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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than Dec 22. 2023

공백이 두려운 이들에게

별과 별 사이엔 어둠이  더 많아

올 한해는 나에게 꽤나 의미있었던 한 해 였다. 내 인생의 어느 때보다도 나에게 집중할 수 있었다. 내가 무얼 좋아하는 지, 어떻게 살고 싶은지, 그리고 하나 하나 왜 해야하는 것인지에 대해서 깊은 고민을 할 수 있었다. 그럴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인생에서 가장 큰 공백을 가졌기 때문이 아닐까.



공백

나는 지난 해 여름, 와이프와 함께 유럽 여행을 떠났다. 좋은 팀과 일을 하고 있었고, 나름대로 의미있는 성과를 가지고 있던 중에 떠난 여행은 기대보다는 불안이 컸다. 커리어적으로도, 재정적으로도 남들이 앞서갈 때 아둥바둥 비슷하게라도 유지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뒤로 후진하는 기분을 애써 지울 수 없었던 것 같다.


이국적인 풍경과 사람들 속에서 새로운 것들에 설렘을 느끼면서도, 집으로 돌아와서 링크드인을 보고 있노라면 한국은 늘 바빴다. 누군가의 승진, 이직, 커리어 하이가 나를 얼마나 불안하게 했는지 모르겠다. 이러다가 돌아가면 나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어있겠구나 하고. 그런 식으로 나의 공백을 정의하고 있었다.


12월 어느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한껏 들떠있던 멘체스터의 한 숙소. 새벽 4시에 나는 미칠 듯이 뛰는 심장과 함께 벌떡 일어났다. 옆에 곤히 잠든 와이프를 보면서 깨우지도 못하고 혼자서 앓았다. 잠시 진정하고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떠오른게 책이었다.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그냥 나처럼 불안했던 사람들이 잘 이겨낸 흔적들을 찾아보려고 헀던 걸까?





그 새벽 4시에 읽기를 시작해서 영국 여행을 하는 내내 책을 읽었다. 딱히 목적은 없었다. 단지 불안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해소해보고 싶었을 뿐. 대중교통을 타고 이동을 하면서, 줄을 서서 기다리면서도 책을 읽었다. 내 인생에서 그렇게 책을 읽었던 적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재미를 붙였었다.


정말 이상하게도, 그 사건을 기점으로 불안했던 마음은 많이 해소가 되었다. 몇 권의 책 중에서 누구 한 명도 내게 직접적인 위로를 주진 않았다. 하던 일을 그만하고 여행하는 것을 누구도 잘하고 있다고 말하진 않더라. 하지만 그들이 공통적으로 전달하고 싶었던 메세지는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었다.


손웅정은 축구 국가대표였지만, 부상으로 은퇴를 했다. 그리고 지독히 가난한 생활 중에서도 두 아들의 축구 훈련을 담당했다. 눈이 오면 직접 운동장에 소금을 뿌렸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더 지독하게 훈련을 시켰다. 지켜보는 사람들을 혀를 찼다. 성적을 내야할 시기에 저런 훈련만 하고 있다고 질책했다. 그래도 자신의 축구 철학에 맞게 근력과 체력 훈련, 기본기를 다질 수 있도록 몇 년을 지도했다. 


아무 성과가 없었다. 바보 같이 기본기 훈련만 했을 뿐. 그러다가 기회가 찾아왔을 때 손흥민은 독일로 가게 되었다. 수많은 경쟁 속에서 데뷔를 하게 되었을 때, 데뷔 골을 터뜨리게 되었다. 하지만 그 팀에서 오랜 시간동안 인종차별과 출전을 하지 못하는 문제를 겪었다. 그러다 기회를 잡아 영국으로 가게 된다. 이제 승승장구 하게 될까? 아니, 경쟁 과열과 미숙한 플레이로 인해 교체 선수로 벤치를 전전했다. 소위 손까들이 한국 축구선수의 한계라며 놀려댈 때, 그는 선수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훈련을 묵묵히 했다. 결국 그는 현재 토트넘의 명실상부한 레전드 플레이어가 되었다.




새로운 챕터의 시작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낄 때, 앞이 보이지 않을 때, 막연하다고 느낄 때, 공백이 시작된다. 그동안 나는 가야할 길을 잘 그려놓고 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 일을 하면서 이런 것들을 경험하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다음 일은 이렇게 하자, 그렇게 나의 길을 디자인하고 있었다. 그런데 여행을 다녀온 후로부턴 그게 점점 희미해지더니, 어느새 앞이 깜깜해져서 헤매이고 있는게 아닌가. 


머릿 속은 복잡하지만, 하나씩 덜어내기로 했다. 아니, 그럴 수 밖에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남들의 걱정어린 말도 한 켠에 잘 쌓아두고, 오롯이 내게 집중하는 시간을 가졌다. 운동을 시작하고, 미뤄두었던 글도 하나씩 쓰기로 했다. 그리고 여행을 하면서 꼭 만들어보고 싶었던 서비스도 하나 하나 만들기 시작했다. 


남들의 시선에 얼룩져 이것저것 하기보다는,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것들부터 채워나갔다, 나는 이런 걸 좋아하던 사람이었구나, 이런 걸 잘하는구나. 그게 나를 알게 하더라. 그리고 조금씩 나를 믿어줄 수 있는 힘이 자라더라. 그러한 것들이 켜켜히 쌓여 올 한 해의 나를 이루게 되었고, 지나고 보니 새로운 챕터가 시작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 간의 공백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게 아니었음을, 그 공백이 이전 챕터를 정리하고 다음 챕터로 나아가는 징검다리 역할을 했던 것이었음을 알게되었다.


한 권의 책은 여러 개의 챕터로 이루어져있다. 그리고 그 챕터들은 작가의 의도에 맞게 배치되어 전하고자 하는 메세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방향을 가지고 있다. 우리 삶도 책과 같다. 하지만 하나 다른 것은, 현재 진행형이라는 것이다. 다음 챕터는 무슨 내용이 올지 모른다. 챕터가 거듭될 수록 우리 삶은 하나의 궤적을 이루게 되고 그게 방향이 된다. 그 사이에는 멋진 주제의 챕터도 있지만, 오랜 시간동안 묵묵히 자기 자신을 믿고 지탱해야하는 공백의 시간도 있다. 그 공백이 다음 챕터를 빛나게 한다.


요즘에 빠져있는 이승윤의 <게인주의> 라는 곡의 가사 하나를 끝으로 글을 마무리 하려고 한다.


Hey Mr. Galaxy, 
뭐 그리 혼자 빛나고 있어 
착각은 말랬지
널 우리가 지탱하고 있어
별과 별 사이엔 어둠이 더 많아

공백이 두려운 이들이여, 깜깜해 보이는 공백이 우리 삶을 아름답게 지탱하고 있음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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