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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일기와 글쓰기

우울증에서 벗어나 즐겁게 살고 싶다면 딱 한 줄만 써보자.

by 귀리밥

우울증에 좋다고 알려진 것을 나열해 본다. 숙면, 건강한 식단, 정기적인 운동, 돈독한 관계, 긍정적인 사고, 취미활동. 아, 우린 이 목록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이 중 하나도 하지 않고 있다면 사회에서 완전히 고립된 상태가 분명하다. 그럼에도 매우 쉬워 보이는 이 목록을 실천하지 못하는 이유, 시작 자체가 어렵기 때문이다.


푹 자야 우울증을 회복할 수 있다. 다 안다. 그런데 우울증 때문에 잠들기 어렵다. 건강한 식단이 중요하다. 하지만 우울증 때문에 폭식이나 거식이 찾아온다. 정기적인 운동, 정말 좋다. 그런데 몸 하나 까딱 움직이기 싫은 게 우울증이다. 돈독한 관계로 사회적 고립을 피해야 한다. 그런데 현대사회가 좀 삭막하다. 맘 터놓고 지낼 친구 만들기가 세상 어렵다.

긍정적인 사고, 말해 뭐 하겠나. 취미활동은 도움이 되지만 취미가 우울증으로부터 구제해주진 않는다. 그러니까 우울증 환자들이 이 쉽고 당연한 미션을 실천하지 못하는 이유는 우습게도 우울증 때문이고, 닭과 달걀 중 무엇이 문제냐고 따지는 일일 뿐이다.


이런 아이러니를 다 알면서도 나는 우울증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시도했다. 가장 도움이 된 건 글쓰기였다. 이미 전업작가이니 당연히 글쓰기가 쉬울 거라 생각한다면 오해다. 우울증 걸린 나는 생기발랄하고 쓰고 싶은 게 가득했던 예전의 내가 아니다. 우울증이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2년 전부터 최대 고민은 ‘쓰고 싶은 글이 없다’였다. 쓰고 싶은 글이 없으니 쓰는 게 재미없고 업무적 글쓰기를 제외하곤 내 글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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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글쓰기를 시작한 건 절박함 때문이었다. 절박하게 우울증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걸핏하면 울고 힘들어하는 시간이 견딜 수 없이 괴롭고 아까웠다. 인생은 순간마다 황금기다. 지나고 나면 아쉬울 매 순간의 현재가 흐르고 있다. 우울증은 그 시간을 앗아간다. 하루빨리 해결하고 싶은 과제가 우울증이었다.


우울증을 해결하기 위해 쓴 글은 지금과 같은 에세이도 있지만 주로 감정일기였다. 감정일기는 보통의 일기와 닮아있지만, 감정을 들여다보는 역할이 더 강조된다. 대강의 틀을 보자면 상황, 감정, 원인, 생각의 순서로 쓴다. 오늘 아주 우울하고 기분이 나빠진 상황 혹은 아주 기쁘고 행복했던 감정이 든 순간을 적는다.


그리고 당시의 감정을 쓴다. 이때 감정을 단순하게 우울하다, 기분 나쁘다 등으로 쓰기보다는 다채로운 감정의 언어로 써본다. 포털에 감정 단어라고 검색하면 감정을 나타내는 단어 모음이 나온다. 부정적인 감정의 ㄱ목록만 봐도 걱정스럽다, 곤란하다, 괘씸하다, 괴롭다, 귀찮다 등이 있다. 내 감정의 모양을 정확히 아는 게 중요하므로 감정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써보면 좋다.


그리고 원인을 쓴다. 그런 감정이 생긴 이유를 쓰는 거다. 감정의 피상적 원인은 앞에 쓴 상황에 있겠지만 내부의 원인을 찾는 것도 중요하다. 과거 경험, 트라우마, 감정의 시작점 등을 써본다. 감정일기를 쓸 때 나는 이 원인을 쓰는 부분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 어떤 이유로 이런 감정이 드는지 그 기전을 찾아보는 게 내가 아는 나와 실제의 나 사이의 괴리를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마지막으로 생각을 쓴다. 정리단계다. 상황에 따른 감정과 원인을 살펴본 뒤 드는 생각을 쓴다. 어떤 다짐을 쓰거나 자신을 위로하는 내용을 쓰기도 한다. 속상함을 토로하거나 희망사항을 쓰기도 했다.


이렇게 단계별로 일기를 쓰고 나면 확실히 홀가분했다. 일과를 나열하고 생각한 바를 쓰는 일기보다 오직 감정에 집중하고 돌보는 시간으로써 감정 일기는 회복을 돕는 일등공신이었다.


또 하나 말하고 싶은 게 있다면 pc나 핸드폰에 써도 되지만 이왕이면 손글씨로 써보는 거다. 손으로 글씨를 쓰면 아무래도 자판보다 속도가 느리다. 그 느린 시간 속에서 자신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고 정제할 수 있다. 사각사각, 글씨 쓰는 시간을 자신에게 투자하는 개념으로 보면 좋을 듯싶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처음 썼던 감정 일기장을 꺼내 봤다. 재발 후 정신과에 방문한 날 바로 문구점에 들러 노트 하나를 샀다. 첫날부터 나는 할 말이 많았다. 고통에 대해 늘어놓을 이야기가 많았다. 우울이 가득 차오른 마음을 서둘러 써 내려갔다. 쓰면서도 울었더니 눈물로 번진 자국이 많다. 이제 와 읽어보니 불과 몇 달 전에 쓴 일기장이지만 마치 타인의 일기를 보듯 마음이 아린다.

‘몇 달 전의 내가 이렇게 괴로웠구나.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어떤가.’


치료와 상담으로 예후가 좋아졌지만, 완치 상태는 아닌 현재의 내가 봐도 재발 초기의 나는 몹시 딱하다. 그러고 보면 우울증만큼 불쌍하고 딱해지는 병도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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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일기를 쓰다가 모닝페이퍼도 쓰기 시작했다. 재발 초기에 불면이 굉장히 심했고 잠을 깊이 자지 못했다. 새벽 5시 무렵 동이 틀 때면 비척비척 일어나 거실로 나왔다. 그때 지체 없이 노트를 꺼내 모닝페이퍼를 썼다.


모닝페이퍼는 아침에 일어나 무언가 활동을 하기 전에 써 내려가는 무의식의 기록이다. 모닝페이퍼는 형식이 없다. 일어나 생각나는 건 다 적어본다. 아침에 일어나 든 감정을 적거나 꿈 내용을 적어도 된다. 아무 생각 없이 떠오르는 걸 마구 써도 된다.


형식은 없지만 모닝페이퍼의 마무리는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낼지 쓰는 게 좋다. 거창한 목표를 정할 필요는 없다. 뭘 먹으러 갈지, 어떤 하루를 보내고 싶은지, 오늘 해야 할 일 등을 가볍게 적는다. 그렇게 모닝페이퍼를 쓰고 시작하는 하루는 공허함이 덜했다. 재미없는 하루하루를 버티는 느낌을 털어내고 의미 있는 하루가 시작된다는 기대감이 생겨서일까. 어느 날의 모닝페이퍼엔 이런 말이 적혀있다.

‘오늘도 건강하게 지내보자. 내년의 나는 지금의 나를 대견하게 생각할 거야.’


이날의 목표는 건강하게 지내기였다. 누군가에게는 당연한 몸과 마음의 상태가 당시의 나에겐 하루 목표였다. 그리고 이렇게 노력하고 쓰는 나를 미래의 내가 대견하게 생각할 것임을 확신했다.


결과로 보자면 모닝페이퍼와 감정일기는 우울증과 공황장애 증세를 줄여가는 데 확실히 도움이 됐다. 지금은 보통의 노트를 쓰지 않고 전용 감정일기장을 사용한다. 감정일기를 쓰는 단락이 나눠져 있고 하단에는 매일 감사일기를 쓰는 칸이 있다. 감사일기는 다소 쥐어짜내(?) 쓰는 기분도 들지만 매일 어딘가 혹은 누군가에 감사하며 산다는 것도 우울증 덕분에 새롭게 만든 긍정적인 습관이다. 휑휑한 백지의 노트에 쓰는 것보다 ‘쓴다’는 부담도 덜하다. 감정일기는 우울증 완치 후에도 예방차원에서 계속 쓸 예정이다.


우울증에 글쓰기가 좋다는데, 까지 말했지만 좋다는데, 뒤에 실천이 없다고 자신을 미워하지 말자. 그 시작이 어려운 건 아주 당연하다. 하지만 우울증에서 벗어나 즐겁게 살고 싶다면 딱 한 줄만 써보자. 오늘의 기분을, 감정을 딱 한 줄만. 그게 감정일기다. 그게 바로 글쓰기다.


그러다 쓰고 싶은 말이 늘면 조금 더 쓰고, 감정을 자세히 써보며 차근차근 치유의 글쓰기를 시작하면 된다. 한 줄에서 시작하는 글쓰기는 우리를 분명 안전한 곳으로 이끌어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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