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수 한 모금이면 출근을 해낸다
퇴근 후 운동을 다니는 직장인 친구가 있다. 운동이라고 하기엔 좀 그런데, 어떻게 말해야 할까? 약간 태릉선수촌에 입단하고 싶은 것 같다면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그 친구는 회사 근처의 체육관에서 스피닝과 복싱, 주짓수를 연마한다. 나는 운동이라고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는 것 정도가 전부인 타입이라 친구의 일과가 신기했다. 회사를 다니는 것만으로도 피곤한데 운동까지 하다니? 물론 운동을 하는 덕에 퇴근 후 운동을 가도 끄떡없는 것임을 안다. 운동만큼 체력 키우는 데 좋은 게 없고, 정신력까지 수련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좋은 게 좋은 건 줄 알면서도 쉽게 하거나, 또 막지 못하는 것들이 있지 않나(몸에 안 좋은 줄 알면서도 콜라를 박스로 사다 마시는 나).
하루는 그 친구와 대화를 하다가 회사 가기 싫은 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그런데 친구는 요즘 회사 가는 게 힘들지 않다고 했다. 출근했다가 퇴근할 때 운동을 하러 가고, 운동하는 게 너무 즐거우니까 오히려 회사 가는 것도 기다려진단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운동에 미친 사람이 아닌 이상 그럴 순 없다고. 그런데 맞다. 내 친구는 운동에 미친 사람이었다. 그렇게 말하는 친구의 초롱초롱한 눈은 추호의 거짓도 없었다. 정말이지 운동을 가려고 회사에 가는 느낌이었다.
누구에게나 출근을 이겨낼 무기 아닌 무기가 필요한 것 같다. 친구에게 있어선 운동이 무기라고 할 수 있다. 회사는 운동하러 가는 길에 들르는 것이니 출근길이 고단하지만은 않은 것이다. 그 무기가 꼭 거대할 필요는 없다(스피닝, 복싱, 주짓수는 조금 거대해 보이긴 하지만). 나의 경우에는 딱 하나, 바로 커피 한 잔이다.
회사 앞 C카페의 아이스라테를 좋아한다. 입사 초기에는 편의점에서 유음료를 사 마시거나 믹스커피를 타 마셨고, 가끔 빵집에서 점심을 사면서 커피도 사 마시긴 했다. 물론 자주 가진 않았다. 1, 2천 원도 아니고, 그 당시엔 커피 한 잔을 사 마시는 돈이 꽤나 아깝다고 생각했던 터다. 하지만 직장인 생활이 이어지니 생각은 금세 달라졌다. 돈 벌어서 뭐해, 기쁨 얻으려고 쓰는 거지! 그러다 보니 맛없는 커피를 마실 때면 기쁨보다 슬픔, 슬픔 내지 분노가 치밀기 시작했다. 이 맛없는 거에 4천 원을 쓰다니.
그러다가 C카페를 만났다. 처음에는 '여기는 너무 쓰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피곤에 절은 날, 웬만해선 눈 뜨고 있기도 힘들 것 같아 C카페를 재방문했다. 그렇게 쓴맛에 중독되어 아침마다 찾아가게 된 것이다. 여름은 싫은데 그곳의 아이스라테를 마실 수 있는 건 좋고, 얼어 죽어도 아이스라테만 찾을 지경이 됐다(직원분의 '정말 아이스요?'라는 물음은 덤이고). 출근길은 힘들지만 곧 커피를 마실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 위안을 얻기 시작했다. 심지어 급체를 하게 돼 배가 아플 때는 다음 날 출근길에 커피를 마실 수 없다는 게 슬플 정도로, 커피 한 잔에 의지하는 날이 늘었다. 사람들이 커피를 생명수라고 말하는 건 농담이 아니다.
직장인들에게 특히나 힘든 시간인 일요일 밤. 개인적으로는 일요일 점심시간만 넘어가도 마음이 안 좋다. 아침 일찍 일어나 <동물농장> 보고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와 <출발 비디오 여행>을 보고 나면 급격하게 우울해진다. 끝났네, 끝났어. 그럴 때면 어김없이 머릿속에 무기 하나를 떠올리며 안정을 얻는다.
'내일 아침에도 커피 마시러 갔다가 회사 잠깐 들러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