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어진 삶을 받아내, 다른 사람을 용서해, 그렇게 사랑하며 살아내는 앤.
처음엔 거부감을 느끼며 시작했다. 막상 볼 게 없어져서 정주행 할 무언가가 필요했고, 시즌이 2개 이상인 드라마를 원했다. 넷플릭스 특유의 어두움, 스릴과 속도에 살짝 지루해진 틈에 만났다.
<어린 왕자>처럼 내가 아이보단 어른이어서 잘 이해되는 앤의 모습과 상황들. 매 에피소드마다 내가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살고 싶은 지 공감하며 보았다. 그렇다는 건, 이 드라마는 동화라는 것. 나는 벌써 구닥다리가 된 걸까.
한 에피소드에 45분, 한 시즌에 8편이 있다. 호흡이 꽤 길다. 정말 다양한 이야기와 인물들이 강하게 담겨 있지만, 마치 해리포터 시리즈에서 '부모님의 사랑'으로 해리포터 전부를 설명할 수 있듯, <Anne with an E>에서 내가 느낀 주제도 두세 가지 정도다.
낯선 타인을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용감함
내가 싫어하는 점을 용납하는 용서
자신이 인정한 솔직한 모습으로 사랑받는 겸손함.
용서는 내가 납득이 되어서 하는 게 아니다. 오랫동안 이해한다는 건 포기하는 거라 생각했었다.
아니었다. 이해한다는 건 용서였다.
살면서 내가 진심을 담아 용서라는 걸 해보았나? 아마 어려운 이유는 어느새 나도, 사람들도 솔직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앤은 항상 사고를 친다. 솟구치는 호기심과 행동력은 늘 사건을 만든다. 사랑받기 위해 이기적으로 군다. 가족으로 맞아준 매슈와 마릴라에게도, 온 마을 사람에게도 휘집어 놓으면서. 휘집는 사람은 상처 주기 마련이다. 그래서 앤은 매일 사과한다. 자신을 자책하면서까지 진심으로 사과를 한다. 앤의 사과를 누군가는 기꺼이 받아주었지만 누군가는 상처 받은 얼굴로 앤의 뺨을 때려버리기도 한다. 네가 뭔데 내 삶에 들어와 멋대로 훼방을 놓냐고. 앤은 분명 훼방꾼이다.
내가 <빨간 머리 앤>을 판타지 같은 동화라고 결론을 냈던 이유는 결국 모두가 앤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과한 표현과 멋대로 정의의 사도가 되기도 하는 앤의 속마음과 선한 의도를 결국 이해했기 때문이다.
사랑받으려고, 살아내려고 애쓰는 앤의 과거까지 받아내었기 때문이다.
관계를 깊게 맺는다는 건, 백화점에 가서 내가 원하는 것만 골라내 담는 것이 아니다. 그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 주변을 내 마음에 드는 걸로만 꾸릴 수 있다면.
내가 앞으로 살면서 그런 받아들임을 겪어볼 수 있을까. 또 나는 그럴 수 있을까. 지금도 내가 취하고 싶은 것만 취하면서도 모자라다 투정 부리는데.
관계를 '맺는다'는건 어떤 걸까. 타인이 데려오는 세계는 내가 하는 어떤 경험과 발 딛는 세계보다 클 수밖에 없다. 그 세계를 받아들이려면 내 세계를 내려놓아야 한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관계는 사실 별로 없다. 나는 운 좋게도 그런 가족과 친구들을 여럿 두었다. 내가 바닥을 쳐도, 철 없이 굴고 못되게 굴어도(미안해 사랑해).
나이가 들어 만나는 사람과는 그러기 어렵다. 너무나 타인이기에. 정말 너무도. 우리는 할 수만 있다면 진심으로 내 울타리 안에 아무도 들이고 싶지 않을 거다. 굉장한 스트레스니까.
앤은 가족 없이 자신을 받아들여주지 않는 환경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언젠가 날 받아주는 누군가를 만나면 무한 사랑을 드리리 꿈꾸며. 앤의 언어로는 '마음이 통하는' 누군가.
앤과 커스버트 남매는 닮은 점이 하나도 없다. 심지어 그 만남은 실수였다. 매튜와 처음 만났을 때 '마음이 통한다'라고 생각한 것도 어쩌면 앤의 착각일지도 모른다. 매튜의 딱 한마디 때문이었다.
"제가 말이 너무 많다고 생각하세요? 말을 그만 할까요?"
"괜찮다"
항상 사람들이 거부했던 모습인데 매튜가 별 뜻 없이 뱉은 '괜찮다' 말 한마디에 앤은 마음을 다 주었다.
나는 마릴라를 볼 때마다 푸근해졌다. 결혼하지 않고 묵묵히 변화 없이 살아온 마릴라는 강제로 타인을, 감정을 경험하기 시작한다. 거리도 둬보고 방어도 하고 화도 냈지만 무법자 같은 변화에 속수무책으로 휩쓸렸다. 이 방향이 맞는지 틀린 지 모르겠지만 이 안타까운 소녀를 사랑하기로 했다. 어쩌겠는가.
말 그대로 어쩌겠는가. 모든 관계 맺음은 내 의도가 아니다. 더군다나 사랑한다는 건 사고 같은 일.
긴 시리즈를 한 번에 리뷰하려니 쓰고 싶은 생각이 넘쳐난다. 처음 만날 날부터 앤을 좋아했고 몇 년 만에 서로 마음을 확인한 (너무 잘생긴) 길버트와의 이야기는 하나도 못했는데.. 이성간 로맨스가 아니더라도 <Anne with an E>에는 판타지에 가까운 로맨스가 넘쳐난다. 조금 다른 칼과 조세핀 할머니 이야기도!
영상도 훌륭하고 색감도 훌륭하다. 한 번에 몰아서 보니 시즌이 더해갈수록 옅어지는 채도와 깊어지는 색감을 몸소 느낄 수 있었다.
정말 좋은 작품이었다. 두꺼운 성장 문학 장편을 한 권 읽어낸 기분이다. 살면서 가장 어려운 건 내 장래나 자아 찾기가 아니란 걸 다시 깨닫게 되었다.
피하려면 피할 수도 있지만, 피하기만 한다면 결국 가난해져 버리는 타인과의 관계다.
모두가 앤처럼 진심으로 사과하고 매튜처럼 연민하며 마릴라처럼 용기를 가지면 얼마나 좋을까. 아, 내가 먼저.
눈 내리는 입춘이다. 입춘을 맞기 전 따듯한 밀크 코코아 같은 앤을 만나서 다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