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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다라 Jan 05. 2021

어떡해, 어떻게

실패한 예술가의 고백 Vol.5







2019년에는 사진이나 그림이 거의 없다. 어떤 아름다운 것을 봐도

사진을 찍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고, 그림은 심장이 뛰어서(?) 그리지 못했다.


오로지 종이 일기장에 손으로 글을 썼다. 

하고 싶은 말, 떠오르는 생각을 아무런 필터도 거치지 않고 마구 적어댔다. 

상태는 좋아질 듯 말 듯했다. 오늘은 몇 걸음 나아간 것 같아 기뻐했다가도 

내일이면 어제보다 더 뒤로 밀려나 있어 좌절했다.


내일이 더 이상 없었으면 하는 내 마음 따위 가뿐히 무시되고, 어김없이 내일은 왔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은 것을 전부 끊어내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버티고 또 버텼다.


남에게 피해주기 싫어하는 성격과 자존심을 십분 활용했다.

쓰레기장 같은 집을 구급대원들에게 보이기 싫어서,

숨겨진 빚을 부모님께 들키기 싫어서 같은 이유로

숨 쉬는 상태를 유지하려 애썼다.



/



1년 가까이를 그렇게 살아있기만 하자 하며 가만히 보내고 나니

슬슬 생각이라는 것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나가서 걷자. 재밌는 걸 보자. 아무거나 적자. 맛있는 걸 먹자. 좋은 걸 듣자. 뭐라도 그려보자.






우울증에 완치란 게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2019년에 비하면 지금의 나는 정신적으로 분명 건강해졌다. 

물론 이따금씩 찾아오는 우울감과 불안감에 여전히 시달리고 있기는 하나

예전처럼 막무가내로 당하고만 있지는 않을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고나 할까.


개인적으로 도움이 되었던 것을 적어보자면 다음과 같다.


1. god의 육아일기 : 내가 유일하게 '덕'이라 할 수 있는 아이돌(?). 가장 상태가 심각했을 때 어두컴컴한 방에서 씻지도 않은 몸으로 이불속에 파묻혀 보고 또 보며 웃었다.


2. god의 노래들 : 아무도 듣지 않는 것처럼 따라 부르고, 아무도 보지 않는 것처럼 춤을 췄다.(몸이 기억하는 '촛불 하나')


3. 걷기 : 하루 중 가장 중요하고 유일한 스케줄. 짧게는 20분에서 길게는 2시간까지, 밖에 나와 걷기만 해도 잘했다고 스스로를 칭찬해줬다.


4. 일기 : 일부러 비싼 몰스킨 룰드 클래식 노트를 사서 하루에 몇 번이라도 펼쳐 생각하는 모든 것을 적었다. 친구에게 혹시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몰스킨은 다 불태워달라고 부탁할 정도로 필터링하지 않고 뭐든 다 적었다.


5. 부부의 세계 : 뭐하나 진득하게 집중해서 볼 수 없었던 내가 집중할 수 있는 사람임을 다시금 깨닫게 해 주었다.



/



이렇게 별 것 아니면서 재밌는 일들로 약간의 긍정 에너지가 올라왔을 때

매일매일 지킬 수 있을 만한 작은 약속을 만들어 지키고 기록했다.


1. 그림일기 : 손바닥만 한 스케치북 한 권 딱 채울 때까지만, 잘 쓰고 잘 그리고 신경 쓰지 않고 그냥 하루 한 장만 채워 업데이트한다. (완료. -> 아 내가 뭔가 할 수 있긴 한 사람이구나.)


2. 매일매일 퀵 드로잉 10장 : 누드 크로키나 인물 드로잉 등 크게 시간과 노력을 들이지 않아도 되고 재미있는 그림 연습. (2개월 정도 하다가 스톱. -> 다시 그림에 불이 붙어 이 연습을 굳이 일부러 하지 않아도 계속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3. 영어 흘려듣기 + 시간 기록 : 매일매일 팟캐스트나 영어 콘텐츠를 자막 없이 보고 듣는 영어 흘려듣기를 집요하게 하고 시간을 기록했다. (2019년 하반기쯤 거의 병적으로 하고, 서서히 집착을 내려놓음. 영어 실력과는 별개로 약 4천 시간 정도가 쌓인 것을 눈으로 확인하며 '내가 열심히 했다'는 느낌을 받아 기분이 좋아짐.)



/



사실, 그동안 했던 이런저런 노력들과 그 효과는 선후관계가 명확하지 않다.

그런 일을 했기 때문에 기분이 올라간 건지, 기분이 올라갔기 때문에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여기 적지 않은 (나도 모르게 한) 행동에 가장 큰 효과를 봤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도, 누군가 한 명에게라도 팁이 될 수 있다면

아니 그냥, 그렇게 앓던 사람이 시간이 지나고 꽤 괜찮아졌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만으로도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나로선 충분하다는 생각에

숨기고 싶던 이야기를 이렇게 털어놓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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