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난 황소 (2018)
뭐, 꽃게진 뭔지를 일억 원어치나 샀다고?
잔잔한 재즈 음악이 흐르던 고급 레스토랑에서 지수(송지효)의 분노에 찬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레스토랑의 로맨틱했던 분위기가 확 깨지고 말았습니다. 사실 이 레스토랑에 처음 들어선 순간부터 지수의 표정은 영 좋지가 않았습니다. 오늘이 생일이긴 해도 그녀는 지금 이런 고급 레스토랑에서 외식이나 할 형편은 절대로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아내의 생일상만큼은 근사하게 차려주고 싶었던 지수의 남편 동철(마동석)은 고급 레스토랑을 예약하고 통 크게 '킹크랩' 만찬까지 준비했습니다. 하지만 웨이터가 푸드 커버를 열었을 때 그 안에 든 엄청 큰 킹크랩을 보고 깜짝 놀라는 지수의 리액션이 '감동'이 아니라 '경악'이라는 사실을 동철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모양입니다.
동철은 눈치도 없이 킹크랩 예찬론까지 들먹이며 킹크랩을 발라주려고 하는데요, 웬걸 지수의 얼굴에 킹크랩 살점까지 튀기면서 지수의 기분을 더욱 다운시킵니다. 그러자 결국 지수는 조심스레 '이혼'이라는 단어를 꺼냅니다. 진짜 이혼을 하자는 건 아니고 채권자들의 강제 압류를 피하려면 위장이혼이라도 하자는 것이었죠. 남편의 빚 때문에 아내의 입에서 '위장이혼'이라는 말까지 나오자 동철은 '이제 배만 들어오면 빚은 다 해결할 수 있다'며 지수를 안심시키려 합니다. 동철은 빚 해결의 보증서로서 킹크랩 1억 원어치를 선구매했다는 계약서를 지수에게 건네 보여주는데요, 그걸 본 지수의 반응은 동철의 기대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요양보호사로 일하는 아내는 한 푼이라도 더 벌어보겠다고 식당 알바까지 투잡 뛰는 걸로도 모자라 남편의 빚을 탕감하고자 위장이혼까지 생각하고 있는 마당에, 이놈에 남편은 아내랑 한 마디 상의도 없이 대출을 받아서는 진짜로 잡아올지 말지 알 수도 없는 킹크랩을 1억 원어치나 샀다니, 결국 지수의 분노가 폭발하고 말았던 것이죠. 그러자 동철은 어떻게든 아내를 진정시키려고 애를 씁니다. 오늘 같이 좋은 날 일단 맛있게 먹고 즐겁게 보내자고 아내를 위로하지만 이미 지수의 귀에는 남편의 말 따위는 귀에 들리지도 않습니다. 못 말리는 남편 꼴 보기 싫은 것만큼이나 눈앞에 놓인 맛있는 킹크랩마저도 꼴 보기 싫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 아내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 가늠도 못한 동철은 서프라이즈 생일 파티의 대미를 장식하기 위해 잠시 테이블을 비우고는 미리 준비한 생일 케이크에 촛불을 붙이고 선물꾸러미까지 챙겨 들고 다시 테이블로 돌아오는데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남편 때문에 너무나 화가 난 아내는 이미 레스토랑을 나가버린 후였습니다. 아무도 오늘 밤 이 두사람은 집에 가서 부부싸움 2차전을 치르지 않을까요?
영화 <성난 황소>(감독 김민호)는 거칠었던 과거를 청산하고 건실하게 살던 한 남자가 납치된 아내를 구하기 위해 성난 황소처럼 무한 돌진하는 과정을 그린 통쾌한 액션 영화입니다. 전직 조직 출신의 특출한 전투력을 가진 한 남자가 납치된 가족을 구해낸다는 설정면에서는 <테이큰> 시리즈에서도 자주 봤던 익숙한 느낌을 주지만, 사람을 납치해 간 대가로 몸값을 지불하는 악당 캐릭터만큼은 여타 영화에서는 거의 못 봤던 독특한 느낌을 줍니다. 이 영화에서 여성들을 납치해 해외에 팔아먹는 범죄 집단의 두목 기태(김성오)에게는 보기 드문 악질적인 면이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의 도덕과 착함을 '위선'이라 여기는 것은 악당이니까 그럴 수 있다고 쳐도, 돈다발 앞에서 갈등하는 남편의 모습을 진정 '사람답다'라고 느끼는 기태의 캐릭터는, 인간을 시험에 들게 만들고 그것을 즐기는 사악한 악마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요, 기태 캐릭터보다 더 충격적인 내용은 돈과 아내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악마와의 게임에서 대부분의 남편들이 아내보다 돈을 선택했다는 사실입니다.
돈을 가져갈 것인가, 아내를 데려갈 것인가.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세상에 어떤 미친 남편이 돈을 받고 아내를 팔까 싶지만 통계가 말해주는 우리 사회의 부부들의 현실은 오히려 영화 속 상황보다 더 씁쓸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현실이 이러하니 경제적 문제가 있는 부부에게 접근해 악마 같은 장난을 즐기는 기태 같은 악당 캐릭터도 자연스럽게 등장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마음을 갖고 노는 악당 기태도 한 가지 중대한 실수를 범하고 마는데요, 강동철이 성난 황소 같은 남자라는 사실을 미처 못 알아봤던 것이 아니라 강동철이 아내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아내의 생일에 킹크랩을 쏘는 것이 아내에 대한 남편의 애정도를 평가하는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이 영화에서만큼은 아내 생일에 킹크랩을 쏠 정도로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이라면, 돈을 받고 아내를 팔아먹는 반인륜적인 행동은 결코 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한국영화 사상 이례적으로 엔딩 스크롤에 부부의 다정한 식탁 장면을 넣은 것도 그런 부분을 강조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은데요, 아내의 생일날 기꺼이 킹크랩을 쏠 정도로 진심으로 아내를 사랑하고 위해주는 남편들이 우리 사회에 더욱 많아져야만 부부간의 틈을 파고들어 시험에 들게 만드는 기태와 같은 사악한 악당이 결단코! 절대로! 두 번 다시는! 앞으로 영원히! 우리 사회에 발붙이지 못할 테니까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