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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um Mar 09. 2020

누나의 첫 경험

누나의 첫 경험은 빨랐다. 중학교 2학년 때였다. <송미야>라는 연극. 학예회용 창작극으로 짐작된다. 별로 대단한 데뷔는 아니다. 주인공도 아니었다. 누나도 자신이 당시 맡은 배역을 기억하지 못해 '? 역'이라고 프로필에 적은 걸 보니, 기껏해야 한두 마디 하는 단역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아무도 누나가 그때 무대에 섰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않더라도 누나는 기억하고 있다. 처음의 두근거림과 설렘을. 그 감정이, 그때의 작은 연극과 초라한 배역을, 굳이 자신의 프로필 가장 상단에 적게 했을지도 모른다.


동생의 첫 경험은 늦었다. 대학교 1학년 때였다. <외대학보> 784호 2면에 실린 대학 단신. 원고지 2매 정도의 짧은 기사였다. 바이라인도 없었다. 하지만 동생은 그 글을 쓰기 위해 밤을 새웠다. 머리를 쥐어뜯으며 기사를 쓴 후 원고지를 내밀면 선배가 온몸으로 비웃으며 빨간 펜으로 난도질을 했다. 얼굴이 빨개져 자리로 돌아가 다시, 다시 써서 내밀면 선배는 다시, 다시 난도질을 했다. 글을 고치던 새벽에 충혈된 눈으로 생각했다. 쓴다는 일은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타는 건지도 몰라. 두렵고 설렜다. 그때 빨간 펜으로 덧칠된 원고지를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지금은 아무도 그 기사를 기억하지 못할 지라도.


누나는 어릴 적부터 말에 능했다. 다른 사람을 흉내 내어 또 다른 사람을 웃기고 울리는 일을 잘했다. 동생은 그러지 못했다. 말주변이 없었을 뿐 아니라, 어머나 이런 거 밝히기는 아유 부끄럽지만 혀, 혀, 혀가 좀 짧았기 때문이었다. 싸울 때마다 말에 능한 누나가 이겼다. 말이 잘 나오지 않던 동생은 풀어내지 못한 감정을 노트에 끼적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선택하기 시작한 것이다. 자신을 표현하는 각기 다른 방식을.


<송미야>를 포함해 누나는 지금까지 무대에서 30개의 배역을 맡았다.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짖은 유관순(<우리들의 합창>)도 있고, 아동극 알바를 뛰며 연기한 까마귀 쵸쵸(<꼬마마녀 위니>)도 있다. 러시아에서 공부할 때 연기한 클레오파트라(<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도 있고, 하층민 일라이자를 귀부인으로 변신시키려는 히긴스에게 훈수 두는 히긴스 부인(<피그말리온>)도 있다. 누나의 이런 나름대로 연기 인생은 동생의 관심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누나 따라 대학로에서 누나가 골라주는 연극을 보다 보니 극장이랑 친해지게 된 것이다.


추억은 함께 보았던 공연과 함께 떠오른다. 뮤지컬 <레미제라블>을 보러 세종문화회관으로 간 날. 남매의 얄팍한 지갑을 털어 구매한 티켓이 가리킨 자리는 가장 위층, 끝열, 제일 가장자리였다. 분연히 일어난 누나는 동생을 데리고 슬금슬금 앞자리로 이동했다. 좌석 주인이 오면 죄송합니다, 하고 그 앞자리로, 다시 좌석 주인이 오면 미안합니다, 하고 또 그 앞자리로… 메뚜기질 끝에 무대가 잘 보이는 좌석에 앉을 수 있었던 남매는, 즐거웠다. 누나의 졸업식 때문에 모스크바에 갔을 때의 기억도 있다. 러시아는 학생증만 보여주면 대부분의 극장이 무료입장이었다. 몰리에르의 <따르뛰프>를 보러 모스크바예술극장에 들어갔다. 인기가 높았는지 남는 자리가 없었는데 학생증으로 좌석 확보는 불가능했다. 계단에 쭈그리고 앉아 공연을 봤는데 동생이 무슨 수로 러시아어 대사를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 같이 쭈그리고 앉은 누나가 계속 속삭여줬다. 즉석 통역이었다. "나도 잘 모르겠다"라는 말이 20%가 넘는 괴이한 통역이었지만 그래도 동생은 그 순간을 인생 최고의 통역으로 기억한다.


남매는 이제 30대다. 현실을 살고 있다. 우연히 성우 시험에 합격한 누나는 프리랜서로 풀린 후 '꽤 많이 프리한' 날들을 보내고 있다. 쓰면서 돈 버는 회사에 기웃거리던 동생은 '회사 글'은 '내 글'이 아니라는 깨달음을 얻으며 노동 거부에 들어갔다. 갈팡질팡하고 오락가락하지만 남매는 알고 있다. 그려내기 어려운 감정을 그려내기 원하는 욕망이 그들에게 있다는 사실을. "삶"이라고 발음하지 않고도, '삶'이라는 글씨를 쓰지 않고도,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그리하여 그들은 지키기로 선택한 것이다. 자신을 표현하는 각기 다른 방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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