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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궁금한 민지 Sep 15. 2024

[커리어 미아 시리즈] 1. 트리거가 부른 퇴사

불유쾌와 무감함이 얼려준 것

느린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생활이나 업무나 민첩성이 낮다. 제일 부러운 유형은 임기응변이 뛰어난 사람. 하지만 어쩌랴. 이것만큼 쉽사리 고치기 힘든 것도 없다. 낯선 환경에 거부감은 적으나, 눈치가 빠르거나 순발력이 높은 사람이 아니다. 업무도 마찬가지. 그런데 만약 오늘내일하는 급한 업무가 비일비재다? 심지어 업무 온보딩조차 제대로 치르지 않았다? 재앙이었다.


크리스마스 직후 입사해 2개월 간은 사려 싶은 팀장님과 꼼꼼한 부팀장님 슬하에서 단계별로 온보딩을 밟았다. 교육업을 하는 회사의 업무는 어려운 축은 아니었으나, 회원 관리 차원의 살림 성격의 업무가 많았다. 영상 촬영에 수반되는 환경에 대한 숙지, 교재 발주와 출고, 그리고 재고관리 등. 업무에 익숙해지자마자 권태가 찾아왔다. 이를 알아챈 양 팀이 바뀌었다. 이후 5월 중순부터 일어난 일은 내게 퇴사 트리거로 작용했다.




체하듯 구멍 메우기 식으로 진행된 일


시작부터 이상하진 않았다. 기획안을 써 오라는 말에 나름의 첫 기획안을 작성했다. 이틀 정도가 경과했으나 별다른 피드백을 받지 못했다. 조금 기다렸고, 꽤 기다렸고, 3일 차가 되었다. 갑자기 상사가 자신이 기획방향을 잡을 테니 세부내용만 채워달라고 오더했다. 그러마 했다.


그렇게 PM도 어시스턴트도 아닌 어중간한 상태로 강의를 런칭했다. 일은 구멍난 구석을 메우는 식으로 진행됐다. 고백하자면 어느 부분이 누락됐는지도 알지 못했다. 강의 BM을 전체적으로 설명을 들은 자리가 없다 보니 업무를 ‘하는’ 과정에서 계속 구멍을 발견했다. (예: 어, 여기 내용이 이러면 회원 안내는 어떻게 나가지? 등)


발견 당시 가벼워 보이던 구멍은 결코 사소하지 않았다. 가령 강의 순서를 바꾸는 결정에 영상 인트로를 다 뜯어고쳐야 했고, 기존에 제작된 교재 목차가 엉키는 일이 발생했다. 일을 두 번 하는 경우가 빈번했다.




상세페이지 트라우마를 안긴 2개월


그러고 약 5일간의 소강상태. 약 일주일 뒤 프로젝트팀 전체에 대표님 지령이 떨어졌다. 무료강의 마케팅. 목표치는 명확했고, 실행배경도 명확했다. 결론적으로 이 과정은 내게 유의미한 경험을 안겼다. 논리정연한 설계와 일사분란한 실행, 데이터 추적은 경력기술서에 쓸 만큼 유효했다. 다만 그 앞단의 과정은 놀랄 만큼 황당했다. 문제는 또 상세페이지였다.


상세페이지를 뒤엎은 횟수는 약 5차례였다. 5차례나 바꾼 일이 문제는 아니었다. 거칠게 가져간 기획안이 상세페이지로 구현되고, 모호한 카피가 한층 메시지를 살린 카피로 다듬어지고, 이미지가 보강됐다면 허무하진 않았을 테다. A가 A-1, 혹은 A-2로 발전하는 시간은 필요하다. 하지만 상세페이지 수정은 A가 C로, 다시 E로, 혹은 갑자기 J로 넘어가는 당황스러운 비약의 연속이었다.


일에는 사실 정답이 없다. 하지만 방향성이 있다면 ‘모두 그럴 수 있’어서는 안 된다. 랜딩 페이지의 주요 내용을 노출했다가 제거했다가, 혜택을 강조했다가 삭제하는 등 끊임없는 수정의_수정이었다. 급기야 마지막엔 타 과정의 잘된 케이스를 레퍼런스 삼으라는 지시를 받았다.


상사도 매번 방향을 아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안다. 다만 방향을 모른다면, 차라리 팀원에게 네비게이터 역할을 주면 어떨까. 그게 아니라면 팀원이 그저 나사 역할을 하는 것이 빠른 일처리에 도움이 된다. 하지만 두 사례는, 어느 쪽도 아니었다. 일을 하는 것이 아닌, 그저 방향 없이 일을 저지르고 뒷수습하는 시간이었다.




단계를 밟아가는 일처리가 중요한 이유


난 ‘차근차근’이 필요한 사람이었다. ‘차근차근’에는 2가지 뜻이 있다. 급하지 않은 속도와 하나씩 단계를 밟아가는 절차. 둘 다 갖춰지면 최상이겠으나 하나만 고르라면, 두 번째다. 느리다고 해 봤자 얼마나 느릴까? 100km/h로 달려야 하는 누군가에게 80km는 한없이 느릴 수 있지만, 큰 불능은 아닐 수 있다. 무엇보다 일처리가 ‘왜’ 급해져야만 하는지는 돌이켜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단계는 특히 중요하다. 속도는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점차 개선될 수 있다면, 일처리의 순서는 순전히 내 힘으로만 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상급자가 업무 공정에 관심이 없다면 이야기는 상당히 어려워진다. 모든 일은 A에서 B로 선회하려면 근거가 필요하다. 근거는 대개 기획의도에서 나오기 마련이고, 취지가 명확한 기획은 쉽게 뒤집히지 않는다.


무형의 콘텐츠를 만들 때도 제조업의 공정을 떠올려야 하는 게 아닐까. 주형을 만들고, 본을 뜨고,이를 조립하고, 포장하듯 모든 일에는 절차가 필요하다. 만약 의도도 커녕 절차도 무시한다면 모든 일은 무한히 바꿀 수 있고, 효율성 없이 스텝이 꼬이기 마련이다. 결국 일의 심도를 발전시키는 대신 계속 방향을 바꾸면서 제자리를 맴도는 모양이 된다.




차질 없는 수행 대신 불시착한 아이디어를  


‘차근차근’에 댈 충격은 아니지만, 나 자신을 각성시킨 두 번째 항목도 있었다. 이는 갯벌에 발이 빠지듯 알게 됐다. 난 투두 삭제가 아닌 투두 생성으로 움직이는 사람이라는 것을. 업무를 떠나 누구나 매일 할 일은 있기 마련이다. 대개 목록을 하나씩 지우면서 하루를 살아가기 때문에 이 사실을 깨닫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운영 업무에는 항상 투두리스트가 즐비했다. 배송을 내보내고, 운송장을 입력하고, 교재 사양에 따른 견적을 요청하고, 발주를 하고, 샘플을 확인하고. 문자 문안을 짜고, 수신자를 추리고, 문자를 예약하는 일. 할 일은 하루에도 10개가 거뜬히 넘었다. 이 모든 일은 차질 없는 수행이 핵심이었고, 하나씩 지워가는 맛이 있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였다. 운영 업무의 성과란 곧 ‘차질 없음’이었다. 그리고 나는 무언가를 ‘이상없이 매일 똑같이 수행하는 것’에 동기부여가 안 되는 사람이었다. 누군가는 반복적인 일과에서 만족감을 얻을 텐데. 규칙적인 생활은 내게도 중요했지만, 업무 내용이 반복적인 상황은 브라운-아웃을 일으켰다. 이런 일이 내 적성과는 거리가 멂을, 3개월 만에 알았다.




강점 내버려두고, 뭐 하고 있어?


반복적 일과에 무감해진 3월 말을 지나 5~6월에 걸쳐 상세페이지 사건이 연이어 터졌다. 7월 초 내 정신은 탈진 상태였다. 불유쾌한 협곡을 지나니 모든 것에 무감해졌다. 한동안 ‘난 뭐 하는 사람이지’ ‘허무하다’ ‘싫다’ 같은 단어를 입에 달고 살았다. 이유를 언어화하는 데에는 1달 넘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알았다. 내게 ‘차근차근’이 얼마나 필수적인지를, 내게는 ‘투두 생성’이 곧 동력임을.


앞서 '차근차근'을 속도와 공정으로 설명했다. 사전적으로 표현하자면 <목표를 향한 탐색을 거치며 그에 따른 근거를 하나씩 가감해 발전시키는 것>을 의미했다. 전 직장에서 한 태니지먼트 검사가 떠올랐다. 내 첫 번째 강점은 탐구(Explore)이었다. 빠른 속도는 탐색과 검토를 불가하게 하고, 공정 없는 일처리는 오로지 무사(無事)만을 바라게 한다.  


투두리스트를 지워나가는 쪽보다는, 투두리스트를 세워나가는 일은 어떨까. 조직에서 투두리스트를 만들 권한은 대뜸 가질 수 없다. 에디터와 같은 직무라면 모를까. 그게 아니라면 직급이 높아져야만 한다. 두 번째 강점인 창조(Create)가 떠올랐다. 이걸 한 스텝이 꼬이고 나서야 깨닫다니.


‘탐구’와 ‘창조’ 같은 강점을 들먹일 필요도 없이 제 적성에 안착해 있던 나는, 그 직업을 내려놓고 나서야 제 기질과 적성을 돌아봤다. 동시에 그간 속했던 조직이 얼마나 이를 가능케 했는지 깨달았다. 무언가를 차근히 탐구할 환경과 할 일을 창발적으로 만들어내는 일. 이 두 조건이 모두 부합했던 지난 직장과 7년간의 에디터 업무를 내려놓고서야 알게 된 것이다. <2탄에서 계속>




퇴사 트리거에 대하여 : Lesson Run 1.

-난 '차근차근'이 중요한 사람이었다.
 (=속도전 말고, 우다다 말고 하나씩이 필요해)

-난 '투두 삭제'가 아닌 '투두 생성'으로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아이데이션으로 일을 만들 영역이 있어야 해)



제목 이미지 | Thought Catalog @unsplash

마지막 이미지 | Angelina Litvi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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