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밥솥-> 비욘드 미트
친구가 한 달간 프랑스 툴르즈로 출장을 떠났다.
인생에서 가장 큰 시험을 앞두고 거기서 안 하던 짓을 시작했다.
아니 서울보다 더 바쁠 텐데?
그 에너지가 어디에서 나오는지 궁금했다.
[장 보고 왔어]
‘장을 본다’는 말엔 생기가 묻어 있다.
그건 ‘일상을 단단하게 돌본다’라는 느낌이다.
낯선 도시를 가게 되면 언제나 재래시장을 가곤 한다.
흙이 묻어 있는 당근에게서 살아있다는 감각을 느낀다.
물건 사는 사람들의 목소리, 표정, 시선, 발걸음을 따라가 보는 걸 좋아한다.
친구가 인증숏을 보내왔다.
듀엘 맥주와 와인 올리브 오일 마늘 요구르트 버섯 치약 굴
그리고 토실토실한 마늘
[조그만 광장 한밤중에 서는 장 이랬는데
걷다 보니 뭐가 툭툭 튀어나와 선물상자 같았어]
그 작은 광장에선 할아버지가 달걀을 팔고 있었다.
그 새하얀 달걀을 먹으면 왠지 뭐든 처음처럼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맘에 드는 골목에서 마음껏 헤맸는데
골목 이름이 rue boutique 래]
[예쁘다]
발음만 해 보아도 헤매고 싶어 지는 골목이다.
사진 속 낯선 그 골목 끝엔 왠지 달콤한 솜사탕 가게가 있을 거 같다.
그 사진 한 장이 날 데려고 가 보여주는 ‘세상의 모습들’,
그렇게 잠시, 아주 잠깐이지만 사진 한 장을 통해
그곳의 공기를 옴팡 덮어쓴 기분이다.
[한국 가고 싶다]
[나는 거기 가고 싶다. 나도 프랑스 장 보고 싶다.
식재료 구경하고 만지고 싶어]
그 문자를 보내는데, 나 자신에게 되묻고 싶어 졌다.
아니, 여기서 해도 되잖아? 근데 왜 안 하는 거야?
[생새우 사 오고 싶은데
타이거 새우 얼린 것뿐이네
새우가 다 삶아져 있어
감바스 만드려고 올리브유랑 마늘을 샀는데
싱싱하고 맛있는 살아있는 새우를 못 찾았어 오일에 푹 담긴~
한국 가면 노량진 가서 사서 꼭 만들어야지]
매일매일 머리 터지는 시험을 앞두고
지금 밥 하고 앉아 있을 시간이 있는 걸까?
[아보카도 사 와서 양파랑 과콰몰리 만들고.
아 지금 장 보러 가야 해 일요일에 여기 슈퍼랑 상점 다 닫아
그러고 보니 음 절구가 없네]
절구 대신 와인 병에 랩을 감아 아보카도를 으깨는 친구를 보면서
정말 왜 저러는 걸까? 싶었다.
한 번도 이렇게 구체적으로 요리 계획을 말한 적이 없었다.
칙칙폭폭 추가 재기 발랄하게 노는 동영상이 도착했다.
밥솥에서 뿜어내는 수증기가 정말로 증기기관차 같았다.
나는 분명 그 보글 보글이 주는 명랑한 에너지를 오롯이 전달받고 있었다.
밥이 끓을 때 제 멋대로 돌아가는 압력밥솥의 추가 마치 천방지축 어린아이 같았다.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에너지다.
밥솥의 추에서 순수함을 느껴보긴 태어나서 처음이다.
나는 갑자기 집에 있는 햇반을 버리고 싶어 졌다.
갑자기 여기서 궁금해진다.
그런데 햇반은 왜 상온에 오래 두어도 썩지 않는 것일까?
도대체 밥에 무슨 짓을 했길래?
저렇게 오랜 시간 썩지도 않는 것이 내 몸에 들어온다는 거 갑자기 무서워졌다.
그건 마치 죽은 것들이 뭉텅뭉텅 엉겨 붙은 덩어리 같다.
그런 햇반 조차도 겨우 데워 먹는 나 자신이, 그토록 게으른 내가 부끄러워진다.
경쾌한 소리와 함께 듬뿍 내뿜는 밥솥의 수증기에 나는 넋이 나갔다.
고작 밥솥이 밥하는 동영상이 내 인생을 바꿀 줄은 몰랐다.
[이거 풀을 모아 이불에 먹여도 되겠는데?]
나는 이미 저 풀을 촘촘히 먹인 이불처럼 새로워졌다.
저 보글보글 밥이 끓고 있는 모습을 보고 나는 생기를 되찾았다.
저게 뭔데, 내 몸속까지 그런 기운이 퍼지고야 마는 걸까?
그래
사람은 자신이 지은 밥을 먹으면
틀림없이 강해지는 것 같다.
자신의 정성을 모은 밥을 먹으면 힘이 날 수밖에 없잖아?
무엇을 먹을까 하는 사소한 선택이
나의 몸을, 생각을, 행동을, 미래를 만들어 나간다. 분명
밥을 짓는다는 건 쌀을 불릴 수 있는 여유까지 갖는다는 거다.
여기까지는 늘 나도 생각해왔다.
그래서 밥은 나 스스로 지어먹자고
어쩌면 이미 다짐하고 노력해왔다.
그렇지만 난 신경 쓸 일이 많을수록 먹는 것에 대해 소홀해진다.
그런 거라도 대충 해야 나머지 내가 신경 쓰고 있는 곳에 신경이 집중될 거 같아서.
그런데 나는 지금부터 달라지고야 말았다.
정신은 물론 육체적으로 더 바쁘고 여유가 없었을 텐데도
장을 보러 가는 친구를 보면서 나는 달라졌다.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는데 많은 계획이 필요하고 중요하겠지만
그중에서 가장 소중히 여겨야 할 것은 내가 무엇을 먹는가에 대한 계획이 아닐까?
삶의 우선순위를 바꾸자.
그래 내 손으로 만들어 먹는 밥을 가장 앞에 두자.
‘장 볼 목록’을 쓰는 일은 언제나 사람을 즐겁게 한다.
그래 지금부터 써보자.
내가 좋아하는 책의 이 대목을 다시 한번 떠올리며
레이먼드 카버가 죽은 뒤 그의 셔츠 주머니에서 '장 볼 목록'을 발견했다
달걀
땅콩버터
핫초코
호주?
남극 대륙?
나도 지금부터 ‘장 볼 목록’을 업데이트하는 사람이 되었다.
아무리 바쁘더라도 밥솥이 내뿜는 뽀얀 연기와 마주하며 살아가고 싶다.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진 줄도 모르는 화학조미료에 인스턴트에
내 몸을 내팽겨 치지 말자.
스스로 자기 자신을 돌보고
본능적으로 자신을 보살피는 힘이 솟아나는 순간은
내손으로 밥을 지어먹을 때니까.
어떤 상황에 있더라도 자신의 몸이 원하는 재료와 메뉴와 식감을 찾아내고
거기에 맞추어 요리를 하는 감각을 갖추고 싶다.
그건 쇼핑을 해서 어떤 물질을 소유하는 것보다도 휠 씬 더 가치 있는 일이다.
내가 다시 누군가를 만나게 된다면
차가 아닌 집이 아닌
눈에 바로 보이는 물질이 아닌
자신을 보살피는 감각을 소유하고 있는지 확인해보고 싶다.
(그래 놓곤 슬램덩크 하나에 넘어간 인간이 바로 저입니다)
가끔 그런 생각이 든다.
학교에서 피타고라스 공식은 배워도
살아가는데 필요한 기본기는 가르쳐주지 않는다.
엄마도 아빠도 아닌 것 같다.
그런 건 어느 날 갑자기 누군가로부터 툭, 어이없이 배우게 되곤 하는 것 같다.
단박에 전기밥솥을 샀다.
세상에 전기밥솥 종류가 이렇게나 많아?
탄수화물을 줄여주는 저당 밥솥이라니 별개 다 있다.
난 햇반과의 결별을 기념하기 위해 가장 좋은 걸로 샀다.
그런데 그 최신 전기밥솥도 결국 무기한 휴가에 들어갔다.
햇반도 잘 먹어 온 인간인 주제에 참나, 보온으로 놔둔 밥이 싫어졌다.
갓 지은 밥에 빠져 들었다.
햇반을 끊고 난 전기밥솥까지 끊는 사람이 되었다.
유브트에서 유행하는 가지 냄비밥, 옥수수 냄비밥 등등을
바로바로 따라 해 보는 냄비밥 마니아가 되었다.
덕분에 세일할 때 사 처박아 둔 르쿠르제 냄비가
전기밥솥과 바통터치를 하고 일을 하기 시작했다.
냄비밥은 엄청 거창 한 거라고 오해해왔다.
알고 보니 너무 간단했고
무엇보다 나 자신이 극진히 대접받는 느낌이 좋았다.
타인에게 잘해줄 생각 말고 나 자신에게 냄비밥을 해주자
냄비밥 누룽지가 너무 맛있어 급격하게 살이 찌는 단점은 있다.
그거 먹으려고 운동을 많이 하게 되는 장점도 있다.
맛있는 건 빨리 알려주고 싶어 안달이 나는 나란 인간,
결국 미듐 웰던 누룽지 전도사가 되었다. 겉은 바삭 속은 촉촉.
최근 기후변화로 토마토 수급이 되지 않자 햄버거 가격을 300원 내렸다고 한다.
햄버거에 토마토가 빠지면 무슨 맛일까?
있을 땐 전혀 몰랐던 토마토의 빈자리를 느끼게 된다.
앞으로 햄버거에 또 무엇이 사라지게 될까?
그래! 전기밥솥을 팔아 비욘드 미트 주식을 사자
정말 머지않아 고기가 없는 시대가 올지 모르고 아니 오고 있다!
근데 아직은 고기 없이 살아갈 용기가 나지 않는다.
고기 없이 무슨 재미로 살아?
힘들 때마다 고기 앞으로 달려갔기에 이겨낼 수 있었다.
비온드 미트여! 진짜 고기야? 콩고기야?
내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똑같은 식물성 고기를 만들어 주세요!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