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운들이 전두엽의 아픔을 살균 소독하는 게 느껴진다
어느 날 상담을 마칠 무렵 J 상담사는 내게 과제를 내줬다.
“노력 없이 얻은 행운이 뭐가 있는지 생각해 보고 다음 시간에 이야기할게요.”
“노력 없는 행운이요? 그런 게 존재할까요?”
J 상담사는 크게 웃었다.
“도란 님은 워낙 노력하는 성격이고, 지금까지 노력으로 모든 성과를 내 온 사람이니 그렇게 생각할 수 있어요. 그런데 차분히 생각하면 분명 있을 거예요. 일주일간 생각해 보고 오세요.”
행운이란 건 ‘운수’다.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천운과 기수가 운수이고, 행운은 좋은 운수란 뜻이니 인간의 노력이 들어가지 않는 것은 맞다. 하지만 노력 없는 얻는 게 살면서 얼마나 될까? 노력 없이 얻은 게 있었나? 오히려 노력해도 얻지 못하는 게 더 많지 않을까? 내가 살면서 확실히 깨달은 게 있다면 노력은 배신을 잘한다는 점이었다.
그런 내게 노력 없이 얻은 행운을 찾아오라니, 이토록 어려운 과제가 또 있을까. 집에 와서 남편에게 물어봤다.
“여보는 노력 없이 얻은 행운이 있어?”
“너? 친구들?”
“에이, 나를 만나고 친구들이 생긴 건 여보의 노력이 어느 정도 들어가는 거잖아. 인간관계에 노력 하나 들어가지 않는 게 있겠어?”
“그럼 회사?”
아휴, 말을 말자. 상담사가 생각해 보라고 한 건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고, 의외로 노력 없이 행운을 누리며 살고 있음을 깨닫게 해 주기 위함이라고 생각했다. 소파에 누워 내 나름의 죽은 척을 하며 노력 없이 얻은 행운을 곰곰이 생각해 봤다. 오랜 시간 고민한 뒤 메모장에 적은 노력 없이 얻은 행운은 다음과 같다.
온라인으로 장을 봤는데 내가 주문한 게 아닌 다른 물품이 왔다. 오배송이었다. 그래서 내가 산 물건은 환불을 받았고, 우리 집에 잘못 배송 온 제품은 업체에서 “입맛에 맞다면 드셔 달라.”라고 했다. 내가 주문한 것보다 훨씬 비싼 식재료였다. 행운!
얼마 전 산책 중에 500원을 주웠다. 행운!
회사 다닐 때 추석 연휴를 앞두고 대표님이 선물세트를 너무 많이 받았다며 직원들에게 나눠준다고 내놨다. 그때 가위바위보를 해서 70명 중에 스팸세트를 받았다. 행운!
우리 강아지는 정말 예쁘고 착하다. 세상에 수많은 강아지 중에 이렇게 멋진 강아지가 온 건 내 노력이 아니었다. 행운!
여전히 성실한 성향을 버리지 못하는 나는 이 목록을 적어 다음 상담에 가져가 읊었다. J 상담사가 재미있다며 아주 크게 웃었다. 상담사는 그날 낮에 센터 뒤 메타쉐콰이어 길을 걷는데 내가 이 나무들에 물 한 번 준 적 없고, 내가 심은 나무도 아닌데 굉장한 청량함을 느낄 수 있었다고 노력 없는 행운이었다는 경험을 들려줬다. 그리고 내게 행복해지는 비결 하나를 알려줬다.
“이렇게 노력 없는 행운을 조금씩 찾아보세요. 집에서 비 오는 날 창밖을 보며 빗방울이 창문을 때리는 소리를 들으면 기분이 좋잖아요. 그런데 비는 내 노력으로 내리는 게 아니거든요. 그런 행운들을 자꾸 찾아봐요. 그리고 입으로 ‘좋다!’라고 말하면서 기분 좋은 순간을 음미하는 거예요. 그런 게 쌓이면서 행복해지는 거예요. 우리 그런 노력 없는 행운 얼마든지 찾을 수 있잖아요.”
“그렇게 생각하면 제게도 노력 없는 행운이 많아요. 매일 강아지와 산책하면서 보는 풍경에 감탄하는데 그 공원을 제가 만든 건 아니거든요. 라디오를 틀면 좋은 음악이 흘러나오는데 그 음악을 만드는 노력은 뮤지션이 한 거고요.”
“도란 님이 쓴 책이 누군가에게 노력 없는 행운일 수도 있어요. 누군가가 도란 님의 책을 읽고 감동을 받고 어떤 응원을 얻었다면요. 도란 님의 노력이 타인에게 행운과 행복이 되는 거예요. 그건 도란 님에게 또 다른 종류의 행복이죠? 그렇게 한 번 상상해 보세요. 도란 님이 쓴 책이 누군가의 가방 속에, 가방과 가방을 건너 외국의 어느 마을에, 이름 모를 누군가가 읽고 행운이라 느낀다고요.”
생각할수록 내 곁의 노력 없는 행운이 꾸물꾸물 일어난다. 아주 많은 행운이 곁을 채우고 있는데 그동안 몰라본 건 아닐까. 이날부터 나는 매일 밤 그날 만난 노력 없는 행운은 무엇이었을까 생각해 본다. 아주 사소하게라도 노력 없는 행운이 매일 일어났다.
오늘은 유난히 그림이 잘 그려졌어, 오늘은 오랜만에 친구로부터 반가운 안부 연락이 왔어, 산책할 때 마주친 이웃이 우리 강아지가 예쁘다고 해서 기분이 좋았어, 사려던 물건이 마침 세일을 해서 좋은 가격에 샀어.
이렇게 아담한 크기의 행운이 노력 없이 일상에 문득문득 들어오고 있음을 상담을 통해 배웠다. 그 행운들이 전두엽의 아픔을 살균 소독하는 게 느껴진다. 그리고 그 행운들이 언젠가 과실 없이 찾아온 불운을 물리쳐 줄 것도 이제는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