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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렷 경래 Mar 12. 2024

의료 파업과 바보 의사 장기려

크리스천 의사? 그들은 어디 있을까?

잘못된 선택



의대 정원을 애초 3000명 증원하려던 - 현재는 2000명으로 확정되었지만 - 정부의 방침에 반대한 의사들의 파업을 보면서 여느 대한민국 국민과 같이 가슴이 답답하다. 의협과 전공의들이 몇몇 사소하지만 합당한 명분을 내세우지만, 결국은 철밥통인 밥그릇 챙기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비껴나가지는 않는다.


그들이 분노하며 떠난 병원에는 간호사들이 불철주야 환자를 돌봐야 하고, 수술과 치료를 못 받는 환자들을 사지로 몰려가고 있다. 그러고 보니, 의사들의 거센 반발은 의약 분업 때와 간호법 추진 때도 있었다. 그때마다 반대 입장이 기득권 유지라는 데는 하나같이 동일했다.


지금 이 시간에도 가족의 수술과 치료를 기다리는 많은 사람들은,


”왜 하필 이때에 이런 일이…“


하면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것이다.


우려하던 대로 급한 환자 몇몇은 이미 수술을 받지 못해 세상을 뜨는 일도 일어났다. 구급대원이 생명을 다해 살린 사람을, 의사가 없다는 이유로 병원이 받아주지 못해 이곳저곳을 떠돌게 하는 일은 다반사다.  


전공의의 93%에 달하는 1만여 명이 사직서를 내고 파업현장에 뛰어들었다는 뉴스는, 그동안 일반인들이 몰랐던 의사들의 애환을 이해하게 만든다. 그 애환이라는 것은, 바로 우리가 알지 못했던 의사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어떤 노력도 아끼지 않으리라는, 매일의 일상을 이해하게 되면서 느끼는 애환이다. 이런 잇권과 돈의 흐름을 있기 때문에, 향후 정식 의사가 되면 똑같은 권리를 누릴 기대에 흠뻑 젖어있는 레지던트 전공의의 허탈함을 이해하면서 느끼는 애환이다.


이런 비슷한 면모를 또 본 기억이 있다. 바로 고귀하고 희생적이 의사에 대한 선입견에 뒤지지 않는 목사들의 이탈이다. 돈과 성공이 만들어낸 유혹은 교회를 자식에게 물려주고, 스스로를 우상화해 가는데 스스럼없이 움직인다. 당사자 만의 문제도 아니었다. 옆에서 부추기고 우상화의 주역으로 만들어 가는 잘못된 성도들의 이탈도 문제의 심각성을 더하게 한다.


그리고, 사직서… 그것은 꼼수다. 머리 쓰는 데는 누구보다 능한 사람들이 쓸 수 있는  방식치곤 수준이 낮지만, 그 외에는 크게 대안이 없다.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려는 자발적인 사직서가 거의 모든 전공의에 의해서 던져졌다는 것을 개인적인 선택으로 순수하게 볼 사람은 없다. 누가 봐도 담합이고, 단체 행동이다.


2010년의 의대증원 계획에 의한 정부와 의사들의 단체행동이 의사의 승리로 돌아간 이후, 지난 10여 년간 의사들의 이 철밥통은 말도 못 하게 더 견고해졌다. 그러나, 이것을 지키기 위해 물불을 안 가리는 동안 의사에 대한 사회적 존경을 땅에 떨어졌다.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밟힐 뿐이라는 성경은 비단 타락한 신앙인에 국한되지 않는다.


의사는 누구보다 많은 수익을 벌어들이는 직업이다. 일반 대중이 믿고 있는 - 믿고 싶은 - 의사라는 직업은, 또 강조하자면 선교사나 성직자와 비슷하다. 죽어가는 사람, 아픈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매달리고 싶을 때 찾아가는 사람이다. 그들의 말은 환자에게는 물론 일반 사람도 존중하고 따른다. 그들에 대한 존중과 존경이 바탕이 된 자연스러움이다.


그런데, 만약 이런 존경이라는 큰 기둥이 없어진다면 어떻게 될까? 더 많은 돈을 벌어야겠다는 목적이 의사가 되는 본심이라면, 사회는 그들에 대한 존경은 없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또 다른 시각으로 생각해 볼 때, 의사가 되기까지의 공부, 경쟁, 그리고 과정을 다 이겨낸 것에 대한 것을 존경이라고 한다면, 그 존경은 전혀 다른 의미가 된다. 성공한 자에 대한  인정, 부러움, 혹은 선망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기대감


그럼에도 여전히 파업의 현장에 나오지 않거나, 병원으로 되돌아 간 전공의 포함 의사들에 대해 일말의 기대와 궁금증이 있다. 해외 의료봉사로, 의료 선교사로 희생을 감수하던 진짜 크리스천 의사들은 이 와중에도 다르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다.


의사 중에 크리스천 비율은 50%-80%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만큼 교회에서의 역량도 가볍지 않다. 어떤 교회도 이번 갈등에 지나치게 조용한 까닭을 이런 시각으로 보면 이해가 된다. 일반 시민들이 느끼고 판단하는 것이 어떻든 함부로 비난할 수도 없는 입장과 처지다.

.



존경받을 위치에 있는 사람이 존경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누구나 가진 소망이다. 정치인이, 교수가, 종교 지도자가, 경제인이, 공무원이, 법조인이, 그리고 의사들이 국민의 존경을 받고 그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기를 바란다.


"우린 당신들을 존경하고 사랑하고 싶어요"


누군가의 개그에서나 그렇게 표현될 법한 말에 지나는 말이 아니다. 사회와 한 국가는 그런 기본 상식이 그대로 지켜질 때 힘이 있고 발전한다. 이것이 깨어진 조선의 양반 특권의 비리와 계급적 사회의 부조리가 한 나라를 결국 망하게 만들었다.


존경받을 만한 사람이 존경을 받는 사회는 세계를 지배하게 되어 있다.



그리고, 장기려


"장기려, 그 사람"에서는 한 바보 의사에 관한 일대기를 나열하며, 왜 그가 아직도 존경받는지 이해하게 만든다. 이 책의 저자는 이 독특한 인물 장기려에 대해 여러 해 흔적을 찾아 모은 후 하나의 논문처럼 삶을 조명하고 있다.  진실한 그리스챤으로서 매우 특별한 삶을 산 의사, 장기려에 관해서는 브리태니커사전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의사. 숨지기 전까지 가난하고 소외받는 사람들에게 박애와 봉사정신으로 인술을 펼쳐 '한국의 슈바이처', '살아 있는 성자'로 불렸다. 1968년 한국 최초의 민간주도 의료보험조합인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설립해 성공적으로 운영, 개발도상국 국민의료보험 실현에 선구적 모델을 제시했는데 당시 청십자의료보험 조합원들은 모두 영세민들이었다. 그는 또한 1959년 국내 최초로 간대량절제술에 성공함으로써 한국 의학 발전에도 기여했다. 그의 일생을 지배한 것은 기독교에 뿌리를 둔 박애정신이었다.

그는 평안북도 용천군 양하면 입암리에서 태어났다. 송도고보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인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 수석으로 졸업하고, 한국 현대의학의 개척자인 백인제 박사 문하에 들어가 외과학을 공부했다. 1940년 3월부터 평양의과대학 외과 교수와 평양도립병원장을 지내다 1950년 1·4 후퇴 때 평양에 부인과 2남 3녀를 남겨둔 채 차남만을 데리고 피난, 결국 이산가족이 되었다.

부산에 정착한 그는 1951년에는 피난민들을 위해 영도에 복음병원을, 1958년에는 행려병자를 위해 토성동에 행려병자 진료소를 차려 무료진료를 하는 한편 1959년에는 기독의사회를 조직해 인술의 전파에 노력했다. 1975년에는 부산 수정동에 청십자병원을 설립해 직접 환자들을 진료했으며, 노년에 이르러 중풍과 당뇨병에 시달리면서도 마지막까지 가난한 이들을 진료하는 데 힘썼다.

감동적인 그의 인술활동이 전 세계로 알려져 1979년에는 필리핀 정부로부터 막사이사이 사회봉사상을 수상, 한국의 성자로 칭송받았다. 장미회(간질환자 치료모임) 창설, 부산 생명의 전화 설립, 장애자재활협회 부산지부 창립에도 앞장선 그는 서울대학교, 가톨릭대학교, 부산대학교, 부산 인제대학교 등에서 강의했다. 주위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재혼하지 않고 지내던 그는 1991년 미국에 사는 조카를 통해 북한의 가족들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지만 끝내 그들을 만나지 못한 채 숨을 거두었다”



그의 에피소드 중 단연 최고는 돈 없는 환자를 스스로 병원에서 도망시킨 일화다.


어느 날, 복음병원에서 회진을 하러 가던 기려는 벌써 며칠 전에 퇴원을 해도 좋다고 지시한 환자가 그대로 있는 것을 보았다.


"아니, 당신 아직 퇴원 안 하고 뭘하노. 수술 경과도 썩 좋았는데..."


환자는 기려를 보자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서무과에서 퇴원을 못한다고 합니다. 모자라는 입원비를 가져올 때까지 신분증을 보관한다고 가져갔습니다."


"뭐라고요?"


회진하던 발걸음을 서무과로 돌린 기려는 벼락같은 고함을 질렀다.


"여기가 병원이지 세무서냐?"


화가 난 기려는 사무실의 책상을 엎어버렸다. 언제나 온화하고 인자한 원장이 이처럼 화를 내는 모습을 직원들은 처음 보았다.


엎어진 서랍 속에서 모자라는 입원비 대신 받아둔 반지나, 시계, 목걸이들이 나왔다. 그는 그것을 보자 현기증을 느끼며 걸상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환자를 돌보는 일에만 열중해 있는 동안 병원은 무료의 뜻과는 점점 멀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당장 병원 문을 활짝 열고 가난한 사람들이 마음대로 드나들게 만들었다.

그가 청십자병원 원장으로 있을 때였다.


그가 돈을 돌보지 않는 버릇은 여전하여서 돈이 없다고 사정하면 누구든 무료로 치료해 주었다. 환자 가운데에는 돈이 있으면서도 없다고 하는 사람도 더러 있을 정도였다. 손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끼고 와서 그렇게 사정을 해도 기려는 그의 말을 믿어 주었다. 옆에서 보는 직원들이 속고 있는 원장이 하도 답답하여


'원장님, 그 환자가 정말 돈이 없는 환잔 줄 아세요? 손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낀 걸 못 보셨어요?' 하면


'보았지, 하지만 그가 지금 돈이 없다고 하면 그대로 믿어야지'할 정도였다. 이런 일 때문에 정말 딱한 지경에 처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경남 거창에 살고 있는 한 가난한 농부는 입원비가 밀려 퇴원할 수가 없었다. 생각다 못한 그는 기려를 찾아가 하소연하였다.


"모자라는 돈은 벌어서 갚겠다고 해도 믿지 않습니다."


환자의 사정을 들어본 기려는 마침 주머니에 돈도 없고 하여 한 가지 묘안을 알려주었다.


"그냥 살짝 도망쳐 나가시오. 밤에 문을 열어줄 테니." 


농부는 원장의 이 말에 깜짝 놀라 더듬거렸다.


"그렇지만 어찌 그럴 수가..."


"할 수 없는 일 아닌가? 낼 돈은 없고, 병원 방침은 통하지 않고, 당신이 빨리 집에 가서 일을 해야 가족들이 살 것 아니오."


농부는 기려의 말에 눈물을 흘리며 고마워했다.


그날 밤 기려는 서무과 직원들이 모두 퇴원하고 난 뒤, 병원의 뒷문을 살그머니 열어놓았다. 밤이 이슥해지자 이불 보퉁이를 든 가족과 환자가 머뭇거리며 나타났다. 어둠 속에서 기려가 가만히 농부의 거친 손을 잡았다.


"얼마 안 되지만 차비요. 가서 열심히 일 하시오."


농부의 가족은 가슴이 막히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이었다.


"원장님, 106호 환자가 간밤에 도망쳤습니다." 간호원의 말을 듣고 서무과 직원이 원장실로 뛰어왔다.


"내가 도망치라고 문을 열어주었소."


기려는 겸연쩍은 듯 웃으며 말했다.


"다 나은 환자를 병원에 붙들고 있으면 그 가족들은 어떻게 살겠소? 빨리 가서 농사를 지어야 가족들 고생도 덜지. 지금이 한창 농번기인데....."              


                                                                 - 에피소드 발췌: 장기려, 그 사람 / 지강유철


1979년 막사이사이상 홈페이지


장기려 박사, 병원 회진 중
민들레 홀씨가 날아가 새로운 민들레를 피우듯 장기려 박사님과의 소중한 인연 덕분에 머나먼 타국에서 간호사로 성장한 저자의 장기려 박사와의 이야기
히말라야의 의료 천사 강원희 선교사



MBC 스트레이트 2024.3.17 "의사들은 왜 극렬 저항하나"

https://www.youtube.com/live/38wUJHv3MCs?si=uKLenOBHNv0F45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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