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에 임박했음을 느끼는 건 역시 공기다. 특히 이른 오전에 잘 느껴지는 그 공기에서는 맵싸래한 겨울 무의 향이 은근히 깔려있다. 그래서 가끔 코가 찡하다가 머리까지 쨍해지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여름내 가득했던 수분이 온데간데 없어졌음을 발견하면 아, 겨울이 왔구나, 하고 탄성을 지르고야 만다.
그렇게 겨울이 다가오면 한동안 바빠진다. 나름의 월동준비가 있다. 대개 겨울 무의 향이 깔리는 시기는 11월 말경이다. 오전 외출에서 겨울 공기를 맡으면 집에 돌아오자마자 붙박이장을 활짝 열어젖힌다. 지난겨울의 마감 때 세탁을 마치고 제습제와 함께 숨죽이고 지내던 외투들과 멋쩍게 안부를 물어야 한다.
세탁 후 들어간 외투들은 여전히 보송함을 유지하고 있다. 붙박이장에서 건강했는지 잠시 외투에 코를 묻고 킁킁거린다. 조금 남아있는 기름 성분의 드라이클리닝 세제 냄새가 튀어 오른다. 짧은 인사를 마친 후에는 낑낑거리며 외투들을 드레스룸으로 옮긴다. 드레스룸에서 가을 한 철 고생했던 외투들은 세탁소로 떠날 채비를 한다.
외투 말고도 지난겨울 입었던 스웨터와 바지, 겨울용 셔츠와 머플러 등도 모두 꺼낸다. 집어넣을 때는 다음 겨울에도 입겠다고 다짐했던 물건들의 특징이 있다. 다음 계절이 돼서 꺼내면 당시에는 보이지 않던 보풀과 해짐, 색바램이 적나라하게 표 난다는 것. 왜 항상 당시에는 보이지 않고 시간이 지나야 보이는 걸까. 결국 물건들도 인간사와 닮아있다. 얼마쯤 시간이 지나야, 현실에서 얼마쯤 떨어져야 보이는 진실이나 마음 같은 것들. 그런 모습 말이다.
색이 바래고 해진 옷가지는 미련 없이 헌옷함으로 털어낸다. 보풀은 보풀제거기로 좍좍 밀어보지만 영 시원찮다면 역시 헌옷함으로 떠난다. 강아지옷도 마찬가지다. 겨울옷을 담아둔 정리함을 꺼내 제습제를 교체하고 여름옷과 가을옷을 넣는다. 지난겨울 입었던 강아지 옷들 중에는 역시 당시에는 보이지 않던 해짐이 드러난다. 강아지옷은 헌옷함으로 갈 수도 없다. 쓰레기통으로 보내기 전 잠시 매만지며 인사를 고한다.
옷정리를 마치면 월동준비를 부엌으로 옮겨간다. 냉장고를 열어 남아있는 과일을 헤아린다. 귤이 있다면 좋고, 사과나 레몬도 좋다. 겨울나기에 빠질 수 없는 과일청을 만들어야 한다. 과일을 삭삭 문지르고, 설탕을 조금 적게 넣어 청을 한 두병 담가두면 아침 일찍 출근하는 남편의 텀블러에 온기를 넣어주기 좋다.
평소엔 단 걸 먹지 않는 나도 겨울에는 과일청으로 차를 마시기를 즐긴다. 마침 냉장고에는 레몬 두 개가 있다. 레몬은 세척이 귀찮지만 별 수 있나. 안 씻으면 나만 손해다. 부지런히 세척하고 끓는 물에 샤워까지 마친 레몬으로 레몬청 작은 병 하나를 담갔다.
이윽고 12월에 도착한다. 확실한 겨울에 들어서면 매일 아침마다 절차가 하나 늘어난다. 세탁실과 베란다 구석에 곰팡이가 피지 않았나 확인하는 일이다. 이사 와서 첫겨울에는 세탁실이 얼까봐 환기를 한 번도 안 시켰더니 곰팡이가 폈다. 친한 언니가 조언을 해줬다.
“세탁실 창문을 아주 조금만, 1센티 정도만 열어둬. 그럼 곰팡이가 안 생겨.”
“창문 열어두면 세탁실이 얼지 않아?”
언니는 안심시키듯 천천히 답했다.
“아니야, 그 정도로 얼진 않아. 그렇게 안 하면 어느 집이든 곰팡이가 생길걸?”
그 이야기를 들은 이후 항상 창문을 조금은 열어둔다. 곰팡이는 생기지 않았다. 다만 아침에 곰팡이를 확인하는 건 어떤 뿌듯함을 얻기 위해서다.
‘아, 역시 창문을 열어두니 곰팡이가 안 생기는구나! 잘 관리하고 있어!’
이렇게 스스로 잘 점검하고 있음을 확인하는 소소하고 조금 유치한 뿌듯함을 얻는다.
12월의 첫 주말에는 남편과 크리스마스트리를 꺼내 장식한다. 트리의 가지를 넓게 펴주고 조명을 걸고 오너먼트를 걸면 반짝거리는 겨울이 우리 집 거실로 숭덩숭덩 들어온다. 거실에는 평소에는 잘 꺼내지 않던 담요도 하나 놓아둔다. 그냥 앉아있어도 괜찮지만 왠지 겨울에는 담요를 하나쯤 덮어줘야 추위로부터 온전하게 숨은 기분이 든다. 꼭꼭 숨어 이곳에서 봄을 기다리겠다는 의지의 담요다.
올해 남편의 생일상. 모카도 함께 축하해준다..
그렇게 조금씩 겨울 대비를 하다 보면 확실한 나만의 겨울 신호가 찾아온다. 남편의 생일과 결혼기념일이다. 예전에 남편과 결혼날짜를 정할 때 설 명절이 가까워 피하고, 내 생일과 같은 달이라 피하고 나니 다음 해 봄에나 결혼할 상황이었다. 그랬더니 남편은 결혼을 빨리 하면 모를까 늦게 하고 싶진 않다며 12월로 앞당기자고 졸랐다. 그해 12월에 이런저런 날을 피하고 나니 남편 생일 다음날이 남았다. 생일 다음날 결혼이 괜찮겠냐는 질문에 남편은 다 좋다고 했다. 그래서 12월 중순에 남편의 생일과 결혼기념일이 하루 차이로 기록됐다.
생일 무렵에 결혼하면 결혼기념일과 생일을 한 번에 퉁칠까 봐 안 하겠다고 까탈부리던 나와 달리 결혼하면 뭐든 괜찮다던 착한 남편이다. 그러니 생일과 결혼기념일은 명확히 구분해서 챙겨주고 싶다. 남편의 생일은 평소보다 좀 더 신경 써서 음식을 차려주고, 케이크도 맛있는 집을 찾아 미리 주문한다. 올해 생일에는 갖고 싶다던 자전거를 사주고, 그림도 하나 그려줬다. 남편이 아주 많이 행복해했다. 다음날인 결혼기념일에는 가볍게 외식을 하고 산책을 했다.
그렇게 우리 가정의 행사를 치르고 나면 이제 여간해서 가을의 정취를 찾을 수 없는, 앞뒤로 꽉 차오른 겨울이다. 월동준비는 얼추 마쳤고, 나와 내 가족은 준비된 온기 속에서 겨울을 무탈하게 보내기만 하면 된다. 안온하게, 그저 보송하게 겨울을 난다. 사계절 중 유난히 길게 느껴지는 겨울을 뚝딱뚝딱 낮은 소리를 내며 지내다 보면 살얼음 낀 흙바닥에서 반가운 계절이 찾아오게 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