수장으로 있던 김수남 전 검찰총 장이 자리를 떠나며 남긴 말이다. 권력을 내려놓고 돌아서며 새롭고 지나친 정의에 대한 두려움을 내비쳤다. 


그는 송나라의 문인 소동파(蘇東坡)의 시를 소개했다. ‘인자함은 지나쳐도 화가 되지 않지만 정의로움이 지나치면 잔인하게 된다.[過乎仁(과호인) 不失爲君子(부실위군자) 過乎義(과호의) 則流而入於忍 人(칙류이입어인인) 故仁可過也(고인가과야) 義不可過也(의불가과야)]’라는 문구다. 


그러나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군주(君主)는 백성들을 통 합하고 충성스럽게 하는 일에서는 잔인하다는 악명을 두려워 하지 말아야 한다. 군주는 몇 가지 잔인한 행동을 보임으로써, 지나친 자비로움의 결과 살인과 약탈을 일으키는 무질서가 가속되도록 내버려 두는 군주보다 훨씬 더 자비로운 사람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무질서를 내버려 두는 것은 전체 공동 체에 해(害)를 입히는 것이지만, 군주에 의한 처형은 단지 특 정한 개인들에게만 해(害)를 입히게 된다."라고 반론(反論)한다. 


겉으로 보이는 잔인함과 자비(慈悲)함이 반대의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정의(正義)로움의 지나친 잔인함이 국정농단(國政 弄斷)과 부패(腐敗)의 원흉(元兇)을 끝까지 파헤쳐 국가(國家)에 선(善)을 가져온다면, 결과적으로 국민에게 자비로운 일이 될 수도 있다. 


모든 시대와 지역, 권력을 포괄(包括)할 수 있는 정의(正義)는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인간의 양심을 끝없이 깨우고 푯대가 될 가치(價値)와 기준(基準)일 것이다. 이익(利益)과 안전(安全)을 위해 바라보는 정의가 아닌 양심(良心)과 신념(信念)으로 실천 (實踐)하는 정의, 바로 “공의(公義)”다. 공의란 공정(公廷)하고 공평(公平)하며 의(義)로운 것을 말한다. 실천을 내포(內包)하고 있다. 공의는 우리 인간이 “나는 누구인가?”를 성찰하면서부터 존재의 이유와 가치를 알고 깨닫기 위해 찾았던 정의(正義)의 원상(原象)일 것이다. 


모든 인류 역사와 문화를 통해 볼 때 공의에 가장 합당(合當)한 것은 “사랑”이라는 공감(共感)과 실천(實踐)이다. 국가와 가족, 이웃과 자신을 진정 사랑하면 삐뚤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흔히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한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사랑이야말로 공정하고 공평하며 의로운 사랑이다. 사랑을 대 적하는 자들에 대해 “화 있을진저”, “독사의 새끼들아”라며 저 주까지 하셨다. 우리가 잘 모를 수도 있으나 하나님의 ‘사랑’의 이면에는 ‘공의’가 있다. 유월절은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극 명(克明)하게 대비(對比)되는 종교절기(宗敎節氣)다. 말씀을 따른 자들은 목숨을 지켰고 무시한 자들은 지위(地位)의 고하(高下)나 선행(善行)의 유무(有無)에 상관없이 그 맏아들의 생명을 잃었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서 말한 것과 맥이 맞닿는 부분이다. 


정의 또는 공의가 그러하듯 정의로운 사회, 공의가 있는 세상을 만드는 일은 우리에게 눈물겨운 대가를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 사람들이 몸이 아파서야 의사를 찾아가듯 자초하여 어려움이 닥치거나 정의가 없어져 혼란하고 어려운 세상이 닥쳐오면 그제야 정의와 공의로움을 찾기 때문이다. 


"눈 감고 귀를 막고 비굴한 삶을 사는 사람만이 목숨을 부지 하면서 밥이라도 먹고 살 수 있었던 우리 600년의 역사, '야 이놈아,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그만둬라' '너는 뒤로 빠져라' 이 비겁한 교훈을 가르쳐야 했던 우리의 600년 역사, 이 역사를 청산해야 합니다. 권력에 맞서서 당당하게 권력을 한 번 쟁취하는 우리 역사가 이뤄져야만 이제 비로소 우리의 젊은이들이 떳떳하게 정의를 이야기할 수 있고, 떳떳하게 불의에 맞설 수 있는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故 노무현 대한민국 16대 대통령이 했던 연설의 한 대목이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각(各) 성(城)에서 네 지파(支 派)를 따라 재판장(裁判長)들과 지도자(指導者)들을 둘 것이요 그들 은 공의(公義)로 백성(百姓)을 재판(裁判)할 것이니라” (신 16:18) 


“솔로몬이 이르되 주(主)의 종 내 아버지 다윗이 성실(誠實)과 공 의(公義)와 정직(正直)한 마음으로 주(主)와 함께 주(主) 앞에서 행 (行)하므로 주(主)께서 그에게 큰 은혜(恩惠)를 베푸셨고 주(主)께서 또 그를 위(爲)하여 이 큰 은혜(恩惠)를 항상 주사 오늘과 같이 그 의 자리에 앉을 아들을 그에게 주셨나이다” (왕상 3:6) 


“그는 공의(公義)와 정의(正義)를 사랑하심이여 세상(世上)에는 여 호와의 인자(仁慈)하심이 충만(充滿)하도다” (시 33:5) 


본 글은 오사철 회장님, 추연수 회장님이 공동으로 명심보감, 대학, 중용, 논어, 맹자, 소서, 도덕경 및 성경 등을 수년간 연구하여 사람이 살면서 갖추어야 하는 지혜 관점에서 100과목을 정리한 것 중 상권 50과목에 해당하는 것으로 존경하는 두 회장님의 좋은 글을 발췌하여 소개하기 위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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