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딘가에서 책 소개글을 보고 같이 읽고 싶어서 내가 추천한 <슬픔의 방문>이었다. 우리가 다 알만한 시사주간지의 기자인 저자가 딱 한 가지만이 아닌 자신을 둘러싼 여러 주제에 관해 이야기를 꺼낸다.
나는 읽는 내내 관통당하는 기분이었다. 살면서 경험한 여러 일들이 있고, 그중 부정적이었던 경험은 마치 돌멩이처럼 내 안에 남아있다. 이를테면 결석 같은 건데, 살면서 느낀 어려움이라든가 상처 같은 게 결석으로 굳은 느낌이다. 그 결석처럼 남아있는 기억이 내 안에서 종종 덜그럭거리는데 <슬픔의 방문>에서 언급하는 주제들이 몸 안에 결석들을 관통했다.
물론 그 관통이 시원하게 결석을 깨뜨리는 레이저 같기도 하면서 그저 같은 결석을 공유한 사람의 위안 같기도 했다.청소년기에 접어들면서 시작된 가난의 기억이라든가, 책에 대한 애정, 기자생활, 무자녀 가정의 생활 등 주제들이 어쩜 이렇게 비슷할까 신기할 정도였다. 하지만 나와 저자의 생이 닮았다기보다는 그러한 주제를 관통하는 여성들의 경험은 대개 닮아있다.
특히 성폭력 피해를 언급한 용기는 꼭 높이 사고 싶었다. 누군가는 그런 우울하고 아픈 경험을 말해 뭐하느냐 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나라에서 성폭력 피해자 대부분은 여성이다. 그리고 유교문화가 뿌리 박힌 이곳에서 성폭력 피해는 수치와 동일시된다. 그래서 피해자 대부분이 여성이고, 집계에서 빠진 더 많은 여성은 수치로 인해 신고조차 하지 못한다. 그리고 평생 끌어안고 산다. 자신의 수치로, 자신의 문제로.
그렇기에 성폭력 피해를 세상에 꺼내 보이는 자가 있을 때 피해를 꽁꽁 숨기던 사람들이 조금씩 용기를 내 신고를 하고 가해자를 지목하고 치유를 시도할 수 있다. 엉킨 실을 움켜쥐고 사는 여성이 겨우 실을 풀어나갈 수 있는 거다. 우울하고 아픈 경험을 말해 뭐하냐고 한다면 말했기에 살아낼 수 있는 거라고 대답하고 싶다.
책에서 마음에 남았던 문구 몇 개가 있다.
나는 안다. 평범이나 평균은 허구라는 걸. 평범이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모두들 평범을 바라는 거라는 걸.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랐다.
누군가에게 빛 지지 않고 쓸 수 있는 기사는 없다. 기사란 대부분 누군가의 불행과 불편에서 출발한다.
20대에 4년간 기자생활을 했다. 그만두기 전에 너무 힘들었다. 나는 기자질이 천직이라고 믿었다. 살면서 가장 반짝였던 시절, 또한 가장 무성하게 자라났던 시절도 언론에 몸담을 때였다. 그럼에도 업계를 떠나왔다. 일할 때 화가 나면 욕을 그렇게 했는데 그만둘 땐 욕은 안 나오고 눈물만 났다.
너무 힘들어서 내 발로 나오면서도 나는 비겁하게 언론계에 좋은 사람들이 많이 남아있길 바랐다. 여기서 좋은 사람이란 선량하고 이타심이 많은 종류의 사람이라기보다는 양심 버리는 일은 피하고, 피곤하더라도 제 몫을 완수하고, 회사 밖의시간에도 내일은 어떤 의미 있는 취재를 해야 할까 골몰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언론계가 너무 더럽게 변질되지 않기를 바랐고, 힘을 모조리 뺏긴 종이인형처럼 되는 걸 우려했다. 그래도 막상 현업에 있는 기자의 글을 읽고 나니 내 생각이 얼마나 기우인지 깨달았다. 저자의 삶과 저자가 만난 사람들의 삶은 막다른 골목을 종종 맞닥뜨리는 이들에게 양분이고 피로감을 덜어주는 에어맥스였다. 제목은 슬픔이 방문하는 우울한 분위기지만 이번 독서의 결론은 슬픔과 고단한 생을 헤쳐 나온 여성의 단단한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