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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텀민 Feb 24. 2023

10년만 다니고 퇴사하겠습니다

그런데 벌써 11년차라구요?

 10년 하고도 두 달 전, 나는 부푼 가슴으로 한 대기업에 입사했다. 그때만 해도 있었던 채용형 인턴제도 덕분에 4학년 여름방학이 끝날 무렵 이미 취직에 성공했고, 그 덕에 취직 스트레스 한 번 받지 않고 2학기를 마칠 수 있었다.


 4학년이 될 무렵만 해도 나는 대학원에 진학할 생각이었다. 3학년 때 갔던 1년간의 미국 어학연수가 끝날 즈음 나는 이미 미국으로 다시 돌아와서 대학원을 진학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미국에서 석사를 취득하고 직업을 구해서 여기서 쭉 사는 거야. 그렇게 머릿속 계획을 그렸다. 나는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미국 대학원에 진학하기 위해 필요한 토플을 준비하는 한편 내 전공으로 갈 만한 학교들을 알아봤다. 하지만 알아보면 알아볼수록, 석사만 가지고는 현지 취업이 쉽지 않다는 현실, 그리고 외국인 유학생의 현지 대학원 학비가 얼마나 비싼지만을 깨닫게 될 뿐이었다. 석사에 박사까지 진행한다면 펠로우쉽 등을 이용하여 학비를 절약할 수 있는 방법이 있겠지만 나는 박사까지 할 마음은 없었다. 연계된 장학 프로그램이 없을까, 지푸라기라도 잡는 마음으로 가고 싶던 학교의 홈페이지를 무작정 들어가서 학과장에게 냅다 메일을 보내보기도 했다. 친절하지만 무정한 답변이 돌아왔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없어. 혹시 연계할 만한 한국인 커뮤니티가 있는지 찾아보는 걸 추천해.

 나는 본질로 돌아가 생각해 보기로 했다. 나는 정말 대학원을 가고 싶은 걸까? 내 전공에 그다지 큰 애정은 없었고, 더 공부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럼 뭐지. 난 그냥 미국에서 살고 싶었던 거다. 표면적으로는 미국에서 유학하고 싶다는 이유를 내세웠지만 내 마음속 깊은 곳은 어학연수 하는 동안 영어 외의 다른 고민을 할 필요가 없었던 편안하고 게으른 삶이 그리웠을 뿐인 것이다. 미국 생활이 좋았던 것도 덤으로. 그렇게 결론을 내리니 한결 결정이 쉬워졌다. 이런 마음으로 유학 갔다가는 외로운 타지 생활을 버틸 수 없음이 분명하고 지원해 주실 부모님께도 못할 짓이다. 한국에서 그냥 살자. 그렇게 결정을 내리고 취업 전선에 뛰어들자마자, 운이 좋게도 나는 취직에 성공했다.

첫 회사가 있던 광화문.


 입사 직후에 신입사원 교육으로 주입된 애사심에 불타 엄마한테 최연소 여자 임원이 될 거야, 라며 큰소리를 떵떵 쳤던 나는 1년이 채 되기 전에 말을 바꿨다. 엄마, 난 10년만 다니고 그냥 좀 작은 회사로 옮겨서 편하게 다닐래. 그렇게 말하는 나의 마음속에는 10년 차가 되기 전에는 결혼도 하고, 아기도 있을 거라는 근거 없는 확신이 있었다. 회사는 적당히 다니고(혹은 퇴사하거나) 가정에 더 충실해야지. 임신과 출산을 겪으며 회사를 그만두고 쭉 전업주부로 살아온 엄마를 보고 자랐기에 '엄마이자 아내'라면 커리어보다는 내조와 육아에 더 힘쓰는 게 자연스러운 모습인 줄 알았다(지금은 전혀 아니지만).




 그리고 눈 깜짝할 새 10년이 지났다. 10년을 채우고 퇴사할 줄 알았는데 9년 차에 규모가 조금 더 큰 회사로 이직을 했다. 막상 10년을 채워보니 그만두기가 더 어려워졌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름 길다면 긴 시간의 커리어가 저절로 쌓여 있는 것이다. 좋든 싫든 간에 한 분야에서의 10년 경험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 되었고, 내가 어떤 의견을 내면 나 자신이 그 의견에 대해 가지는 확신의 크기와는 전혀 상관없이, 10년 경력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내 의견은 쉽게 날아가지 못하고 무게 있게 내려앉곤 했다. 특히나 이직해 온 회사이기에 더욱더 그랬다. 이직하고서 팀장님께 들은 나를 뽑은 이유는 내가 해당 분야의 '전문가'라서랜다. 내가? 나는 속으로 뜨끔했다. 잘하지도, 좋아하지도 않았던 전공인데.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아직도 어떤 마음가짐으로 회사를 다녀야 하는지 모르겠다. 이전 회사에 우리 팀에는 96년도에 입사하신 차장님이 계셨다. 조금 더 정보를 덧붙이자면 자녀가 셋, 그리고 여성분이셨다. 개인적으로 친분을 쌓을 기회는 없었지만 나는 항상 그분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세 시간이 넘는 출퇴근 시간에 자녀 셋을 키우며 회사를 27년째 다니는 건 어떤 삶인지. 27년 동안 얼마나 많은 고비와 고민들이 지나갔을지. 그저 내가 10년을 지나 보낸 것처럼 정신 차려보니 27년 차가 된 건지. 세 명의 자녀들을 위한 교육비 마련의 명목인지(조금은 죄송한 말씀이지만 업무에 엄청난 애착을 가진 분은 아니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그것이 나의 미래인지?

 멀리서 찾을 것 없이, 나의 아빠도 30년을 직장생활을 하셨다. 그 긴 시간, 한 회사에 저녁도 주말도 없이 30년을 헌신하고 충성하셨는데 회사로부터 돌아오는 것은 별로 없었다(이렇게 쓰기엔 그 사이 너무나 많은 일이 있었지만.) 그래서... 나는 맡은 바 일은 열심히 하는 대신 회사에 충성하기도, 목 매기도 싫다는 생각으로 회사를 다니게 되었다. 회사에서 나는 부품과도 같다는 사실(경중의 차이가 있겠지만)과 함께 회사에서의 대부분의 인간관계도 얼마나 가벼운 것인지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마음으로 그저 20년, 30년, 회사를 계속 다닐 수는 있을 것이다. 월급 꼬박꼬박 나오는 직장, 52시간제 덕분에 야근과 주말근무가 없어진 환경, 적당히 괜찮은 팀장과 적당히 괜찮은 팀원들, 약간의 스트레스를 동반하지만 사원 때처럼 잠도 못 잘 정도의 스트레스는 없는 적당한 업무 강도... 누군가 보기에는 불만이 없어 보이는 생활. 이렇게 아마 쭈욱 다닐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재미가 없다. 회사에 있는 동안에는 내가 살아있음이 느껴지지 않는다. 누가 회사를 재미로 다니나!라고 하겠지만 재미로 회사를 다니고 싶은 것이 아니라 재미있는 일을 하며 삶을 채우고 싶다.(그리고 분명 업무가 재미있어서 회사를 다니는 사람도 있겠지) 그런데 졸업-취직-출산-육아의 루트로 여느 대한민국 사람처럼 평범하게 살고 싶다면 그런 희망은 욕심-혹은 사치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나온 길들이 다 고만고만해서 그런지 내 주위엔 다 나처럼 대학 졸업해서 회사 다니는 사람들이 주를 이룬다. 평범하게 회사를 다니고, 비슷한 환경의 사람을 만나서 사랑에 빠지고, 결혼을 하고, 둘을 쏙 빼닮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를 낳고, 아이를 키우며 행복을 느끼고, 그 힘으로 또 회사에 가고... 단숨에 한 줄로 써 내려갈 수 있을 만큼 평범한 삶이지만 사실 문제 없이 이런 평범한 삶을 사는 것 또한 그리 쉬운 것은 아니라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다.


 요즘은 예전보다는 일의 다양성이 존중되는 시대다. 꿈을 좇아 퇴사하는 사람도 많고 안정된 직장에 취직하기보다는 열정을 쏟을 수 있는 일에 집중하며 사는 사람도 많아졌다. 유튜브에서 '퇴사 브이로그'를 검색하면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영상이 쏟아진다. 라떼 세대와 MZ 세대 중간에 낀 나로서는 이쪽저쪽이 다 이해 가는 제일 불쌍한 사람이 되었다. 내면의 어느 한 부분은 혀를 차는 꼰대, 또 어느 한 부분은 당장이라도 퇴사 브이로그를 찍을 것 같은 마음이 공존하는 자기 분열 증상..! 하지만 역시 평범한 삶을 내 손으로 그만두기에는 지금 삶이 너무나 안정적이고, 안정적인 삶을 내 손으로 끊을 수 있는 용기가 아직까지 나에겐 없다. 평범한 삶을 가지는 데만도 들인 노력이 상당하기 때문이다. 안정적인 삶을 특별한 이유도 없이 끊고서 달리 할 수 있는 일도 떠오르지 않는다. 하고 싶은 일은 너무나, 너무나 많지만 달리 재능이 있지는 않은 분야들이므로.


 고작 10년 일했을 뿐인데 내 머릿속과 마음은 온통 이런 생각들로 가득 차서 태양 표면의 홍염처럼 일렁이며 타오른다. 아니, 고작 10년밖에 일하지 않았기에 이런 고민을 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조금 더 지나면 나도 예의 '평범한' 삶에 안착할 것이다. 미래의 어느 날 찾아올 내 아이의 눈동자에 떠오른 희망에 찬 빛을 바라보며, 까륵거리는 웃음소리를 들으며 하루를 마감하는 삶을 살 것이다. 그런 삶도 분명 행복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이 머릿속 홍염에 조금 더 집중하고, 살아있음을 느끼고, 열정을 되찾을 수 있다는 희망에 젖어있고 싶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머릿속으로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나열해 보며, 퇴근 후 찰나의 시간에 조금이나마 그런 곳에 열정을 쏟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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