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학개론(2012)
우리끼리 파티할까?
경기도 양평의 어느 식당.
야외에 마련된 테이블에서 서연이(수지)와 승민이(이제훈)가 파전을 안주 삼아 시원한 막걸리를 마시고 있습니다. 건축학개론 수업의 과제를 위해 서울에서 양평까지 놀러 온 두 사람이 계획에 없던 막걸리까지 마시게 된 이유는 오늘이 마침 서연이의 생일이기 때문입니다.
11월 11일이 생일이라니 일부러 기억하려 애쓰지 않아도 평생 기억될만한 상징적인 날짜죠. 건축학개론 수업 첫날부터 첫눈에 반하긴 했지만 서연이에 대해 아직 잘 모르고 있던 승민이는 오늘이 그녀의 생일이라는 깜짝 고백에 놀랐다가 갑자기 궁금한 것이 생겼습니다. 보통 '생일이면 친구들하고 파티도 하고 그래야' 하는데, 과제를 하러 양평까지 온 게 좀 이상했던 거죠. 하지만 서연이에게 승민이는 이미 '내 친구'였기에 '우리끼리 파티'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지 않냐고 대답합니다. 서연이의 '남자 친구'까지는 아니지만 '사람 친구' 정도로는 인정을 받았다는 게 왠지 기분 좋은 승민이는 살짝 심쿵했겠죠.
그래서 두 사람은 야외 테이블에서 둘이 함께 오붓하게 막걸리를 마시며 갑작스러운 생일파티를 하게 된 것인데요, 가을 정취가 아름다운 주변을 둘러보던 서연이 승민이에게 갑자기 한 가지 부탁 같은 제안을 합니다. 건축학도인 승민이에게 서연이는 십 년 후에 '니가 공짜로 집을 지어 달라'는 의미심장한 부탁을 하는데요, '니가 지어줘'라는 게 포인트지만, 눈치도 없는 데다 쪼잔하기까지 한 승민이는 '공짜로'라는 단어에만 반응을 보입니다. 결국 서연이는 평소 아끼던 전람회의 CD를 계약금으로 퉁치고는 자신이 살고 싶은 집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미래의 집 그림을 그리며 즐거워하는 서연이를 흐뭇하게 바라보는 승민이는 그녀가 원하는 집이라면 세상 그 어떤 집이든 다 지어줄 것만 같습니다.
너, 순댓국 좋아해?
서울 장미원 시장의 어느 골목길.
빈집(승민이와 서연이의 아지트)에 갖다놓을 물건들을 사서 돌아가는 길에 우연히 승민이를 만나게 된 서연이가 반가운 표정으로 밥 먹었냐고 묻습니다. 그때 승민이는 방금 전 밥을 먹었지만 혹시라도 서연이가 같이 먹자고 할까 봐 밥 안 먹었다고 둘러댑니다. 그러자 혼자 밥 먹기 싫었던 서연이는 승민에게 먹고 싶은 메뉴 하나를 추천하는데요, 아,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일까요? 서연이가 먹고 싶어 한 것은 하필이면 '순댓국'이었습니다.
공교롭게도 서연이가 가려고 했던 순댓국집은 승민이의 엄마가 운영하는 곳이었고, 방금 전 승민이는 바로 그곳에서 엄마표 순댓국을 먹고 나오던 길이었습니다. 하지만 승민이는 짝사랑하는 서연이에게 시장통에서 순댓국을 파는 엄마를 소개하기가 솔직히 좀 창피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승민은 에둘러서 '순댓국을 안 좋아한다'고 둘러댔던 것이었고, 그 결과 서연으로부터 '순댓국도 못 멋는 서울 촌놈'소리를 들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이때 승민이가 보여준 태도는 승민의 첫사랑이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영화 <건축학개론>(감독 이용주)은 과거 ‘첫사랑’의 기억으로 얽혀 있는 두 남녀가 15년이 지난 후 다시 만나 추억을 완성하는 이야기를 그린 작품입니다. 그러므로 영화속 시간의 흐름상 주인공들의 대학시절을 다룬 15년 전에 이미 그들의 첫사랑은 실패로 끝났던 것이죠.
영화 속 승민이를 포함하여 남자들의 첫사랑이 대개 실패로 끝나는 이유는 그 사람을 사랑하기엔 자신이 너무나 부족하고 초라하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특히 사랑의 라이벌이 있고, 그 라이벌이 나보다 더 잘난 사람이라고 인정될 때에는 남자들은 그 사랑을 쉽게 포기해 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재욱의 승용차를 얻어 타고 가던 날, 짝퉁 티셔츠를 입고 있음이 밝혀진 승민이 갑자기 차에서 내려 도망쳐버렸던 것처럼 말이죠.
종강파티가 있던 날에도 술에 취한 서연이를 데리고 온 사람이 만약 재욱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골목길에 숨어 지켜보던 승민이는 당장 뛰쳐나가 그놈을 쫓아내고 서연이를 챙겼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하필 서연이를 데려온 상대가 승민에겐 넘사벽인 재욱이었기에, 승민이는 그날 밤 패배감과 배신감에 휩싸인 채 서연의 집 앞에서 스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종강파티 이후, 서연이가 공대 건물 앞까지 승민이를 찾아왔을 때, 그때라도 승민이가 먼저 그날 사건(?)의 진실은 무엇이었으며, 서연이의 진심은 뭔지를 물어봐주었더라면 어땠을까요? '집에 CD플레이어가 없어서 서연이가 선물로 준 전람회의 CD를 들을 수 없다'는 자조적인 말 대신 서연이를 엄마의 순댓국집으로 데려가 '나 사실은 순댓국을 좋아하고, 순댓국보다 너를 더 좋아한다'라고 용기 내어 말했더라면 어땠을까요? 그날 서연이와 함께 순댓국을 맛있게 먹었더라면 승민이와 서연이는 과연 캠퍼스 커플이 될 수 있었을까요?
첫사랑이 대부분 실패로 끝나는 이유는 말 그대로 처음 해보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선 첫사랑은 그 이후에 만나게 될 사랑을 위해서 먼저 해봤던 일종의 사랑의 연습, 또는 '습작' 같은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서툴고 미숙했던 습작에 대한 기억이 우리의 가슴속에서 완전히 지워지지 않는 이유는 아마도 첫눈 때문일 것입니다. 해마다 첫눈이 내리는 날이면, 멈춰서 버린 괘종시계에 누군가 밥을 주고 간 듯, 습작 같았던 첫사랑의 기억이 새삼스럽게 다시 떠오르기 마련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