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용할 수 없는 것을 형용하려 했던 지난 시간에 대한 위로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을 사러 동네에 작은 문학 서점에 들렀다. 여성작가 코너에서 열심히 찾아보았지만 서점 주인이 그 책은 마침 떨어졌다고 했다. 거기엔 자주 내가 원하는 책이 없었다. 다자이 오사무, 페르난두 페소아도 그랬고 헤르만 헤세의 책도 그랬다. "아, 없어요?" 하며 짧게 탄식하며 문을 열고 나오는 날이 대부분이었다. 그 날은 못내 아쉬워 서점을 한 바퀴 돌았다. 읽을거리를 뭐라도 발견하고 싶었었다. 그 좁은 공간을 천천히 반 바퀴쯤 돌았을까. 눈길이 멈춘 책이 있었다. <사랑에는 사랑이 없다>.
대체 그게 뭐 길래. 유독 감정이 송곳처럼 들쑤시는 날이었다. 콕콕도 아니고 푹푹. 피만 나지 않는 공격이 계속해서 날 괴롭게 하던 날.
사랑 노래, 사랑 영화, 특히 해피 엔딩을 좋아하지 않는 내가, 내 손으로 이 책을 들어 첫 장을 펼칠 줄은 몰랐다. 모르던 사이, 내게 결핍이었던 모양이다. 서점을 배회하다 보면 이렇듯 늘 자만하던 내 결핍을 발견하게 된다.
구매까지 하게 된 건 프롤로그를 읽고 나서이다.
멜로드라마처럼 사랑을 도구로 삼아 사랑을 소비해 온 문화들이 우선 사랑의 적으로 간주해야 한다. 사랑을 낭만적 영역이라 치부하고 탐구를 외면해 온 시선 역시 사랑의 적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 사랑을 멜로로 연결 짓고 식상해하던 습관이 사랑에 대한 결례라는 걸 우선 알아채야 했다.
(...) 사랑에 대하여 무지한 채로도 사랑을 했던 나 같은 이들이, 사랑으로부터 소외되는 것으로써 사랑을 소외시켜왔던 것이다.
사랑 노래, 사랑 영화는 별로야.라고 했던 내 단어 선택이 잘못되었음을 알았다. 나는 사랑이 별로지 않다. 사랑을 멜로나 낭만에 덧씌워 도구로 소비하는 모습에서 모순을 느껴왔던 것이다. 알랭 드 보통의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을 읽을 때와 비슷한 기분. 우리는 기꺼이 사랑을 망쳐 온 로맨스를 파괴해야 한다고.
쉽게 읽혔다기 보단 정신없이 읽어 내려갔다. '집어삼킬 듯'이란 형용사도 덧붙인다. 연애는 꽤 보편적인 일이지만 사랑은 또 그렇지 않다. 연애 얘기를 하기는 쉬워도, 사랑 얘기를 하긴 쉽지 않다. 그래서 늘 연애 이야기가 쉽게 소비되고 유희 거리 삼아지는 것에 불만이었다. 그 정도 이야기는 드라마가 더 재미있는데, 우리가 눈을 마주치고 나누는 이야기는 그것보단 더 끈끈하고 추해도 되지 않겠어? 하는 생각에 나른한 지루함을 느꼈었다.
나 역시 사랑 이야기를 잘하지 못한다. 온몸이 간질거리면서 곧 장난기를 머금은 표정으로 대화를 중단하고 싶어 지기 일쑤였다. 그러니까 그건, 내가 사랑을 로맨스라고 오해해서 생기는 부작용 같은 것이었다.
사랑하는 사이는 곧 연애하는 사이라는 한 가지 공식에서 멀리 벗어나기는 어렵겠지만 더 이상 오해하지 않는다. 연애하는 사이가 다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라는 역이 쉽게 성립되고, 사랑이 끝난다고 관계가 사라지거나 실패하는 게 아니다.
내 몫은 그냥 사랑이 사랑 구실을 할 수 있도록 계속해서 헛발질을 하는 것.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누군가를 곁에 두되, 다른 노선은 정녕 없는 걸까. 불안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불안을 연료로 사용할 수는 없는 걸까. (...) 목표를 향해서 헛둘헛둘 뛰어가는 게 아니라, 목표를 지워버린 채로 출렁이는 불안의 요동에 리듬을 맞춰 그렇게 하면 좋겠다. p.1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