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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리차 Oct 21. 2022

포틀랜드로 도망친 나는 왜 또 도망치려 할까?

프로도망러의 길


돈과 명예? 아니다 충분히 지쳤다.

그래서 도망쳤다. 그 반대의 것들이 좋다.

그것도 아닌 것 같다. 너무 시시하다.

아직도 잘 모르겠다. 내가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는 지를.

다만 확실한 건, 그사이를 왔다리 갔다리 헤매고 있는 게 나라는 인간이라는 거다.

그 헤매고 있는 내가 너무 구질구질해서 도망을 쳤다.


도망을 치는 것엔 대가가 필요했다.

거금의 드라마 계약금을 물어주는 건 돈으로 해결 가능했다.

돈으로 해결 안 되는 것이 있었다.

그건 몸으로 직접 부딪히고 깨져야 했다.


변화를 주려면 사는 곳, 만나는 사람, 하는 일을 바꾸라고 했다.

제대로 된 곳으로 도망을 치면 이 3가지가 동시에 바뀐다.

서울에 살다가 포틀랜드에 살게 되었고 싱글이었는데 남편이 생겼다.

치열하게 살아가는 예능작가였지만 커리어를 잃었다.

그래서 생긴 변화는 물론 어마어마했다.

하지만 진짜 변화는 그런 물리적 변화보다

새로운 경험이 헝클어 놓은 내면의 화학적 변화다.

역시 도망치길 잘했다.

팬데믹과 길어지는 영주권 발급의 무기한 기다림 속에

꿈의 도시 포틀랜드에서도 감히 우울해지는 사람이 되었다.

겨울엔 매일 비가 오는 이 도시를 탈출하고 싶었다.

포틀랜드로 도망쳤는데 또 여기서도 도망치고 싶다고?

그럴 거면 포틀랜드 왜 갔니?

와, 정말 나라는 인간은 대단하다.

그래서 도망쳐서 뭐 하고 있냐고?

여전히 헤매고 있다.

그런 나는 포틀랜드로 도망치면서 생긴 작은 변화들을 쓰기 시작했다.

쓰고 보니 도망치지 않았으면 절대 몰랐을 것들이다.


아침에 커피는 서서 마신다.

창밖으로 보이는 오리들의 장난을 구경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서 있게 된다.

땡큐 대신 땡큐 쏘 머치라고 아주 크게 말한다.

상대가 내 영어를 못 알아듣는 순간들을 수집한다.

매일 공원을 산책하고 마음에 없는 말은 하지 않게 됐다.

사람이 아닌 대자연 앞에서는 굳이 어떤 말도 필요 없었다.

과거에 연연하는 인간보다 지금을 살아가는 강아지를 동경한다.

옷은 심플하게 나이키 블랙을 교복으로 입고 다닌다.

대신 매일 컵을 바꾸고 그릇엔 사치를 부린다.

책에는 더 큰 스케일로 사치를 부린다.

조금이라도 끌리는 책은 무조건 손에 넣는다.

내가 의지할 문장은 내손으로 고른다.

집에 굴러다니는 재료로 케이크를 굽는다.

내 레베루에 가당치도 않는 <파친코> 이민진 작가에게 질투를 느낀다.

4계절이 아니었다. 24 계절의 뚜렷한 감각을 알게 됐다.

제철의 낭만을 부리고 갬성을 찾아 돌아다닌다.

샤넬백을 모시고 다니는 것 대신 에코백의 호위를 받는다.

흑 자두 향을 좋아하게 되었고 사과는 만져보고 고른다.

결혼은 숏다리랑 하고 웬만하면 남편 같은 건 사랑하지 말라고 한다.

숏다리는 신의 축복이다. 보기만 해도 그냥 웃음이 난다.

(남편은 아직도 내가 웃는 건 자기가 좋아서 그런 줄 알고 있다.)

남편을 사랑하면 바보가 된다.

그래서 가끔 남편이 사랑스러워질 때면 거리를 둔다.

그런데 귀여울 때는 거리두기 그 딴 거 아무 소용이 없다.

내 안의 철벽이 무너지고야 만다.

가끔 남편의 개수작에 넘어가지만

결국 믿을 건 나 자신뿐이라며 외로워한다.

그럴 때마다 포틀랜드에서 어디로 도망치면 좋을지 구체적인 계획을 짠다.


고작 1년 사이에 이렇게 달라졌는데 앞으로 나는 어떤 사람이 될까?

내 손으로 써 내려간 변화들은 나에 대한 빅데이터가 되어버렸다.

그러고 나니 처음으로 나 자신의 미래가 궁금해졌다.


포틀랜드에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

가장 거대한 변화는 ‘내가 나를 바라보는 시각’이었다.

나는 드라마 쓰다가 망해서 포틀랜드로 도망친 게 아니고

내 안에 숨어있는 가능성들을 끄집어내기 위해 왔다고

그 누구도 아닌, 이 기록들이 말해주고 있었다.

드라마 작가보다 더 재밌는 사람이 될 수도 있는 거잖아?

내가 나를 오해하고 있었고 때로는 어떤 가능성들을 막고 있었다.

얼굴 붉히는 일조차 힘겨워 웬만하면 내가 참고 내가 손해 봤다.

다른 사람 상처 안 주려고 내가 내 자신에게 상처를 줬다.

이젠 타인이 아니라 나에게 더 잘해주고 싶어졌다.


내가 나를 바꿀 수 있다는 건

내가 나 자신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 같다.

그 선물을 더 많이 자주 주고 싶다.

몰랐던 내 가능성들이 여기 있다고, 이런 것도 가능하다고 발견하는 순간을

계속 만나고 싶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설렘을 자급자족하고 일상의 미묘한 차이를 기록한다.

이 기록들이 또 나를 어디론가로 데려가 줄 것이다.

그것이 프로도망러의 길!

가끔 사람들이 도망칠까 말까가 고민된다고 내게 묻는다.  사람들아 그건 도망이 아닙니다. 도망은 그런 고민따위 없이 이미  몸이 저질러 버리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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