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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렷 경래 Jan 02. 2024

시발점 - 잘난 체 하지 말기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끈 풀 자격도 못된다.

겸손에 대해


가끔은 나의 처지를 인정하고 겸손해진다. 그러나, 나의 겸비는 반드시 신앙심을 갖출 때 나타나는 현상이며, 일상적 사고의 산물은 아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보다 나은 사람의 위치에 당연히 내가 있어야 한다는 착각과, 그결국 자리까지 침흘리는 뻔뻔함이 주류가 되고 만다.


인기를 누리며 지도자로서의 입지를 확보해 가던 세례 요한은 철저하게 자신의 위치를 인정했다. 예수님의 등장을 예언하며 "나 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오실 것을 선포했고, 심지어


 "나는 굽혀 그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라고까지 자신의 입지를 낮추었다. 이 겸손은 바로 그의 신앙심과 연결된다. 그는 어느 순간도 이 정상적이며 뜨거운 신앙심에서 흔들리지 않은 것이, 우리가 보는 세례 요한의 최고의 멋이다. 헤로디아의 미움을 사 헤롯에 의해 목이 잘릴 때까지도 바른 소리를 했던 강직함은 감히 따르기 힘들지도 모른다. 그는 이인자, 혹은 그 보다 못한 사람으로 스스로 낮추었지만, 우리가 보는 세례요한은 최고의 자리에서 최고의 찬사를 받는 사람이다. 겸손한 사람을 존경하는 우리 공통의 의식 때문이다.


세례요한을 생각하면, 멋있고, 닮고 싶어 진다. 왜 우리는 낮은 자리로 스스로 내려온 사람을 사랑하는 것일까? 그의 이야기에서 발견되는 어떤 힘이 있어서일까?


그의 이야기는 다리미 효과가 있다. 내 마음이 질감 안좋은 천 조각처럼 구겨졌을 때, 세례요한의 이야기 만으로도 침통한 자아가 펴지는 느낌을 받곤 한다. 스스로를 인정하고 낮아졌던 바른 행위가 지켜보는 타인에게 주는 힘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과연 나는 그런 사람으로 설 수 있을까?


인간사에 흔한 현상이지만, 이인자는 일인자의 자리를 넘보고 등 뒤에서 칼을 꼽기도 한다. 꼭 칼 같은 무서운 표현이 아니래도, 생각 만으로도 자리를 넘보는 것도 별반 다를 것 없어 보인다.



코미디에 교회가 잘 싸운다는 현상을 빗대어 조소 썩힌 익살에 등장하기도 있다.  


"교회도 아닌데 왜 싸우냐"


라고. 또 다른 편견으로, 교회 장로들이 목사를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인식이나 말을 듣는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교회가 목사를 청빙해 고용하듯이 직원으로 세우는 형태 만으로 장로의 위치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고용의 행위 만으로 고용주가 되는 것이 아니며, 영적 단체의 독특한 면이다. 목사의 위치는 고용과 동시에 단번에 영적 지도자가 된다. 지도자. 영적 위치에서는 피할 수 없으며 견고한 사실이다. 그 영적 권위가, 곁길로 타락하지 않는 한, 장로든 평신도든 사랑하고 따라야 하는 것이 의무다.


여기서 바로, 선을 넘는 유혹의 습격을 보기도 한다. 목사가 저 정도라면 나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평신도가 소명 없이 신학을 공부한다고 나가는 경우도 보았고, 진짜로 대놓고 영적 지도자를 직원 대하듯 하는 경우도 있다. 사람의 현상이야 상황과 상황에 따라 이유가 분분하겠지만, 그 자신이 모르는 교만이 이렇게나 쉽게 전신을 채울 수 있다는 게 인간의 한계다.


그러므로, 자리를 탐하는 행위,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을 내려보고, 홀대하는 일만큼 더없이 거만함은 없을 것이다. 고용자가 고용된 사람에게 복종과 섬김의 위치로 내려가야 하는 당연한 수순, 교회의 신비지 않을까.



세례요한 당시에 예수님에 대한 인식이 다 좋았기만 할까? "뒤늦게 온 주제에 이미 모든 영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놓은 세례요한의 자리를 넘봐?", "그는 왜소하고 빈약하고 가난하잖아", "이름도 없는 베들레헴 출신이 뭐..." 같은 수많은 폄하 발언이 공존했을 것이다. 그러던 것이, 병 고치고 사람을 살리는 기적들이 추후에 가시화되면서 능력과 존재를 인정하게 되었던 것이다.


생각은 고여가는 행위의 샘물이다. 언젠가는 행동으로 넘쳐버리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생각의 제어가 터무니없이 힘들다는 것이다. 시도 때도 없이 잡다한 생각이 꼬이고 꼬여서 마음을 짓누른다. 제어할 힘이 없다. 오직 기도의 힘에 의존하여 자신을 내려놓는 방법밖에는 없다.


이민자의 삶은 유달리 피곤들 하다. 나이가 들어도 은퇴를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생활비, 모기지 등, 돈 벌지 않고는 길에 나 앉아야 하는 힘든 생활자가 많은데, 이런 현실적인 사정을 이해 못 하고 딴 세상 이야기 하듯이 하는 목사에게 마음이 크게 상한다는 사람도 더러 봤다. 그래서 그런지, 나도 가난한 목사, 주중에는 현장에서 일하는 목사, 평신도와 같이 일상을 호흡하며 사는 분들이 좋다.


그저 우리 주위의 흔한 일상을 빗대어 몇 가지 이야기를 풀어봤지만, 자신을 돌아보면 돌아볼수록 역시 세례 요한의 자기 성찰과 고백은 교과서다. 나도 그렇게 살기 위해서 오늘 이 묵상의 글을 올리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가 전파하여 이르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 


-마가 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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