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이 졸린 것 같은데, 자리 가서 일해요
담당급 임원에 팀장까지 같이 진행하는 회의 시간에, 졸다가 쫓겨났다.
평상시였으면 시쳇말로 너무 쪽팔려서 얼굴이 붉어졌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은 가을, 고과 시즌인데 심장이 섬찟했을 수도. 하지만 나는야 26주 하고도 4일 임산부. 쪽팔리지도 섬찟하지도 않았다. 탈출시켜 줘서 고마워요. 자리에 가서 일하는 편이 훨씬 낫겠어요. 그렇지 않아도 해야 할 일이 산더민데.
26주 차 임산부의 머릿속은 바쁘게 굴러간다. 회사에서 연차비 보상이 아까운지 남은 연차를 죄다 소진하라는 정책이 내려와 새해가 되기 전에 연차를 다 소진하려다 보니, 아기의 예정일을 거의 50일은 남겨놓은 채로 휴직에 들어가게 될 것 같다. 생각보다 빠른 일정이라 그전에 올해 내내 열심히 해 온 개인 업무도 마무리해야 하고, 인수인계도 해야 하고, 내가 없는 동안 진행되어야 할 업무 계획도 짜야한다. 아직 출산 준비는 하나도 시작하지 못했다. 비슷한 주수의 산모들은 다들 맘카페에 핫딜에 당근에 여기저기 열심히 출산, 육아 용품을 사다 나르고 있는 것 같은데, 나는 영유아 브랜드도 잘 모르고 신생아에게 도대체 뭐가 필요한지도 머릿속에 없다. 큰일이다. 게다가 당장 이사가 코앞인데, 출산 준비는커녕 이사 준비도 시작하지 못했다. 해야 할 일들은 잔뜩 떠오르는데 리스트 업 되어 있지도 않고 머릿속에서 여기저기 부유하고 있다.
미뤄두었다가 마지노선에 도달해서야 착착 쳐내는 성격 탓도 있겠지만 임신이라는 게 뭐 이리 힘든지, 이제는 컨디션이 따라주지 않는다는 점이 가장 큰 원인이다. 26주면 임신 7개월, 중기에 해당하는데 이쯤 되니 소화도 어렵고 실제로 배가 무겁게 느껴진다. 배가 나와있다 보니 동작도 제한되고, 숨 쉬는 것도 어렵고,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체력저하도 훨씬 심하다. 조금이라도 무리한 것 같으면 속이 안 좋고 힘든 데다가 배가 땅겨오고, 오후가 되면 병든 닭처럼 졸기 일쑤다. 사무실에 앉아서 한창 일해야 할 세시쯤이면 갑자기 총 맞은 것처럼 졸음이 쏟아진다. 평소 같았으면 잠시 화장실에라도 가서 눈을 붙이거나 했을 텐데 그럴 생각도 들지 않을 만큼 잠이 쏟아져서 이마를 짚고 고뇌하는 척하며 잠에 나를 맡겨버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게다가 퇴근하고 나서 저녁을 먹고 나면 또 어찌 그리 잠이 쏟아지는지, 초저녁부터 기절하고 만다. 몇 시간을 저녁잠을 자다 보니 새벽에는 또 불면증이 찾아와 늦게 잠들고 결국 다음날은 하루종일 컨디션 난조를 겪는다. 그뿐인가. 예상치 못한 통증이 여기저기 찾아오는 것, 몸 여기저기가 새카매지는 것, 자랑이었던 목선과 어깨선이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몸이 둥글둥글해지는 것(벌써 10킬로나 쪘다!), 갑작스럽고도 금세 금세 찾아오는 허기짐은 또 다른 이야기다. 그나마 입덧이 끝났다는 사실을 위안으로 삼아야 할까. 출산할 때까지 입덧하는 산모들도 있다는데.
임신하기 전과 똑같이 생활하고 행동하려는 것은 나의 욕심일까? 하지만 유퀴즈에 나온 전종관 교수님이 말하길 임산부가 가장 피해야 할 것이 절대안정이라고 했으며 나는 그 말에 굉장히 동의하는 바인데 말이다.
임신해 보니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많은 것들을 겪고 있다. 몸에 일어나는 변화도 그렇지만 생활 패턴에 있어서도 그렇다. 생각해 보면 임신 전, 나는 내가 임산부가 될 거라는 생각을 한 번도 안 해보고 지낸 것 같다. 임신과 출산, 육아가 남의 얘기인 것만 같아서 실상이 어떤지 관심을 가져본 적도, 알려고 해 본 적도 없었다. 아이를 키우고 있는 친구들의 얘기만 가볍게 흘려들었을 뿐이다. 배가 많이 불러온 지금에 와서도 나의 자아와 나의 실체는 괴리를 겪고 있다. 임산부가 주의해야 할 점 같은 건 검색해 본 적도 없고 다른 임산부들은 무얼 조심하며 지내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인식하는 나의 자아는 아직 내 배 속에 아기가 없던 그 시절에 머물러 있어서, 배가 나오는 것도 좀처럼 인정하려 들지 않고 - 이거 그냥 내가 많이 먹어서 살찐 거야 - 컨디션이 안 좋은 날이나 무리하면 안 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평소처럼 돌아다니려고 든다는 점, 커피라던가 아이스 음료, 또는 매운 음식을 먹으려고 할 때 주변에서 그래도 되냐며 눈 동그랗게 뜨고 물어보면, 안 되나요?라고 되물어서 상대방을 당황하게 만든다는 점 등등에서 그렇다. 신체적 변화야 어쩔 수 없이 찾아오는 거니 적응해야 하겠지만(적응하고는 있지만) 생활 패턴까지 바꿔야 할까? 그런 생각을 요즈음 많이 하는데, 혹시 태아에게 안 좋을까 싶다가도 엄마의 심리적 안정과 기분이 더 중요한 나는 엄마가 행복한 게 최고라며 금방 그런 생각을 떨치고는 한다. 불량 엄마다.
어쨌든 이런 일상도 대략 14주, 세 달 반 밖에 남지 않았다. 아가를 보러 갈 때마다 주수보다 조금씩 큰 것을 보면 아마 세 달 정도밖에 남지 않았을 수도 있다. 불량 엄마라고, 임신생활이 불편하다며 투덜거리기는 했지만 임신하지 않았더라면 절대 알 수 없었을 경이로운 경험들도 많다. 그중 제일은 역시 태동인데 내 배가 내 의지와 상관없이 꾸물텅거리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정말 신기하다. 남편과 나의 목소리에 반응할 때도, 내가 찌르면 정확히 같은 지점을 아기가 밀어내는 것을 볼 때도 그렇다. 이상한 엄마로 볼 것 같아서 한 번도 입밖에 내어 말한 적은 없지만 처음에는 에일리언이 생각났다(왜인지 모르겠다). 내 배 속에 생명체가 있다니! 아무것도 없었는데 지금은 심장도 뇌도, 손가락 발가락도 있다니! 다른 것들은 몰라도 태동만큼은 부러울 것 같아 남편을 놀리곤 한다. 여보는 이런 느낌 모르지? 평생 모르겠네, 불쌍하다.
마음가짐이 전혀 준비가 안 된 불량 엄마지만 이렇게 천천히 적응해 나가고 있는 거라고 믿고 싶다. 사실은 아직도 내가 엄마가 된다는 사실이 전혀 실감이 나지 않아서 불량 ‘엄마’라고 나를 지칭하는 것조차 기묘한 느낌이 든다. 열 달 동안 뱃속에 품는다고 다 엄마가 되는 것이 아니듯 모성애라는 것도 절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 왔지만, 실제로 내가 겪어보니 그 생각이 더 확고해졌다. 엄마가 되는 것에는 진득한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물론 임신하자마자 아기에 대한 사랑이 뿜뿜 넘쳐나는 엄마들도 많겠지만). 아마 출산하는 그날까지도 나는 이런 마음가짐으로 살 것 같다. 그저 나만의 속도가 있는 거라고 생각하고 태어난 아가와 같이 우당당탕 성장해 나갈 생각이다.
그나저나 회의 시간만큼은 졸지 않아야 할 텐데 앞으로 휴직에 들어갈 때까지 어쩌나 걱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