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번째 데이트 - 헤밍웨이
춘삼월이라는 말이 참 생소하면서도 간절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곳에 너무 오래 살았다는 증거다. 겨울 끝자락이 되면 버텨 온 기운이 다 빠져서 힘이 들 정도로 이곳의 겨울은 길다. 이제는 올 때도 되지 않았나 봄을 기다리기 시작하는 4월이 되면 겨울 내 장착해 온 서바이벌 모드도 풀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러다 또 눈이 쏟아지는 날이면 쌓이는 눈에 움푹 파이는 발자국만큼 마음도 움푹 꺼지곤 한다. 춘삼월이 아니라 춘사월만 되어도 이렇게 힘들지는 않겠다며 한숨을 내쉬어 본다.
'음, 힘들다.'
그 해 겨울은 실제로도 유난히 흐리고 길었다고 뉴스에 나올 정도였다. 그리고, B. 그에 대한 내 감정은 이제 평온한 상태였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기운을 많이 썼던 탓인지, 나에게는 더 숨이 차도록 긴 겨울이었다. J를 만났던 날도 봄이 올 기세라고는 찾아볼 수 없이 차디 찬 4월의 어느 날이었다. 치마에 코트를 입기에는 아직 많이 추웠지만, 그래도 첫 데이트에 발열 바지와 패딩을 입을 수는 없었다. 벌써 여섯 번째 소개팅이다. 이제는 별다른 노력 없이 의상을 잘도 골라 입고, 첫 만남이라고 딱히 긴장을 하지도 않는다.
지난 다섯 번과 마찬가지로 내가 먼저 도착했다. 내가 약속시간보다 많이 이르게 도착하는 것도 아닌데 왜 남자들은 늘 늦는 것일까 생각했다. 약속한 상대를 기다리는 일이 싫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오느라 분주했던 마음을 가라앉히고 숨을 고르며 주위를 둘러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는 것이 좋다. 근처에서 일하는 친한 언니의 말에 의하면 이 동네 회사원들이 퇴근 후 편하게 들러 한 잔 하는 오래된 술집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시끌시끌한 분위기가 종로의 어느 술집인 것 같아 왠지 정감이 간다. 샛노란 비닐 천장에 줄줄이 전구들을 달아 놓은 것이 한국의 포장마차 같은 분위기도 든다. 따끈한 국물 안주에 소주 한잔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사이 J로 보이는 남자가 들어선다.
그는 인사를 하자마자 앉지도 않고 겉옷을 벗어 댄다. 약속에 늦어서 급하게 온 듯한데 천장에 설치된 히터가 열기를 뿜어대자 견딜 수 없나 보다. 황급히 벗어대는 통에 내 앞에서 그의 속살까지 다 드러냈지만, 나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몸매는 나쁘지 않은데, 지금 일부러 저러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며 J의 복근을 감정하는 나 자신에 피식 웃음이 나온다. 난 이제 여유가 생긴 걸까, 아니면 기대를 아예 내려놓은 걸까. 대학교 때 한 번인가가 전부였던 내 소개팅 경력인지라 지금 이 나이의 소개팅은 무엇이 다른 것인지, 아니면 원래 이런 것인지 비교대상이 없다. 게다가 외국 남자들과의 소개팅이라니. 인생은 정말 예측할 수가 없다. 예측 불가능의 삶이 예전에는 흥분되는 모험이었지만, 어른이 되고 부모가 된 상황에서는 더 이상 설레지만은 않는다. 요즘은 믿지도 않는 점쟁이라도 찾아가 보고 싶은 심정이다.
그 사이 윗도리를 한 겹만 남긴 채 다 벗고 조금 열기를 식힌 듯한 J와 마주 앉았다. 나보다 두 살이 많다고 했던 것 같은데 젊은 스타일에 깔끔한 인상이다. 나처럼 이혼 경력이 있는 것도 아닌데 사십 대까지 미혼인 그의 사정은, 혹은 문제는 무엇일까 생각했다. 일정한 나이 때가 되면 의례 적당한 상대를 찾아 결혼을 해야 정상이라는 통념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내 나이대의 남자들을 만나며 '왜?'라는 의심을 먼저 갖게 되는 것이 스스로도 위선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혹시라도 원하지 않는 상황에 처하게 될 것을 경계하여 나도 모르게 방어적이고 판단적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는 2,30대를 일본과 호주 등지에서 여러 일을 하며 보내가다 다시 고향인 캐나다로 돌아와 자리 잡게 된지는 몇 년 되지 않았다고 했다. 나는 그제야 그래서 아직 싱글이구나 이해가 되다가, 젊은 시절에 외국 생활을 많이 했으면 여러 여자들도 많이 만나보았을 것 같다는 또 다른 편견에 빠져들었다. 그는 그동안 만났던 남자들보다 좀 더 여유 있어 보였다. 소개팅 경험이 많은 것인지 연애 경험이 많은 것인지, 긴장하는 모습 없이 대화도 능숙하게 잘 이끌어 나간다. 중간중간 flirting 섞인 농담도 잘하는데 혹시 선수인 건가 하는 생각이 들게 아슬아슬하게 선을 넘나 든다.
재미없는 남자와 재미있는 남자, 그리고 지나친 남자는 어떻게 보면 한 끗발 차이이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과 연애를 전제로 만나는 소개팅은 그 사소하고 미묘한 한 끗발 차이로 빠른 시간 안에 사람을 판단해야 하는 행위이다. 그런데 그 사소함과 미묘함이 그 사람과는 상관없는 나 자신의 감정과 상황, 선입견과 편견에 지배당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소개팅이란 행위는 대단히 모순적이다. 그래서 적어도 세 번은 만나보고 판단하라는 말이 있지만, 이번에도 나는 J를 다시 만나고 싶은지 잘 모르겠다.
여러 가지 면에서 그는 딱히 나무랄 데가 없다. 적어도 지난번 D처럼 매너도 없고 재미도 없고 외모도 너무 별로인 데이트 상대는 아니다. 키도 큰 편에 말끔한 외모, 그리고 나를 종종 웃게 하는 유머감각에 절대 지루한 데이트는 아니다. 자신이 주문한 음식을 먹어보라며 건넨다던지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계산을 해두는 매너 또한 훌륭하다. 그리고 줄곧 나에게 호감을 보이며 다시 만나고 싶다는 적극적인 표현 또한 보여 줬다. 이런 상황을 이성적으로 판단한다면 나는 그의 애프터를 받아 주어야 한다. 그런데 왜 나는 또 그를 다시 만나야 할지 확신이 들지 않는 걸까. 사람을 한 번 만나 판단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그래서 한 두 번 더 만난다고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도 잘 아는데. 이쯤 되니 나는 나 자신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도달했다.
새로운 사람에게 마음을 열지 못하고 그 사람과의 가능성에 기회조차 주지 않으면 어떻게 연애를 하겠다는 것인지. 첫 만남에서의 호감이라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인가. 처음 만나는 낯선 사람에게 호감을 느낀다는 것 자체가 가능하기는 한 것일까. 나는 이제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어 버린 것은 아닐까.
나는 머리가 복잡해지고 마음이 심란해져 버린 채, 찬 바람이 매정한 밤길을 걸었다. 또다시 하얀 눈발이 점점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J는 추위에 몸을 떠는 내 어깨를 그의 팔로 감싸주었다. 그렇게 지하철까지 바래다준 그에게 나는 만나서 반가웠다는 짧은 인사를 건네고 헤어졌다. 그에게 다시 연락이 온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했지만, 매너에 유머감각에 눈치까지 있는 그는 다시 연락하지 않았다. 나의 기나긴 겨울이 끝나기까지는 아직 멀은 것 같다.
사진: Hemingway's Restaurant, Toronto, ON