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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튼애플 Jan 24. 2024

<괴물> 돼지의 뇌를 가진 괴물은 누구였을까?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신작 <괴물> 줄거리 및 리뷰

현시대의 일본 영화 감독 중 국내에서 가장 유명한 감독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아닐까 싶다. 이미 이름이 알려질 만큼 알려졌던 감독이었는데 작년 <브로커>를 통해 국내 배우들과 협업을 함으로써 인지도가 더 높아졌으니 말이다. 올해 그의 신작이 또 한 번 공개되었다. <어느 가족>에서 합을 맞췄던 바 있는 안도 사쿠라와 또 다시 함께한 작품 <괴물>이 말이다.


엇갈린 세 개의 시선

  작품은 특이한 구성으로 흘러간다. 첫 번째는 싱글맘 사오리의 시선. 그녀는 학교를 다녀오고 상처가 하나 둘 늘어나는 아들 미나토의 상태를 보며 이상함을 느낀다. 어디선가 맞고 온 듯한 얼굴.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을 늘어놓는 걸 보며.


아들의 행동이 걱정할 수준을 넘어선 지경에 이르자 그녀는 학교를 찾는다. 그리고 가장 유력한 용의자이자 미나토의 담임인 호리 선생님을 만나게 되는데. 어딘가 모르게 즐거운 듯 웃음을 보이고 사과 인사도 건성건성하는 그를 보며 사오리는 그가 아동 학대를 했음을 확신한다.


그리고 영화는 호리의 시선으로 이동한다. 그는 싱글맘 밑에서 자랐다.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놓인 미나토를 조금 더 따스하게 바라봤던 데는 이런 이유가 있었던 것. 하지만 학급 아이들의 선동으로 자신이 죄인이 되어 있었다. 사오리가 찾아왔을 때도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고 똑바로 해명하고자 했지만 교감 선생님과 다른 선생님들이 무조건 사과를 하라 했고, 그는 영문도 모른 채 고개를 숙여야만 했다.


그렇게 일단락되는가 했지만 이제는 매스컴도 그를 체벌 선생으로 낙인 찍는다. 하루가 멀다하고 기자가 찾아오고 그의 집 주소를 알게 된 사람들이 못된 장난을 하기도 한다. 그는 해명하고 싶었고 억울했다. 그래서 미나토를 만나기 위해 다시 학교를 찾는다.

 

  이때 영화는 미나토의 시점으로 또 한 번 이동한다. 그가 왜 상처를 입게 되었는지, 괴롭힘을 당하는 것 같던 물통 가득한 돌멩이는 어째서 였는지, 호리 선생님이 학대를 했다고 몰아간 이유는 무엇인지, 그리고 호리 선생님이 미나토가 요리를 괴롭혔다고 착각한 이유가 뭐였는지 미나토의 시점에 이르러서야 납득이 된다.


다양한 시선은 혼란스러움을 줄 수 있는 요소다. 하지만 고레에다 감독은 아주 능숙하게 이 시점들을 컨트롤했다. 개인이 취할 수 있는 정보와 판단할 수 있는 영역은 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하나의 사건을 두고도 여러 개의 관점이 생기고, 그 관점에 따라 악인과 선인을 구분하게 된다.


작품에서 복잡하게 얽힌 이야기는 전에 등장한 이야기에서 해결되지 못한 점을 자연스럽게 풀어주는 단서로 나타난다. 너무 많은 떡밥을 내던진 것 같은 초반부의 이야기들이 하나씩 꿰어져 전체적인 그림이 드러나는데 이 과정에서 이야기의 개연성은 높아지고 스릴러 장르 특유의 쾌감도 느낄 수 있다.


어째서 우리는 오해를 하게 되는지, 또 오판은 어떤 과정으로 이어지는지를 세 가지 굵직한 시선을 통해 감독은 이야기했다.


 

돼지의 뇌와 괴물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이야기 되는 건 ‘돼지의 뇌’다. 이야기가 처음 나온 건 미나토의 입. 그는 어머니에게 돼지의 뇌를 사람에게 이식하면 그게 돼지인지, 혹은 사람인지 묻는다. 알쏭달쏭한 이야기에 사오리는 어물쩍 넘어가지만 찝찝한 뒷맛을 남기는 이야기인건 분명했다. 그리고 이 말은 학생 체벌을 이유로 불려온 호리에게 다시 전달된다. 호리 선생님이 아들 미나토에게 그런 말을 했다고 믿었던 사오리는 당신이야말로 돼지의 뇌를 가진 사람이다 라고 맞받아친다.


하지만 알고 보면 그 이상한 이야기의 시작은 호리 선생님이 아니다.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던 요리가 집에서 항상 듣던 이야기였을 뿐. 그의 아버지는 요리를 이상한 아이라 생각한다. 돼지의 뇌를 가져 애가 이상해졌다고 믿고 있는 듯 했다. 호리 선생님은 끝까지 요리를 좋은 아이라 믿어주었지만 어긋난 이야기 속에서 그는 돼지의 뇌라는 말로 아이를 학대하는 몹쓸 어른이 되어 있었다.

  그럼 요리의 아버지가 요리에게 그런 이야기를 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영화의 후반부에 등장하지만 요리는 성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는 아이였다. 불안정한 시기에 그의 불안을 더 증폭시킨 건 아버지. 어머니 없이 아버지와 살던 요리는 자신이 다른 아이들과 다르다는 걸 어렴풋이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부분에 대해 아버지에게 한 번쯤 털어놓았을 터. 하지만 아버지는 괄괄한 성격의 타협을 모르는 영업맨이다. 보통 아이들과 다른 모습을 보이는 자신의 아이를 이해하려거나 심리상담을 유도하는 등의 노력 없이 이상한 아이로 낙인 찍는다.


 그 낙인 중 하나가 돼지의 뇌였다. 일반적인 아이들과 달리 동성을 좋아하는 요리는 인간의 뇌가 아니라 돼지의 뇌를 이식 받았고 그 부작용으로 인해 성정체성의 혼란이 온 괴물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자신의 혼란스러움은 고려하지 않고 괴물, 혹은 돼지의 뇌라 이야기하는 아버지의 학대 속에서 요리는 점점 학교에서도 설 곳을 잃어버린다. 아이들과 다른 행동을 하게 되고 왕따를 당하고 있음에도 그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게 된다.


그런 요리를 안타깝게 생각했던, 그리고 요리와 마찬가지로 성정체성의 혼란을 느끼던 미나토가 등장하며 두 사람은 친구가 될 수 있었고 서로에게 기댈 곳이 되어주었지만 마찬가지로 아이였던 미나토가 해줄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자신 역시 돼지의 뇌를 이식 받은 괴물이라 여기고 행동하는 것만이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표현이었다.



영화는 해피엔딩이었을까?

결말 부분에 대한 이야기라 혹시나 영화를 보지 않았다면 지금이라도 영화를 먼저 보길 권한다.


  결말 부분에서 산사태가 벌어지는 상황 속 두 아이는 버려진 전차 한 량에 몸을 숨기게 된다. 이때 토사물이 매섭게 그들을 덮쳤고 이들은 지하 통로를 빠져나가 무사히 탈출한 듯 보이기도 했다. 이 부분 역시 두 가지 시선이 공존한다. 앞서 이야기한 아이들의 시선, 그리고 이들을 구조하기 위해 전차가 있는 곳을 찾았던 사오리와 호리 선생님의 시선이 말이다.


사오리와 호리는 옆으로 누워버린 전차의 창문을 손으로 쓸어 안을 확인하려 한다. 하지만 토사물 범벅의 비가 끝없이 밀어닥치며 이들의 시야를 반복적으로 차단해버린다.

  마침내 유리창을 깨고 들여다본 내부는 너무 컴컴해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아이들이 입었던 판초 등의 모습만 간신히 보이고 빠져나갔을 것 같은 공간은 보이지 않는다. 용케 빠져나갔던 것 같던 아이들의 시선에서도 모순은 존재했다. 원래는 폐철로라 자물쇠로 굳게 잠겨 있던 철제 문이 열려 있었고 이들은 자신의 유토피아를 찾은 것 마냥 그곳으로 달려간다. 하지만 자물쇠가 원래 잠겨 있었다는 점. 그리고 갑작스레 쏟아진 산사태를 어린 아이 둘이 피하기가 물리적으로 어렵다는 점을 고려해볼 때 이들이 도착한 건 유토피아가 아니라 저승이었을 거라 추측하는 게 합리적이다.


자신을 괴물이라 부르는 괴물 같은 어른들만 가득한 세상에서 안전하게 이들이 대피할 곳은 없다. 그저 작은 전차 한 칸만이 이들에게 유일한 쉼의 공간이었는데, 엄청난 토사물이 쏟아져 그런 기회마저 앗아가 버린다. 이들에게 찬란한 미래는 기대할 수 없으며 저승이라는 공간을 제외하면 행복해질 수 없다는 걸 마지막 장면을 통해 보여주는 게 아니었나 싶다.


※ 후에 찾아본 인터뷰에 따르면 각본가 사카모토 유지는 두 사람이 생존하는 이야기라 생각했고 그렇게 연기하라고 주문했다고 한다. 묘하게 엇갈리는 시선은 있지만 일단 각본가의 의도는 두 사람의 생존인 것이다.

 

커다란 기대마저 충족시키는 작품

  작품은 스릴러 장르처럼 심장을 조여오는 듯 했다. 대체로 잔잔했던 고레에다 감독의 전작들과 달리 굉장한 속도감과 높은 텐션을 표현하는 작품이라 볼 수 있겠다 영화를 보는 취향에 따라 보기 힘든 장면도 몇몇 있었겠지만 완성도 자체가 너무 뛰어난 작품이었다.


<브로커>로 처음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작품을 접했더라면 크게 실망했을 수도 있겠다. 올 로케이션 촬영은 양날의 검이다. 생소한 언어와 배우들을 이용해 같은 감독이라도 완전히 다른 반응을 끌어낼 수 있는 동시에 언어 전달의 한계에 부딪혀 밋밋한 이야기로 끝이 나는 경우도 있으니 말이다. 아쉽지만 <브로커>는 후자에 가까웠던 것 같다. 어딘가 모르게 번역투로 이야기하는 배우들과 성기게 얽힌 감정선은 원래 그의 작품을 좋아하는 관객에게도 못내 아쉬움으로 남았다.


이번 작품은 완전히 칼을 갈고 나온 듯 하다. 이야기의 플롯, 연출, 배우의 연기 등 뭐 하나 빠지는 것 없이 이야기를 가득 메우고 있었으니 말이다.  이제는 고인이 되어버린 사카모토 류이치의 마지막 작업물을 들을 수 있는 것도 이 작품을 꼭 봐야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아닐까 싶다.


https://www.youtube.com/watch?v=Cs66VRaBjTQ&embeds_referring_euri=https%3A%2F%2Fblog.naver.com%2FPostView.naver%3FblogId%3Dgood3305%26logNo%3D223278246493%26redirect%3DDlog&source_ve_path=OTY3MTQ&feature=emb_imp_woy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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