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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척하는 시절

멀쩡히 살아있지만 잠시 죽은 척하는 시기

by 귀리밥

심리상담을 시작했다. 병원에서도 상담이 이루어지지만 아무래도 환자들이 계속 기다리다 보니 상담이 10분을 넘지 않는다. 그래서 병원 밖에서도 내 안의 어려움을 집중적으로 해결하고자 심리상담을 생각했다.


심리상담이 처음은 아니었다. 과거 우울증을 겪을 때 심리상담을 여러 차례 받았고, 남편과 부딪히는 일이 생겼을 때 부부 상담을 받기도 했다. 우울증을 겪을 때 받은 심리상담은 큰 도움이 됐다. 이번에도 잘 맞는 심리상담사를 만나 우울증을 떨치기 위한 지지를 얻고 싶었다.


물론 여기서 확실하게 알아야 할 점이 있다. 심리상담만으로 우울증은 회복되지 않는다. 과거 심리상담은 병원에서 약 복용까진 필요 없다는 진단을 받은 후 등록했고, 이번에는 병원 치료와 병행하는 방식으로 등록했다. 심리상담만으로 의료효과까지 기대한다면 세상에서 가장 부담스러운 직업이 심리상담사가 될 게 분명하다.


집에서 멀지 않은 심리상담센터들을 검색했다. 평점이 좋고 상담사의 나이가 너무 젊지 않은 곳으로 알아봤다. 젊은 심리상담사는 그 나이대에 맞는 상담이 이루어지는 장점이 있지만, 내 경우 이미 중년의 나이가 됐으니 나보다 연륜이 깊은 상담사를 만나고 싶었다.

이곳저곳을 살펴본 뒤 고른 심리상담센터에서 J 상담사와의 인연이 시작됐다. 상담사는 올해 58세로 상담사 경력이 30년 가까이 되는 분이셨다. 그래서 내가 겪고 있는 어려움을 잘 파악해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있었다. 내 우울증의 시작이 가족관계와 성장환경에서 비롯됐다면 이번 재발의 원인은 내내 아리송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자격증 공부를 너무 열심히 했나? 아니면 과거 우울증의 원인이 다시 발현된 게 있나? 혹은 마흔이 넘어가면서 느끼는 상실감? 대체 원인이 뭘까?’


우울증의 원인을 파악해야 적절한 치료와 회복을 시도할 수 있는데 도통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 원인을 찾고 해결하는 것을 심리상담의 목표로 잡았다.


처음 J 상담사와 일정을 잡고 센터에 방문했다. 은은한 아로마향이 머무는 장소에 대기하다가 상담실로 들어갔다. 웃으면서 반겨주는 J 상담사는 차분하면서도 명료한 성격이 상담 내내 느껴졌다. 상담사는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증상을 인지했을 때의 상황과 마음 등 여러 가지를 여쭤보며 위로를 해주셨다.


“정말 열심히 살아오셨네요. 아주 성실한 분이세요. 그런데 도란 님은 왜 그렇게 열심히 사시는 걸까요?”

“네? 글쎄요, 그냥 성격 아닐까요?”

열심히 산다고 하면 으레 긍정적인 의미 아니었던가? 왜 열심히 사냐는 질문에 대답이 두루뭉술해졌다. 완벽주의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완벽하지 못하기에 완벽해지고 싶어 애쓰는 완벽주의자. 그러다 보니 언제나 성실하고 실수를 용납하지 못했다. 상담사는 내 이야기를 들으며 다시 질문했다.

“다들 그 정도로 열심히 살진 않거든요. 안 하던 공부를 그렇게 기를 쓰고 한다던가, 체력이 떨어졌다고 운동을 그리 열심히 하지 않아요. 뭔가 도란 님이 열심히 살게 된 이유가 있을 텐데요.”


아니, 이럴 수가. 열심히 사는 이유가 뭔지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던 걸 깨달았다. 성인이 된 이후 줄곧 그랬다. 대학 시절에는 학교에 다니며 여러 개의 아르바이트를 해서 학비를 벌고 집에 생활비도 조금씩 드려야 했다. 취직 후에는 집에 생기는 크고 작은 사고 때문에 밑 빠진 독 같은 가족에게 돈을 써야 했다. 꿈에 그리던 기자가 되고는 일이 바빠 하루에 3시간 넘게 잔 적이 없었다. 결혼 후 프리랜서가 되면서는 일이 많아져 잠을 줄여가며 일했고, 지방 출장도 숱하게 다녔다. 그런 열심의 표본으로 살아온 나의 이유, 그건 대체 어디에 있을까?

여러 차례 상담을 받으며 J 상담사와 내가 찾아낸 원인은 성인이 되면서 생긴 가족에 대한 책임감, 부담으로 인해 성실하지 않으면 불안해지는 성정을 갖게 된 것으로 파악했다. 실제로 나는 부족한 시간을 메꾸기 위해 잠을 줄이는 선택을 했다.


20대에는 하루에 3~4시간, 30대부터는 쭉 하루에 5시간 정도를 잤는데 수면 부족은 우울증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한다. 게다가 나는 최근 마흔이라는 선을 넘었다. 이제 적은 잠으로, 끝없는 노력으로 상황을 완화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다.


“도란 님은 자기 나이를 수용하는 연습을 해야 될 것 같아요. 나이가 들면 체력이 줄고 여러모로 기능이 떨어지게 되거든요. 그게 당연한 거예요. 그런데 사실 받아들이기 힘들죠. 받아들이기 힘드니까 예전 20대, 30대 때처럼 기를 쓰고 노력하고 무리하는 거예요. 나는 여전히 활력이 넘치고 뭐든 잘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지만, 몸은 그 생각에 따라주지 않거든요. 그러다 보니 무리를 하고 도란 님처럼 우울증과 공황장애가 오는 거죠.”


공황장애는 몸이 정신을 따라가지 못할 때 몸이 보내는 신호라고 한다. 지금 위험하다고, 쉬어야 한다고. 오랫동안 몸의 신호를 모른 척 한 내게 공황장애는 인과에 다름없었다. 그리고 뇌는 지칠 대로 지쳐 우울증이라는 질환이 생긴다. 일상에서는 전전긍긍하고 자면서도 나도 모르게 걱정하고 이런저런 생각으로 가득하여 뇌가 고장 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저는 여전히 일을 잘할 수 있고 부족한 체력은 운동으로 채워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노력으로 안 되는 게 없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어요. 그런데 일은 예전만큼 들어오지 않고, 잔병치레는 늘었어요. 나는 잘할 수 있는데 주변에서 나를 인정하지 않는 느낌이에요. 나이를 받아들이는 건 너무 어려운 일이에요.”

“당연하죠. 그러면 죽은 척하는 시기라고 생각해 보세요.”

“죽은 척이요?”

“나는 일도 잘하고 건강하고 다 잘할 수 있지만, 지금은 나이가 들면서 예전만큼 활약하지 못하는 거잖아요. 나는 멀쩡히 살아있지만 잠시 죽은 척하는 시기다,라고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 죽은 척하는 이 시기에 열심히 살았던 나에게 휴식을 주고 다시 도약하기 위한 준비를 하는 거죠. 공부를 해도 되고 푹 쉬어도 되고 취미활동을 늘려도 좋아요. 지금 도란 님은 죽은 게 아니라 죽은 척만 하는 시기니까요. 죽은 척한다고 해서 도란 님의 유능함이 사라지는 건 아니에요.”

죽은 척을 해보자는 제안에 나는 작게 탄성을 질렀다. 언제나 열심히 살아야 할 것, 규범을 넘지 말 것, 타인에게 피해 주지 말고 살 것, 부족한 부분은 늘 노력으로 채울 것. 당연하게 지켜온 삶의 태도는 늘 옳다는 결론으로 이어지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이 녹슬어감을 깨닫지 못했다.


그런 내게 “잠시 죽은 척해도 된다.”라는 제안은 이제부터 잘 쉬어보자는 따뜻한 독려였다. 무엇을 위해 열심히 사는가, 무엇이 나를 살게 하는가, 우리는 왜 사는가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내밀고 제대로 삶을 들여다본 적이 살면서 몇 번이나 있을까.


J 상담사와의 심리상담은 반드시 만나야 했던 생의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한 필수코스였다. 언젠가 시간이 흘러 내 나이 마흔하나를 떠올리면 큰 고비로 기억될 것임을, 그 고비는 살아가는 데 필요한 수순이었음을 인정하고 이해하며 죽은 척 커다란 휴식을 시작하는 단계. 무겁고 서러웠던 마흔의 멍에를 벗어내는 데 심리상담은 아주 큰 도움이 됐다.


요즘 나는 죽은 척의 달인이 됐다. 예전보다 일이 들어오지 않으면 “오히려 좋아!”를 말하며 친구들을 만나고 취미를 즐기고 미술관에 간다. 열심히 자격증 공부를 하는 동안 못 봤던 책과 드라마를 실컷 보고, 남편과 강아지와 시간을 많이 보내려 한다. 졸리면 일찍 자고, 일찍 깨도 그대로 침대에 누워 쉼을 즐긴다. 잠이 오지 않는 밤엔 뇌에게 말도 건다.

“뇌야, 나 이제 푹 잘 거야. 너도 경계 풀고 자도 돼. 우린 아무 문제없어. 걱정거리도 없어.”


매일 5시간 남짓 자던 나는 최근 9시간을 잔 날도 있다. 독감과 코로나19에 걸렸을 때를 제외하곤 처음 길게 잔 날이었다. 나의 죽은 척 시절은 생각하기에 따라 달콤하고 평화롭고 은근하다. 죽은 척이 얼마나 갈지는 나도 모른다. 죽은 척의 기간을 조금 뻔뻔하게 정해뒀기에 끝을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나는 잘하고 있다. 죽은 척하며 다시 멋진 번성을 꿈꾼다. 죽은 척은 행복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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