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실 청소하다 남편에게 한 고백
신혼부부들에게 집안일이란 주제는 뜨거운 감자다. 회사에서도 누군가 결혼한다고 하면 '집안일'이라는 단골 소재가 어디선가 튀어나오기 마련이다.(나는 결혼했을 때 남편 아침밥은 챙겨주냐는 소리를 몇 번 들었다.)
결혼하고 나서 남편과 딱히 집안일을 분배해야 된다는 생각을 하지는 못했지만 어느새 자연스럽게 각자의 영역이 생겼다. 우리는 주말에 청소를 몰아서 하는 편인데, 남편이 청소기를 돌리는 동안 나는 빨래를 돌리고 가구들에 쌓인 먼지를 털어내고 마른 걸레질을 하고 침구나 소파를 청소하는 등 자잘한 일을 한다. 세탁물을 개거나 분리수거는 같이 하고, 설거지나 화장실 청소는 보통 남편이 하는 편이다. 그 외 싱크대나 창틀이나 현관 청소라던가 하는 건 또 나의 스콥이다.
하지만 최근 몇 년간은 나에게 집안일이 많이 기울어져 있다. 남편이 한동안은 주말도 없이 일주일에 7일을 출근하고, 또 작년부터는 주말에 자격증 학원을 다니느라 바쁘기 때문이다. 주중에는 왕복 네 시간이 넘는 곳으로 출퇴근을 한다. 많이 힘들고 바쁜 것을 알기에 내색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나도 버거울 때는 가끔(남편에게는 자주?) 밉다고 소리 지르기도 한다.
어느 토요일 아침, 남편이 당직을 서러 회사에 간 날이었다. 집안 청소를 끝낸 나는 화장실 청소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집안일 중에 제일 싫어하지만 그래도 하고 나면 제일 뿌듯한, 그러나 뿌듯함이 무색하게도 제일 빨리 효과가 사라지는... 화장실 청소. 나는 화장실 구석구석 세정제를 뿌리고 솔질을 하기 시작했다. 욕조, 세면대, 변기를 뽀득뽀득 닦고 마지막으로 배수구 유가를 들어냈다. 보통의 집들에 설치되어 있는 정사각형 유가 대신 우리 집에는 길쭉한 일자 유가가 설치되어 있다.
일자 유가는 배수구에 꼭 맞게 되어 있어서 들어낸 후 조금만 각도가 틀어지게 두어도 양쪽 벽과 벽 사이에 끼여버린다. 더욱이 우리 집은 인테리어를 하면서 이전 화장실 타일에 덧방(타일을 철거하지 않고 그 위에 바르는 것) 공사를 한 탓에 2~3센티 정도 좁아져 있어서 더 쉽게 끼는 것 같다. 그날도, 조심한다고 했는데도 또 유가가 벽에 끼여버려서 나는 벽과 벽 사이에 끼인 길쭉한 유가를 손날로 팡팡 내리쳤다. 평소에는 바로 빠졌으니까. 그런데 어라. 생각보다 바로 빠지지 않아 주먹을 쥐고 팡 한번 치고서, 그리고나서 생각했다. 아, 망했다. 머릿속이 새빨갛게 불안으로 칠해졌다. 발로 차 보려다 이내 관두었다. 이건 잘못하면 뼈가 다칠 사이즈다.
일단은 내버려 두고 다른 부분을 마무리하면서 머릿속으로는 걱정회로를 돌리기 시작했다. 여기에 끼여서 평생 이렇게 허들처럼 안 빠지면 어쩌지? 계속 이렇게 넘어 다녀야 하나? 안되지. 그럼 타일을 깨야하나? 아냐 타일은 절대 안 돼. 내가 얼마나 사랑하는 타일인데. 그럼 어떡하지. 남편이 올 때까지 일단 기다려야겠다. 아우, 남편 없었으면 어쩔뻔했어. 평생 이렇게 허들처럼 넘어 다녀야 했을지도 모르는데.
그 순간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남편에게 내가 의지를 하고 있구나. 그리고 그 사실에 조금 충격을 받았다. 나는 누군가에게 도움을 줬으면 줬지 도움을 받는 것도 청하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조금 불편한 느낌도 든다. 굳이... 내가 할 수 있는데... 그런 생각으로 살아왔기에 웬만한 것은 힘들어도 혼자 해결하는 편이다. 결혼하고 나서도 그런 경향은 계속되어서, 남편이 놔두지 그랬어, 내가 하면 되는데. 라고 말하는 일이 잦았다.
허들처럼 끼어버린 유가를 앞에 두고 갑자기 남편이 있어서 너무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의지할 사람이 있구나. 사실 남편이 와서 해결해 주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남편은 슈퍼맨 스타일도, 뽀빠이 스타일도 아닌 데다가 가끔은 나보다 약골인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을 떠올린 것은, 절대로 해결하지 못할 것 같은 막연한 불안감을 혼자서만 가지고 있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이었다. 우리 두 명이면 무슨 수든 날 것이리라.
나는 자취 생활을 오래 했다. 약속 없는 주말에 고요한 집에 혼자 있으면 이 우주 속에 나만 있는 것 같은 적막과 불안이 방 안을 떠돌았다. 학창 시절 귀하게 키우신 부모님 덕에 이런저런 집안일을 해본 적이 없어 자취를 하면서 뭐든 해결해야 할 때는 시행착오를 많이 겪곤 했다. 걱정이 생기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불안을 혼자 껴안느라 힘이 들었다. 친구나 부모님에게 고민거리를 털어놓는 성격도 아닌 데다가, 털어놓아봤자 해결은 어차피 스스로 해야 하는 것이다. 부모님은 날 위해 무엇이든 해줄 분들이지만 나는 극한의 상황이 아닌 경우에는 걱정을 나눠드리고 싶지 않았고 그래서 많은 것을 혼자 해결해 왔다. 시간이 지나면 그런 일들을 농담거리로 만들어 털어놓곤 했다. 가장 힘든 것은 해결할 방법이 전혀 보이지 않을 때, 절대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은 날카로운 불안감이 엄습할 때였다. 문제가 생기면 머릿속에 플랜 A, B, C가 좌르륵 펼쳐져야 하는데 그런 것들이 전혀 떠오르지 않을 때. 그때 나의 머릿속은 빨간 불안이 칠해진다. 그런데 이제는 그 불안을 혼자 끌어안고 있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이라는 게 뭔지 알게 되었다.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몰랐을 감정이다. 부모님, 친구와는 다르게 남편에게는 기대어지는 게 나도 신기하다(그렇다고 또 적극적으로 도움을 요청하지는 않는다. 그런 날도 언젠가 오겠지?)
평소에 감정표현을 잘 하지 않는 편이지만 남편에게 카카오톡을 보내보았다. 결혼하길 잘한 거 같애. 남편은 갑작스런 나의 고백에 깜짝 놀랐는지 한동안 답이 없다가 물음표 하나를 달랑 보냈다. 큰맘 먹고 용기 내어 보낸 건데 물음표라니 어이가 없었지만(아마 자기도 쑥스러워서 그랬겠지), 어쨌든 오랜만에 전한 나의 솔직한 마음.
결혼하길 잘했다.
(그리고 유가는 남편이 오기 전에 또 스스로 해결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