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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작 Dec 22. 2020

혼자 생선을 구워 먹을 수 있는 용기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2004)

너 먹어. 난 요리 안 하니까.


양손 가득 찬거리까지 들고 온 츠네오(츠마부키 사토시)가 쿠미코(이케와키 치즈루)의 집에 찾아왔습니다. 시골에서 엄마가 보내준 된장과 채소를 바리바리 싸들고 온 것인데요, 평소 같았으면 그런 식재료들은 자취하는 남동생에게 다 줘버렸을 츠네오지만 웬일인지 이번엔 싱싱한 야채들을 본 순간 쿠미코가 생각났습니다. 얼마 전 '또 밥 달라고 왔냐'라고 구박받으면서도 쿠미코가 만들어줬던 밥을 너무나 맛있게 먹었기 때문일까요? 이번엔 츠네오가 좀 더 뻔뻔하게 '밥 좀 넉넉히 하라'고 쿠미코에게 말합니다. 


츠네오로선 지금까지 두 번이나 맛있는 밥을 얻어먹은데 대한 작은 보답인양 식재료를 잔뜩 들고 오긴 했지만 결국은 쿠미코에게 맛있는 요리 좀 만들어달라고 바리바리 장을 봐온 거나 다름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며칠 전 쿠미코 집에서 먹었던 석쇠에 구운 생선구이와 맛깔나게 익은 가지절임에 대한 기억이 본능적으로 츠네오의 발길을 쿠미코의 집으로 향하게 했을 수도 있죠.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 스틸컷


코미코가 요리를 하는 동안 가만히 앉아서 얻어먹기만 하는 것도 미안했던지 츠네오는 이번엔 팔까지 걷어붙이고 쿠미코의 요리를 거들기로 하는데요, 갑자기 쿠미코의 이름을 물어봅니다. 두 번이나 밥 해준 사람의 이름을 정말로 몰라서 물어보는 건 아니고, 정식으로 통성명을 하고자 한 것이죠. 그런데 웬일인지 쿠미코는 자신의 진짜 이름 말고 자신이 불리고 싶은 이름을 알려줍니다. 그 이름은 바로 '조제'였습니다. 그녀의 이름을 듣고 츠네오는 즉각 '좋은 이름'이라는 반응을 보이죠. 


그런데 사실 '조제'라는 이름은 쿠미코가 좋아하는 프랑수아즈 사강의 소설 속에서 나오는 여주인공의 이름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 그 누구도, 심지어 할머니조차 그녀를 '조제'라고 불러준 적 없었죠. 그런데 예상치 못했던 존재인 츠네오가 '조제'라고 불러줌으로써 비로소 그녀는 쿠미코가 아닌 '조제'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를, 그래서 생전처음 '조제'가 누군가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기까지 하는 것임을, 츠네오는 미처 몰랐을 테지만 말입니다.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감독 이누도 잇신)은 평범한 대학생 츠네오(츠마부키 사토시)와 다리가 불편한 소녀 조제(이케와키 치즈루)의 귀엽고도 애달픈 사랑과 이별을 그린 작품입니다. 다나베 세이코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만든 이 영화는 연인들이 만나고 이별하는 과정에서 누구나 깨닫게 되는 사랑의 본질을 진솔하고 담백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영화 속에서 조제가 읽어주는 프랑수아즈 사강의 소설 <1년 후>의  한 구절은 (원제 -한 달 후, 일 년 후) 이 영화의 주제와도 같습니다. 


좌 - 사강의 소설 <한 달 후, 일 년 후> 표지 / 우 -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 스틸컷


(베르나르) “언젠가 그를 사랑하지 않는 날이 올 거야. 그리고 언젠가는 나도 당신을 사랑하지 않겠지. 우린 또다시 고독해지고…. 모든 게 다 그래. 그냥 흘러간 1년의 세월이 있을 뿐이지.” 


조제가 좋아했던 그 소설의 제목처럼 뜨겁게 사랑을 시작한 지 일 년 후, 두 사람은 결국 이별을 하고 맙니다. 사귀는 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고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몇 가지 이유도 있었지만 츠네오는 그녀와의 이별에 대해서 결국 자신이 '도망쳤다'라고 솔직하게 인정을 합니다. 


그런데요, 새로운 여자 친구와 점심을 먹으러 가려던 츠네오가 길을 걷다 갑자기 울음을 터트리고 맙니다.

그렇게 펑펑 우는 츠네오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우리의 눈시울도 함께 뜨거워집니다. 감당할 수 없는 사랑에 지쳐 끝내 도망쳐 나왔던 아픈 사랑의 기억이 우리들의 가슴속 한편에도 남아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반면 츠네오와 이별한 후 보이는 조제의 모습은 우리를 안심시켜 줌과 동시에 우리들의 가슴속에 뜻밖의 용기를 가져다줍니다. 츠네오를 떠나보낸 이후에도, 혼자서 씩씩하게 장을 보러 다니고, 혼자서 꿋꿋하게 석쇠에 생선을 구워 먹는 조제. 그녀가 우리들에게 전하고 싶었던 말은 아마도 그런 것이 아닐까요?


언젠가 사랑은 가고 세월만 남더라도 혼자서 꿋꿋하게 생선을 구워 먹을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만 언젠가 우리 앞에 펼쳐질 새로운 사랑과 인생의 바다를 향해 용감하게 다이빙할 수 있다.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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