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슨 보이드 킨셀라 《GHOST IN MACHINE》 전시를 보고
신박한 책 어디 없나, 하는 마음으로 땡스북스의 서가를 돌던 중 정성은의 대화 산문집 <궁금한 건 당신>을 만났다. 표지 속 강냉이처럼 정형화되지 않은 인물들의 얼굴에 정감이 갔다. 첫 에피소드는 택시기사님의 내리사랑 얘기로, 선 자리에서 다 읽어버렸다. 쉽게 읽힌다고 금세 휘발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병렬독서 중에도 한숨 돌리고 싶을 때 가장 자주 손이 가는 책이었고, 묵직하게 박히는 대화가 많았다. 뮤지션이 된 후배와의 대화를 담은 ‘음악하는 남자라니’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매력적인 사람을 보면, 그 매력을 갖기 위해 진화론적으로 포기한 부분이 분명 있으리라 생각해요.”
지난 9월, 프리즈 서울. 페로탕 갤러리에서 제이슨 킨셀라 보이드의 그림을 봤다. 다면체들의 복합적인 조합을 고전적인 방식으로 그린 그림이었다. 이해하려는 마음을 내려놓고 시각적 유희를 즐겼다. 서로 무관해 보이는 컬러들이 썩 어울렸다. ‘저 각도에서 저 도형이 저기 올라갈 수 있나?’하고 실증적 관점(MBTI로 치면 ST적인)으로 그림을 쳐다봤다. 그 가운데 피부나 머리카락, 눈코입 등 인간의 얼굴로 식별되는 요소가 없음에도 초상화처럼 느끼고, 그 안에서 표정과 성격을 읽고 싶게 만드는 접근이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각기 다른 개별에서 공통적 특성을 찾아내 카테고라이징하는 행위를 좋아한다. ‘A하면 B하더라’ 하는 경향성을 발견하길 즐긴다. MBTI에 진심인 이유다. 분명 특정 이들이 유난히 동의하는 특성들이 있다. ISTP인 친구와 지인 각각은 자신을 설명하는 한 줄에 ‘굳이’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한때 사귀었던 ENFP에 이를 적용해 본다. NF는 부드럽게 말하고 상대의 기분에 밝다. 하지만 그는 내 기분에는 민감했지만, 정작 내가 언어화해 옮긴 감정을 경청할 줄 몰랐다. 동시에 자기감정을 들여다보는 데 서툴고, 이를 정리해 표현할 능력도 낮았다. 이것은 NF의 문제를 넘어선다.
ENFP의 특징 중 NF에 대해 설명할 때, 당신은 벌써 주변 ENFP에 이를 대입해 봤을 테다. 하지만 이는 설명했듯이 MBTI를 떠나 그저 자신과 타인의 감정에 대한 인식과 표현의 문제일 수 있다. 인간 유형을 집대성한 어떤 이론도 한 인간을 완벽히 설명하지 못한다. 그저 확률적으로 타율 높은 설명일 뿐. (일단 MBTI는 이론이 아니다) 게다가 한 인간을 설명하는 어구를 무한정 나열한들 왠지 모를 형용모순에 납득이 힘들다. 하지만 그림은 다르다. 가령 ‘쿠션어를 자주 쓰고, 인간의 기분에 민감하지만 정작 감정을 다루는 데에는 어려움을 겪는, 사람 좋아하는 한 인간’을 글 대신 그림으로 그려낸다면?
킨셀라 보이드의 그림은 여기서 빛을 발한다. 그의 그림은 개인의 인격을 보여주는 요소로 다면체를 빌려온다. 재미있는 점은 서로 잘 붙지 않거나 안정적으로 조립하기 힘들어 보이는 요소들이 한데 어우러진다는 점이다. 사선으로 기운 육면체 위에 길게 세로로 붙은 민트색 육면체는 다시 탁구공 같은 구 2개를 이고 진다. 자주색 원기둥을 이마에(?) 뿔 마냥 꽂는다. 또 다른 초상은 라운드 넥처럼 굽은 흰 면에 다시 흰 육면체가 붙고, 학의 목처럼 길게 뻗은 하늘색 원통에 18세기 유럽 궁정 여인들의 머리 마냥 자잘한 다면체들이 자석처럼 들러붙는다. 깡말랐지만 머리 장식만큼은 포기 못한 여인처럼 보이기도, 생각이 몸을 잠식한 학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의 입체 작품은 한 발 더 나아간다. 관람자의 위치에 따라 각 인물의 전혀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다정함은 분명 타인에 대한 배려이지만, 때로는 상처받을 용기가 없는 우유부단함으로 드러난다. 그저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픈 욕심이 드러나는 방식이기도 하다. 혹은 매정한 사람이 소수에게만 내보이는 배타적 면모가 될 수도 있다. 곧 한 인간의 특징은 ‘A면 B다’에 쉽사리 포섭되지 않는다. 우리는 오로지 타인의 표면만, 그중에서도 일부만 본다. 그 일부에서 우리는 매력을 발견한다. 그리고 이는 당신이 그와 맺은 관계에 따라서 달라진다. 당신 눈에 띈 그 사람의 매력은, 당신이 진화하고 싶은 방향을 보여줄지 모른다. 그건 MBTI나 혈액형, 별자리, 사주 무엇으로도 쉽게 설명되지 않는, 그를 향한 당신만의 길고 긴 시선을 필요로 하겠지.
#안다고도모른다고도못하더라도 #제이슨보이드킨셀라_ghostinmachine
제이슨 보이드 킨셀라 《GHOST IN MACHINE》
2024.8.30-2024.10.19
페로탕 갤러리
관람일자: 2024. 9. 5
발행일자: 2024. 10.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