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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리차 Jul 10. 2022

생각지도 못한 여행을 했었어

내가 이걸 여행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인생을 바라보는 관점이 조금 달라졌기 때문이다.

물리적으로 어디론가 떠나지 않아도 때론 여행이 시작되어버리기도 한다.


1. 뜻밖의 여정과 배신감

영주권 인터뷰 날짜가 나오길 기다렸고

그린카드가, 사회보장 번호가 마침내 나오면

한국 운전면허를 미국 운전면허로 바꾸는 그날을 기다렸다.

폭락한 주식이 오르길 기다렸고

출판사에 보낸 기획안의 답을 기다렸고

한국 가서 먹고 싶은 것 리스트를 모두 클리어할 그날을 기다렸다.

그 많은 기다림 중에 아기는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아기가 내게 왔다.

한때 혹시 나도 엄마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엽산을 먹으며 기다린 적도 있었다.

그런데 살아보니 한마디로 출산은 내게 사치였다.

가족들에게 시달리는 남편을 보면서

자식으로 인한 기쁨보다는

가족으로 인한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고 싶었다.

누구를 위해 희생하기보다 온전히 나 자신을 위한 자유로운 삶.

그래서 우리는 잠정적으로 아기를 포기하고 살아왔다.

그런데! 신은 아기를 목 빠지게 기다리는 내 측근들이 아닌, 내게 아기를 보내셨다.

내겐 너무 거창한 선물이었고 혹시 잘못 배달된 선물이 아닐까 하고 내내 의심이 되었다.


불안감보다 더 큰 감정은 배신감이었다.

하나는 내 몸뚱아리에 대한 놀라운 변화인데,

평소 밀가루 반죽이었던 가슴이 오븐에서 나온 직후 빵처럼 부풀어 올랐다.

이렇게 커질 수도 있는 거였어?

호르몬이란 사람을 다시 태어나게 만드는 신비한 화학물질이었다.

임신이 아니라면 평생 몰랐을! 내 몸이 숨기고 있었던 무궁무진한 잠재력에 깊은 배신감을 느꼈다.

내 가슴만큼이나 역대급 잠재력을 숨기고 살아온 남편에겐 더 큰 배신감을 느꼈다.

그동안 최선을 다해서 잘해주는 건 줄 알았다.

그런데 이렇게 더 잘해줄 수도 있는 거였어?

갑자기 최수종으로 변신한 남편이 낯설게 느껴졌다.


2. 목에서 구렁이가 튀어나오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받아보는 천벌이다.

목에서 구렁이가 튀어나오려 한다.

그냥 튀어나와 버리면 우웩 하고 잠잠해질 텐데 나올락 말락 해서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이건 입덧이라고 하는 건데 아직 의학적으로 밝혀진 이유는 없다고 했다.

이건 개인차가 워낙히 심한 영역이기에  입덧이라는 단어 뒤에 스펙트럼을 붙였으면 좋겠다.

그만큼 광범위한 수준에 걸친 복잡한 스펙트럼을 갖고 있다.

나는 냄새만 맡아도 목에서 구렁이가 튀어나왔다.

그 와중에 시엄마는 집에 와서 자기 자식 먹이겠다고 음식을 해댔다.

냄새가 선을 넘었다.

누워서 코를 막고 입덧 캔디를 입에 물었다. 눈물은 자동으로 주룩주룩~

임신을 하면 호르몬의 노예가 되어 극도로 예민해지고 눈물은 사우나 수도꼭지처럼 콸콸 쏟아진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임신해서 6개월간 우유와 생쌀로 버티며 입덧을 했다는 사람이 바로 시엄마였다.

그런 사람이 임산부 집에서 음식 냄새 풍기면서 요리를 한다는 거,

먹기 싫어도 아기를 위해 조금이라도 먹어보라고 권한다는 거...

잠깐만요... 이건... 아니잖아요...

도저히 시엄마가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분명,,, 당신은,,, 로봇이다. 인간이라면 이럴 순 없다.


3. 말보다 중요한 건 눈빛

미국 병원은 한국병원과는 달리 최소 9주 차부터 임신 진료를 봐준다.

어찌 보면 합리적인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기다리는 사람은 애가 타서 돌아버리는 단점도 있다.

여기 오기까지 두 번의 빡센 전화 인터뷰를 거쳤고

거기서 내 모든 병력과 건강상태 등등이 탈탈 털렸다.

그런데도 초음파를 보기 전에 또 체크할 것들이 수두루 빽빽이 었다.

아무리 스몰토크가 중요한 너희들이라지만

한시바삐 초음파 확인을 하고 싶은 내겐 너무 큰 기다림이었다.

“이 아이가 남편의 아이가 맞니?

“혹시 남편이 때린 적은 없니?

“정상적인 사랑 관계에서 만들어진 아이가 맞니?

“우울증이나 감정적 어려움은 없니?

“누가 너의 재산을 몰수하려고 압박하지는 않니?

이런 질문응답으로 대략 한 시간을 보내게 된다.

그런 걸 아무도 물어본 적이 없었기에 은근 재밌기도 했다.

미국이기에 가능한 질문들인데

그 질문들에 답하면서 요상하게도 나도 모르게 내 마음을 돌보게 됐다.

마치 '아기 심장소리보다 내 영혼의 소리를 먼저 들어야 된다고!'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만약 어떠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적어도 그걸 들어줄 한 사람 여기 있어~'와 같은 위안을 받았다.


미드와이프가 초음파를 보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당황하더니 급하게 옆방 의사를 데려왔다.

의사는 두 가지 가능성을 제시했다.

하나는 늦은 착상과 하나는 유산이었다.

아기가 6주 사이즈인데 심장이 뛰지 않는다고 했다.

객관적 가능성을 곁들여 일주일 뒤에 확실한 결과를 주겠다고 설명했지만

내게 더 확실하게 다가온 건 의사의 표정이었다.

방금 죽은 사람을 본 것 같은 서늘한 눈빛, 내게 모든 걸 이미 말해주고 있었다.


4. 너희들 돈 좀 있냐고 의사가 물었다.

일주일 후 내 주치의는 유산 판정을 내렸고 내게 슬프냐고 물어봤다.

이번에도 역시 산부인과이지만 내 정신적 건강을 먼저 살피는 그들의 의도가 느껴졌다.

나는 슬프다고 말했지만 슬프지 않았다. 아니 슬플 겨를이 없었다.

주치의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지만 난 어떤 코미디쇼의 엑스트라가 된 기분이었다.

유쾌한 캐릭터가 이끌고 가는 시트콤엔 한시도 슬픔 같은 게 끼어들 틈이 없었다.

“너희들 돈 좀 있니?”

역시나 예상 밖의 질문이었다. 이게 바로 찐 미국이다.

“임신 계획이 있으면 우리가 얼마든지 도와줄 수 있어.

자동차는 점점 그 가치가 떨어지지만 아기는 더욱 올라가잖아~. “

그는 자동차 가격으로 추정되는 난임치료를 권했다.

그 순간 깨달았다. 한 번도 나 자신에게 물어본 적이 없었다.

“아이를 갖는 일이 내게 가치 있는 일인가?”

나는 무엇에 가장 큰 가치를 두고 살아가는지

단 한 번도 제대로 나 자신에게 물어본 적 없었다.

출산은 결혼 결심보다 더 큰 확신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혼은 이혼이라는 게 있지만 출산은 취소가 안 된다.

아기를 낳는데 용기가 필요하듯이

아기를 낳지 않는 것에도 용기가 필요하다.


5. 이 여행이 왠지 위로가 될 거 같아

약물 배출로 수술 없이 아기를 보내주기로 했다.

엄청난 피를 쏟고 든 생각은

한인간 몸의 작은 구멍에서 이렇게 많은 피가 배출될 수 있구나~

그래도 죽지는 않는구나~

하루 종일 누워서 끙끙 앓을 수 있는 체력이 인간의 밑바닥에 보조 배터리처럼 있었던 거구나~

여성의 신체란 정말 신비롭고 위대했다.


주변인들이 계속 잘 먹어야 한다 이야기 하지만

나는 여전히 목구멍에서 구렁이가 튀어나오려 한다.

호르몬은 2주가 넘어야 빠진다고 한다.

회복하기 위해 나도 먹어야 한다는 건 아는데 그 무엇도 넘어가지 않는다.

아무리 최수종 코스프레를 해도 요리는 따라 하지 못하는 남편이 즉석 미역국을 끓여왔다.

“조선시대에 의술도 부족했지만 청결 때문에 사람들이 더 아픈 거였데.”

 씻으라는 말이었다.

화장실  에너지도 없는데 샤워라니요

주구장창 누워 지낸  5 차가 되자 머리에서 나는 냄새와  늘어진 몸이 서로 싸우기 시작했다.

결국 샤워를 하면서  여행의 마침표를 찍었다.

남편이 이 소식을 알리자 생각보다 많은 친구들이

"우리도 유산한 적 있었어"라는 뜻밖의 커밍아웃을 해왔다.

그 말 한마디에 왠지 아주 특별한 곳을 여행한 요상한 동지애가 느껴졌다.


막상 임신해서 생각보다 기쁘지 않았고

유산해서 생각보다 슬프지 않았다.

남들이 보기엔 불행한 일을 당한 것처럼 보였을지 모르겠다.

나는 다만, 미지의 세계에 다녀와 그 전보다 내 인생이 더 풍요로워졌음에 고마울 뿐이다.

이력서에는 쓰지 못하지만 한 생명을 품었던 경이로움, 나만 아는 생명이 다녀간 흔적,  

아이 잃은 엄마의 마음을 알게 되었다.

미리 계획해둔 여행은 조금 지루하다.

뜻밖의 여정이야 말로 "나 쏴라 있네?"  생생한 생의 감각을 느끼게 한다.

내 인생에서 힘든 고비가 있을 때마다 왠지, 이 여행이 위로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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