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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um Jan 22. 2020

걷기 좋은 파리의 회색

5구의 좁은 골목을 걸어가던 중이었습니다. 맞은편에서 할아버지가 걸어오고 있었어요. 위선과 가식으로 무장한 저는 바로 걸음을 멈추고 옆으로 비껴서, 그에게 짧은 웃음을 지었죠. 천천히 걸어온 노인은 고맙다는 인사 후 말을 걸었습니다. "%$#@$&*&, $%%@#?"


⁣"아… 프랑스어 잘하지 못하는데 노력해볼게요. 다시 말해주세요."

⁣"오늘 같이 !@#@$ 날씨 %%@# 괜찮아요."

⁣"오늘 날씨가 괜찮다구요? 왜요? 흐리구 비도 오는데…"

⁣"흐리죠. 하지만 #!@#!@@$! 많이 오지도 않고, 돌아다니기 좋아요."

⁣"아… 그렇군요. 제가 다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당신 말씀의 뉘앙스는 알겠네요."


마지막에 저는 "뉘앙스nuance"라고 말했습니다. 이후 이 단어의 처음 뜻이 '동일계 색채 가운데서도 명암이나 농담에 따라 미묘한 차이가 나는 현상'이란 걸 알게 됐어요. 파리에서 태어난 시인 루이 아라공이 "파리의 기본 색조인 회색에도 수많은 종류가 있다"고 말한 것도요. 그러거나 말거나 할아버지랑 헤어지고 나서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답니다. 그래 그렇게라도 생각해야 이 기나긴 겨울을 나겠지… 센강으로 내려와 걷다가 다시 대화를 생각하며 하늘을 찍기도 했지만, 프레임에 잡힌 풍경을 보면서도 걷기 좋은 회색 날씨가 있나? 고개를 갸웃거렸어요.


⁣깨달음은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 주 아침에 테라스에서 하늘을 바라보며 느꼈거든요. 날씨가… 오지게 춥고 습하고 불쾌했어요. 견디기 어려운 회색이라 도저히 밖으로 나갈 생각이 들지 않았죠. 종일 집에 박혀 있으며 할아버지를 만난 날의 회색을 생각했습니다. 그날도 흐렸고 비도 조금 왔지만 오랫동안 즐겁게 걸었지요. 맞아요, 그때는, 걷기 좋은 회색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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