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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목란 바라기 Nov 01. 2022

북송시기 유학 부흥은 불교 대사들에서 비롯되었다

흔히 성리학자들은 불교를 배척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북송시기 성리학자들과 불교는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불교가 세속화되지 않았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성리학이 탄생했을까 의심할 정도로 말입니다. 이에 대해 여영시余英時는 《주희의 역사세계》에서 다음과 같이 간명하게 설명합니다. 




북송시기에 이르러 불교의 세속화는 더욱 심해졌다. 덕망 높은 고승들은 사대부들 못지않게 세상 일에 관심을 두었다. 북송시기 사대부들이 정치적, 사회적 지위가 상승하고, 그들의 영향력이 커지자, 불교도들도 불교를 널리 전파하기 위해 사대부들이 여론을 고취하는 힘을 빌려야 했다. 따라서 불교도들과 관리가 된 사대부들 사이에 밀접한 교류가 발생하였고, 이는 송대 정치 문화에서 가장 두드러진 현상이었다. 북송시기 유명한 승려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사대부가 되는 일, 그리고 사대부가 "선불교"를 논하는 일은, 그 현상의 두 가지 측면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불교 사상이 세속화되어서 세상에 대해 적극적으로 나서는 태도를 지니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유가 경전을 널리 읽어 그 함의와 가치를 밝혔으며, 다른 한 편으로는 공개적으로 나라와 천하를 평안히 다스리는 것을 유가의 책임이며, 불교가 사회에서 존재하려면 유학자들이 이룩한 치세에 의지해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인정했다. 이는 북송시기 불교의 유학화, 그리고 승려들의 사대부화와 표리를 이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랫동안 우리는 종종 성리학자들이 불교를 배척하자는 주장의 표면만 보고, 그들이 불교를 핍박하는 과정을 통해, 중국 사상이 세속화되었다고 단정을 내렸었다. 그러나 이는 사이비에 불과하며,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보다 깊게 관찰해보면 북송 시기 상당수의 불교대사들이 사회질서의 중건을 힘껏 밀어붙혔을 뿐만 아니라, 유학 부흥의 공신임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특히 북송시기에 《중용》의 재발견과 전승은 성리학자들이 아니라 불교대사들에게서 시작되었다. 북송시기 유학자들 가운데 가장 먼저 《중용》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이는 호원胡瑗이다. 하지만 호원보다 훨씬 전에 활동했던 스님인 지원智圓은 이미 "승려의 몸으로 중용을 외친다"고 말했었다. 뿐만 아니라 호원이 활동하던 1027년 북송 조정은 과거 급제자에게 처음으로 《중용편》을 사여했다. 그리고 그 때 과거에 급제한 이들 가운데 적어도 일곱 명은 불교와 깊은 관련이 있었다. 따라서 성리학자들이 《대학》과 《중용》을 유학의 기본 문헌으로 인식한 것은 한유韩愈라는 당나라 시기의 유명한 학자의 유산에서 비롯된 것도 아니고, 그들이 《육경》을 모두 읽으면서 무슨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만도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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