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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mmer Bom Mar 19. 2020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김초엽

거기서도 같은 고민과 같은 사람이 있었다.

소피,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까.


내가 어느새 소피가 되어버린 첫 문장. 이 문장을 읽고 기분이 좋아졌다. 개운했달까. 그녀의 세계로 초대된 기분, 낯선 세계지만 '소피'가 되었으니 무섭지 않았다.



우리나라 말로 쓰인 문학을 읽겠다 다짐한 한 해다. 글을 잘 쓰고 싶은데 다양한 방법으로 잘 쓰인 글을 많이 보는 게 도움이 되겠다 싶었다. 무엇보다 같은 언어는 거칠 것 없이 몰입이 되어 좋았다.

장르 소설은 거의 읽지 않았다. 추리 소설만 가끔 읽었지만, SF라니. 그런 건 영화로 보는 게 좋았다. 글로는 이해하고 상상해야 할 세계가 너무 커서 스토리에 집중하기 힘들었었다. 하지만 이런 편견 속에서도 책을 향한 자자한 호평에 너무 궁금해졌다. 워낙 잘 쓴 글이라고 하니, 읽는 맛은 보장이 될 게 분명했다.


꽤 두꺼운 이 책은 7편의 단편 모음이다. 장편이라고 생각하고 읽다가 세 번째 에피소드부터 뭔가 이상하다 싶었다. 그때까지 몰랐던 이유는 주인공과 소재만 달라졌을 뿐, 큰 세계관과 캐릭터의 배경이 비슷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김초엽이란 작가가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 어떤 캐릭터를 좋아하고 어떤 세계를 꿈꾸는지 와 닿아서 좋았다. 한 작가가 한 번에 주욱 쓴 글 같아서.


SF 소설이라 분류해야 할까? 내게 이 책은 장르로 치자면 '드라마'에 가깝게 느껴진다. 굳이 과학 지식과 세계관을 다 이해하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말하고자 하는 건 다른 세계가 아닌 여기서와 같은 인간이다. 결국 보편적인 이야기였다.


좋았던 단편 두 작품과 몇 문장을 적고 싶어 이 리뷰를 썼다.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어쩌면 일상이 균열을 맞닥뜨린 사람들만이 세계의 진실을 뒤쫓게 되는 걸까?

나에게는 분명한 균열이었던 그 울고 있던 남자와의 만남 이후로, 나는 한 가지 충격적인 생각에 사로잡혔어.

우리는 행복하지만, 이 행복의 근원을 모른다는 것. p. 19


지구에 남는 이유는 단 한 사람으로 충분했을 거야. p. 53


그때 나는 알았어.

우리는 그곳에서 괴로울 거야.

하지만 그보다 많이 행복할 거야. p. 54



<관내분실>

그녀도 아이를 가져서 두려웠을까. 그렇지만 사랑하겠다고 결심했을까. 그렇게 지민 엄마라는 이름을 얻은 엄마. 원래의 이름을 잃어버린 엄마. 세계 속에서 분실된 엄마.

그러나 한때는, 누구보다도 선명하고 고유한 이름을 가지고, 이 세계에 존재했을 김은하 씨. p. 267


어떤 사람들은 마인드가 정말로 살아 있는 정신이라고 말한다. 어떤 이들은, 이건 단지 재현된 프로그램일 뿐이라고 말한다. 어느 쪽이 진실일까? 그건 영원히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어느 쪽을 믿고 싶은 걸까? p. 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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